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77)화 (277/385)
  • 277화. 마음을 가라앉히다

    이튿날 궁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능양진인은 궁인이 자기를 데리러 온 줄 알았는데, 지온을 데리러 왔다고 해서 잠시 멍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필요 없다고? 정말 잘 됐구나!’

    능양진인이 채 다 기뻐하기도 전에 궁에서 다른 사람이 와서 옥비가 경전 강의를 듣고자 그녀를 부른다고 전했다.

    능양진인의 얼굴에 떠오른 재미있는 표정을 보고 지온이 빙그레 웃었다.

    “이런 우연이! 사숙, 저와 같이 타고 가시겠습니까? 시간도 절약할 겸.”

    능양진인이 어찌 감히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능양진인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그녀와 동행했다.

    가는 길에 능양진인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지온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어서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눈앞에 궁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지온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옥비가 무엇을 묻든지, 처음에 했던 말을 나중에도 그대로 하십시오.”

    능양진인이 정신이 번쩍 들어 막 물어보려는데 마차가 멈췄다.

    마차는 드디어 궁문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능양진인은 지온이 작은 가마에 올라 청녕궁으로 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능양진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내시를 따라 묵묵히 영수궁으로 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옥비는 글씨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능양진인은 옥비를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목이 너무나 말랐다. 능양진인은 지난 두 번이나 아무 일도 없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여 참지 못하고 차를 조금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비가 천천히 정실로 들어왔다. 

    “어쩐지 조방궁의 명성이 그리 자자하더라니.”

    옥비가 앉으며 말했다.

    “주지의 약방문이 아주 영험하더군!”

    능양진인은 어리둥절했다.

    “마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후궁에 경사라도 생긴 건가?’

    능양진인이 옥비의 배를 응시했다.

    옥비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남 좋은 일만 실컷 했지만 말일세.”

    ‘아, 회임한 게 다른 사람인 게로군?’ 

    능양진인은 깨달았다. 

    ‘어쩐지 오늘 옥비의 태도가 저 모양이더라니.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나는 약방문만 가지고 왔지 누구를 임신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능양진인은 곧 옥비가 왜 그녀를 불렀는지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자네가 원기를 북돋우는 방법도 가지고 있는데 낙태하는 방법도 없지는 않을 것 같더군.”

    능양진인을 보며 옥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주지, 말해보게, 그런가 안 그런가?”

    “아닙니다! 마마, 빈도는 그런 물건은 모릅니다!”

    능양진인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옥비는 미소 짓고 있다가 갑자기 그녀가 마셨던 찻잔을 가리켰다.

    “몇 번을 다녀가는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더니 어째서 오늘은 영수궁의 차를 마신 건가?”

    능양진인은 얼떨떨했다.

    옥비가 천천히 다가오자 능양진인의 얼굴이 점점 두려움에 질렸다.

    “참으로 공교롭지, 전에 주지가 차를 안 마셨을 때는 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네. 그런데 하필 이번에 마신 차에는 뭔가를 좀 넣었네만……”

    능양진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곧 그녀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토하고 싶어졌다.

    ‘차를 마신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벌써 오줌으로 변했을지도 모르지. 어찌 토할 수 있겠는가.’

    옥비가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주지, 무서워하지 말게, 이 물건은 나쁠 것이 없다네. 그저 궁에서 말 안 듣는 노비에게 쓰는 것이라 정기적으로 해독제를 먹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지.”

    그녀를 바라보는 능양진인의 눈빛은 공포로 가득했다. 

    능양진인은 이런 비약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조방궁의 역대 여도사들은 궁중의 귀인을 모셨기 때문에 얼마쯤은 그런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이런 궁중의 비약은 주로 첩자를 통제하는데 써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 물건이 자신에게 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본궁도 그걸 주지에게 쓰고 싶지는 않았네, 그래도 오랜 친구 같은 사이니까 말이야.”

    옥비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받치고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데 주지가 요즘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아! 본궁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더군.”

    “마마! 마마!”

    능양진인이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까지 기어가서 애걸복걸했다. 

    “빈도가 요 몇 년 동안, 마마께 충성을 다했으니 마마께서는 충심을 헤아려주십시오!”

    “이러면 자네의 충성심이 좀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옥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 해독제 말이네. 본궁은 절대, 자네의 해독제를 떼먹지는 않을 걸세.”

    “마마…….”

    능양진인은 옥비의 마음이 이렇게 강경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 자신은 옥비가 시키는 대로 다 해주었다. 그녀가 약방문을 달라고 해서 약방문을 구해다 주었는데도 이렇게 독약을 썼단 말인가?

    “어쩔 수 없겠군, 본궁은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앞으로의 일을 맡길 수 없으니 능양지주가 억울해도 감내하는 수밖에.”

    옥비가 미소를 지으며 능양진인을 보다가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잘만하면 되네. 입만 잘 다물고 있으면 이 약을 먹었든 안 먹었든 별 차이가 없지.”

    능양진인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녀는 옥비의 마음이 이미 정해져 있어 자신이 아무리 빌더라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야심이 너무 컸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왜 후궁의 새로운 비에게 줄을 대려 했을까? 지금 후회해 봐도 소용이 없으니 이제는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능양진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빈도가 다음에 약방문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니.”

    뜻밖에 옥비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이번에 본궁이 필요한 것은 약방문이 아니라 약이네!”

    * * *

    지온은 청녕궁에 도착했다.

    태후 곁을 수행하는 늙은 궁녀가 지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궁녀가 지온을 안내해 데려다준 후에야 지온은 예불이 끝난 태후를 만날 수 있었다.

    태후는 매우 상냥하여 그녀를 가까이에 불러다 놓고 이야기했다.

    “네 양어머니는 요즘 어떠시니? 정신은 온전하시니?”

    지온이 대답했다.

    “마마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께서는 요즘 아주 좋으십니다. 잠도 편히 주무시고 입맛도 좋으셔서 잘 드시고 계십니다.”

    태후는 흐뭇했다.

    “네가 온 이후로 대장공주가 기운을 많이 차렸다. 착한 것, 고맙구나.”

    지온이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말했다.

    “감히 어찌 마마의 감사를 받겠습니까. 신녀와 양어머니가 모녀가 된 것은 하늘에서 맺어준 인연이니 서로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태후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두드리다 손이 차가운 것을 느끼고 궁녀에게 손난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고생스럽게 널 부르다니, 폐하께서도 참…….”

    “페하께서 효성이 지극하시어 그런 것 같습니다.”

    지온은 잠시 멈추고 태후에게 청했다.

    “신녀가 마마의 맥을 짚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은 바로 태후의 손목을 잡고 잠시 자세히 맥을 짚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자 태후가 웃으며 물었다.

    “어떠냐? 건강하지?”

    지온이 미소 지었다.

    “마마께서는 원기가 왕성하시고 병도 없으십니다.”

    태후가 말했다.

    “안 그래도 황제께서 걱정이 너무 많은 거라고 말해두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숙면을 못 하는 것은 흔한 일이야. 태의도 아무 말 하지 없으니 놀랄 일도 아니지.”

    지온도 동의했다.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태의원에 천하의 명의들이 모여 있는데 그분들이 괜찮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로 괜찮은 것입니다.”

    태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지온이 태후의 말뜻을 알아듣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녀는 의사가 아니라 도교의 제자입니다. 만약 병이 난다면 그것은 신녀가 치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놀라서 마음이 안정이 안 될 때는 신녀가 도울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태후가 멍해졌다.

    늙은 궁녀가 급하게 물었다.

    “지온 소저, 그게 무슨 말인가요?”

    지온은 그녀들을 보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마마께서 원한에 사로잡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는 뜻입니다.”

    태후의 웃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목소리도 싸늘해졌다.

    “지온 소저, 말조심하거라! 이 궁궐 깊은 곳에 용의 기운이 서려 있는데 무슨 원한이 있다는 게야? 너는 대장공주의 양녀이고 능운진인의 수제자인데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면서 고의로 사람을 놀라게 하면 안 되지!”

    그녀는 화가 난 듯 아주 강하게 말했는데 아마 담이 작은 사람이었다면 바로 무릎을 꿇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온은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도 않고 심지어 그녀에게 반문했다.

    “마마,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태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늙은 궁녀에게 지시했다.

    “지온 소저를 데려가서 쉬게 해라!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는지 헛소리를 다 하는구나.”

    늙은 궁녀가 대답했다.

    “지온 소저, 가시지요.”

    지온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늙은 궁녀를 따라 나갔다.

    늙은 궁녀는 지온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걸어가면서 작은 소리로 당부하듯 말했다.

    “지온 소저, 태후마마께서는 귀신 이야기를 싫어하시니 더는 말하지 마세요.”

    그러나 지온은 말했다.

    “제가 궁에 들어온 것은 마마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찌 얘기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늙은 궁녀는 한숨을 쉬었다.

    “또 그 얘기를 꺼내면 마마께서 화를 내실 거예요. 사실 정말로 별일 아닙니다. 마마께서 잠을 못 주무시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요즘 날씨가 추워서 밤에 잠을 설치시는 겁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지온을 부른 이유는 사실 핑계에 불과한 것 아니었던가? 어차피 양쪽 다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지온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자 늙은 궁녀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저는 아직도 무슨 원한이 있다고 생각해요?”

    침소에 도착하자 지온이 복도 앞에서 멈추고 뒤돌며 말했다.

    “제가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도가의 제자입니다. 의술은 약할지 모르지만,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제가 잘하는 일입니다.”

    지온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무릎을 굽혀 수고하셨다고 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늙은 궁녀는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왔다.

    * * *

    그녀가 돌아오니 태후는 아직도 화가 나서 궁녀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지온 소저는 처음 한두 번 만났을 때는 단정하고 얌전한 것 같더니 사석에서 이렇게 경망스러울 줄은 몰랐구나. 대체 무슨 원한에 사로잡혔다는 건지. 내 앞에서 귀신 얘기를 떠벌리고 대관절 무슨 속셈인 게야? 설마 아봉(*阿凤: 대장공주)도 이런 거에 속은 건 아니겠지? 안 되겠다, 한번 궁으로 오라고 해야겠어!”

    늙은 궁녀가 웃으며 말렸다.

    “마마 화내지 마십시오. 대장공주께서 어떤 분인지 아직도 모르십니까? 만약 이 어린 아가씨의 몇 마디 말에 속은 것이라면 공주께서는 20년 동안 조당(朝堂)에 드나들며 헛고생을 하신 것이 됩니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잘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태후는 자신의 수행 궁녀조차 이렇게 말하니 더욱 불쾌해졌다.

    “그럼 그 아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정말 무슨 원한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인 게야?” 

    “당연히 아닙니다.”

    늙은 궁녀는 완강히 부인했다. 그녀는 태후의 감정이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 말을 이어갔다.

    “노비는 그저 대장공주마마를 믿는 것일 뿐입니다. 이 오랜 세월 동안 마마께서 언제 양녀를 거두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마마께서 대장공주마마를 생각하시어 좀 더 지켜보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태후가 생각해보니 그도 맞는 말이었다.

    ‘됐다, 대장공주 체면이나 세워준 셈 쳐야지! 이 계집애가 능운진인을 따라다니며 제정신이 아닌 것들을 많이 배우더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보구나. 윗사람으로서 이런 어린것과 말씨름 벌일 필요가 없지.’

    “그래, 친척집 아이가 며칠 와 있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집에나 잘 데려다주면 될 일이지.”

    늙은 궁녀가 몸을 굽히며 웃었다.

    “마마께서 아주 너그러우십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태후는 여전히 그 말이 신경 쓰여 저녁이 될 때까지 지온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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