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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78)화 (278/385)
  • 278화. 누구를 위해 왔는가

    밤이 되어 태후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수면향이 조용히 타오르자 태후는 눈을 감고 누웠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고 싶지는 않아 그대로 누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 중에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눈앞에 어떤 장면이 반짝 스쳤다.

    처음에는 화려한 궁전에 무릎을 꿇은 관리들이 보였고 나중에는 마치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태후는 아주 높고 빠르게 날았다. 산천초목이 발밑을 스쳐 지나갔고 마침내 태후는 넓은 바다를 보았다.

    파도가 출렁이고 밀물과 썰물이 들었다 나갔다 했다. 항만에는 작은 배 몇 척이 정박해 있었다. 해안가에는 흰 담장에 검푸른 기와집과 푸른 버드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낭랑하게 책을 읽는 소리가 집안에서 들려와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더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시선을 돌려 바다 쪽을 본 태후는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배 한 척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흉악한 도둑놈들이 배 위에서 뛰어내려 해안가로 돌진했다.

    방금까지도 책을 읽고 있던 소년들이 하나둘씩 집에서 뛰쳐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도둑들은 칼을 들고 소년들을 추격하며 베었다.

    소년들이 하나하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불길이 일기 시작하자 방금까지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경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화면으로 변했다.

    이때, 그녀는 도둑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저기 있다! 태자가 저기 있다!”

    목소리를 따라 눈을 돌려보니 도둑들이 한 소년의 뒤를 쫓아가 악랄하게 칼로 베는 모습이 보였다.

    “근아(阿谨)!”

    태후가 비명을 질렀다.

    늙은 궁녀가 헐레벌떡 방안으로 들어왔고 뒤에서 궁녀가 등불을 들고 따라왔다.

    “마마! 마마!”

    태후는 천천히 눈을 뜨고,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태후는 태자가 살해당하는 꿈을 꾸었다.

    ‘내가 원한에 사로잡혀, 마음이 불안한 것일까?’

    * * *

    지온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태후를 화나게 하고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고 혼자 저녁밥을 먹고 쉬었다.

    그녀를 모시러 온 궁녀 두 명이 소곤소곤 속삭였다.

    “이 지온 소저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오래간만에 입궁해서는 감히 태후께 불경한 짓을 하다니. 다른 집 아가씨 같았으면 태후마마를 엄청 받들어 모시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온화한 마마께서도 다 기분 나빠하셨는데 오히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

    “흥! 그건 마마를 신경도 안 쓴다는 거지요, 안중에도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청녕궁에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다 태후의 심복이었다. 이 궁녀의 말투에도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

    다른 궁녀가 좀 더 이성적으로 말했다.

    “아직 판단하긴 일러. 내가 볼 때 왕 상궁께서 여전히 지온 소저에게 잘 대해주시는 것 같아. 아마 별일 아닐 거야. 어쨌든 우리는 잘 모셔야지. 푸대접하면 안 돼.”

    그 궁녀가 마음이 조금 풀어진 듯 대답했다.

    “언니 안심해요. 어쨌든 손님이잖아요.”

    “알았으면 됐어.”

    * * *

    지온은 날이 밝을 때까지 푹 잤는데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큰일이 났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지온은 일어나서 세수와 화장을 하고 태후를 만나러 갔다.

    침전의 침대에 기대어 앉아 보고를 듣던 태후가 눈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해라.”

    왕 상궁은 찻잔을 손에 든 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마마!”

    태후는 인상을 쓰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 상궁은 태후가 차를 후후 불어 입에 머금었다 삼키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마마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아직 어린 아가씨와 말씨름해 무엇하시겠습니까?”

    태후가 흥 하니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내가 잘 자지 못하는 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닌데 그 아이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어째서 그 아이를 믿는 게냐?”

    “하지만 그 아가씨의 말이 정확했지 않습니까.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마마께서 왜 선대 태자(先太子) 전하의 꿈을 꾸셨겠습니까? 마마께서는 이미 오랫동안 잠을 푹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왕 상궁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태후는 말이 없었다.

    왕 상궁은 국그릇을 궁녀에게 건네주고 모두 물러가게 한 뒤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마마, 대장공주마마를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공주마마께서만 그녀를 믿었습니다. 또 무슨 화신첨이라던가…… 어쨌든 다른 아가씨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후는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왕 상궁은 한층 더 분발했다.

    “그리고 마마께서 이런 꿈을 꾸신 것을 보면 태자 전하께서 저승에서 편안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태자 전하를 저승에서 편히 쉬게 해 주실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왕 상궁이 선대 태자에 관해 이야기하자 태후의 마음이 움직였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태후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를 들여보내게.”

    왕 상궁이 웃음을 지었다.

    “쇤네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온이 들어왔다.

    태후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주렴만을 늘어트려 놓았다.

    “신녀,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마마.”

    궁녀가 비단의자를 가져오자 왕 상궁은 지온에게 앉으라고 권한 뒤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지온은 왕 상궁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큰 침전에 이들 세 사람만 남았다.

    지온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셨다.

    궁전 안에는 다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왕 상궁은 지온이 입을 열지 않자 먼저 말을 꺼냈다.

    “지온 소저, 마마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지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지온이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대답했다.

    “병을 치료하려면 병의 원인을 찾아야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려면 그 불안의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마마의 원한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신의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왕 상궁은 자기도 모르게 침대를 쳐다보았다.

    그 원인은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지온이 입 다물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녀는 일의 자초지종을 끝까지 확인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태후마마에 대해서는, 신녀도 대략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왕 상궁은 속으로 놀라 급히 물었다.

    “무슨 말인가요?”

    지온이 말했다.

    “원한에 사로잡히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태후마마께서는 선량하신 분이라, 당연히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으셨을 테지요. 그러니 아마 두 번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크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왕 상궁이 놀랍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아가씨,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겐가? 태후의 몸으로 무슨 큰 억울할 일을 당한단 말인가? 저 소저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사건은 태후마마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일일진대, 지온 소저가 어찌 꺼낼 수 있단 말인가!

    드리워진 주렴 안에서 낮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겁도 없구나!”

    태후가 천천히 일어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망언을 하다니, 내 너를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하느냐?”

    지온은 일어서서 몸을 살짝 숙였다. 자세는 공손했지만, 대답은 오히려 불경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신녀,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진실?”

    태후가 냉소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진실이란 것을 말하고 목숨을 잃었는지 아느냐. 지온 소저가 조방궁이라는 작은 발판으로 대장공주에게 줄을 댄 것을 보면 아무리 봐도 바보는 아닌데, 지금 어찌 이리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네가 그런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면, 내가 너를 달리 보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태후는 정말 화가 났다.

    왕 상궁은 초조하게 지온을 바라보았다.

    ‘이 아가씨도 정말, 태후마마께 어찌 말을 이리 한단 말인가? 어서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고!’

    하지만 지온은 아무래도 계속 불경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 대답했다.

    “예. 신녀는 태후마마께서 분명히 다른 눈으로 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이럴 배짱이 있다니!

    밤을 꼬박 새운 태후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억누를 수 없었다.

    ‘그 일이 내게 얼마나 비통한 일인데, 이 어린 것이 가져다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단 말인가! 내 걱정거리를 맞추면 단번에 하늘로 승천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녀는 미처 화를 내기도 전에 이어지는 지온의 말을 들었다.

    “……신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태후마마께서는 다른 눈으로 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너!”

    “신녀, 어명을 받들었으나 사실은 양어머니를 위해서 왔기 때문입니다.”

    태후는 그 말을 듣고 멍해졌다.

    대장공주.

    선대 황제가 돌아가시고 나서 선대 태자 역시 세상을 떠났다. 태후가 이 세상에 무조건 믿는 사람이 하나 남아 있다면 그건 아마 대장공주일 것이다.

    3년 전에 천자가 바뀐 이후로, 그녀들…… 즉 올케와 시누가 쌍으로 과부가 되었다. 한 명은 청녕궁으로 이사하고, 한 명은 조방궁에 들어간 후로 둘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 후, 한 반년 동안은 대장공주가 정신이 맑아진 상태로 궁에도 방문해서, 예전과 다르지 않게 서로 잘 지냈다.

    이 모든 것은 대장공주가 갑자기 양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태후는 주렴을 사이에 두고 이미 일어서 있는 지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후가 알고 있는 대장공주는 이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면 양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장공주는 몇 번이나 궁에 와서 구구절절 지온에 대해 칭찬 늘어놓을 정도로 지온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태후가 무언가를 유추했다.

    “무슨 뜻이냐?”

    지온이 문 쪽을 쳐다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늘 마마를 염려하셨습니다. 때마침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 청하시기에 신녀가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 바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황제를 대신해서 염탐하러 온 것이지만, 사실은 대장공주를 위해서 온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루안과 바로 얼마 전에 약혼한 사이였다.

    게다가 루안은 황제의 심복이었다.

    태후는 잠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도대체 그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태후는 지온이 왜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황제가 알고 싶어한다면, 황제에게 알려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분명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온이 질문했다.

    “마마께서 어젯밤에 잠을 설치지 않으셨습니까? 꿈에서 무언가 보지 않으셨습니까?”

    태후는 마음이 흔들려 불쑥 물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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