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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74)화 (274/385)
  • 274화. 꼭 쓰세요

    신비는 가마를 타지 않고 몇 명의 수행 궁녀만을 데리고 털레털레 궁을 나섰다. 마치 무심코 영수궁 근처를 걷다가 의도치 않게 미인들의 궁녀들을 보고 들어온 것처럼 행동을 꾸몄다. 

    “어머, 시끌벅적하네! 동생들이 이렇게 모여서 재밌게 노는데 어째 나는 안 부른 것이야?”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이 손에 든 패를 급히 놓고 일어나 인사를 했다. 

    “신비 언니.”

    “됐네, 어서들 예를 거두게.”

    신비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옥비의 얼굴에 떠오른 의심스러운 기색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좀 전에 본궁이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를 시키려고 나왔다가 동생들의 의가(*仪驾: 제왕, 관리들이 외출할 때 들고 다니는 깃발, 우산, 부채 등)를 보고 궁금해서 와보았더니 이렇게 떠들썩하지 뭔가! 자네들 내가 와서 싫은 건 아니겠지?”

    옥비가 황급히 웃으며 대답했다.

    “신비 언니, 무슨 말씀이세요. 언니는 귀빈이라 초청해도 못 모시는 분인데 감히 싫어하다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궁녀를 불렀다.

    “빨리 신비마마께 자리를 만들어 드려라.”

    신비는 비록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람 됨됨이가 선량했다. 처음에는 다들 좀 어색해했으나, 나중에는 다른 뜻 없이 정말 마작 구경에만 집중하고 때때로 훈수를 두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에 분위기가 금방 좋아졌다.

    “펑(*碰: 마작용어, 남이 버린 패를 가져올 때 씀)!” 

    고 미인이 빙그레 웃으며 패를 낸 옥비에게 말했다.

    “옥비 언니, 죄송해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아직 패를 가져가기도 전에 류명주가 먼저 손을 썼다.

    “아유, 고 동생 급하게 하지 마! 그 패는 내가 딱 필요한 거라, 미안하지만 내가 이겼어!”

    그렇게 말하며 류명주는 자신의 패를 탁자 위에 펼쳐놓았는데 정말로 이긴 패였다. 

    고 미인이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류 언니가 또 제 승리를 가로챘네요, 저 다시는 언니 다음 차례에 안 앉을 거예요.” 

    류명주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우리 자리를 바꿀까?”

    고 미인의 마음이 움직였다. 

    옥비가 웃으며 말했다. 

    “고 동생 바꾸지 말게! 류 동생이 마작을 훨씬 잘하니 자네 다음 차례로 앉으면 자네 패를 계속 먹어서 더 답답해질 게야.”

    고 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겠네요.”

    이렇게 이런저런 말을 하며 옥비는 손을 뻗어 밤떡을 하나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기분 상해하지 말고 떡 한 조각 먹고 기분 풀게. 고작 은자 몇 냥일 뿐이잖나? 오늘은 자네가 처음 놀러 왔으니 주인인 내가 자네 대신 내겠네. 그럼 어떤가?”

    고 미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다면야…… 옥비 언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밤떡을 집어 들었는데 코끝에 갑자기 진한 향기가 훅 밀려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건 무슨 향기예요? 너무 향기롭네요!”

    그리고는 고 미인은 고개를 숙여 밤떡 냄새를 맡았다.

    “아니, 여기서 나는 향기가 아니네요. 옥비 언니, 언니 손에 바른 항고(*香膏: 향이 나는 로션, 크림)에서 나는 향기인가요?”

    옥비가 손을 내밀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향고를 발랐긴 하네. 맡아보게, 이 향인가?”

    고 미인이 다가가 맡아보니 정말 그 냄새였다. 

    그녀가 칭찬하며 말했다. 

    “향이 정말 좋네요, 향이 좋으면서도 너무 강하지도 않고 달콤해요. 옥비 언니, 이 향고는 상복국에서 만든 건가요? 저는 왜 못 본 것 같죠?”

    옥비가 빙그레 웃었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것이네. 동생이 좋다면 하나 가져가게.”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금벽아!”

    “예.”

    “가서 향환을 가져오거라.”

    “예.”

    향환 한 상자가 빠르게 탁자 위에 놓였다.

    옥비는 그것을 꺼내 그녀들에게 자세히 보여주었다. 

    “이 향환은 향고에 섞을 수도 있고, 옷에 향을 입힐 수도 있고, 수면에도 도움을 준다네.”

    몇몇 미인들은 향을 맡자마자 희귀한 향료를 많이 썼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들은 품계가 높지 않아, 좋은 물건의 경우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나누면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향환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만지작거렸다. 

    류명주가 웃으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손에 향환 하나가 덥석 쥐어졌다. 

    “류 동생도 한번 써보게, 폐하께서 좋아하실 테지!”

    옥비의 이 한 마디에 몇몇 미인들의 마음이 더욱 요동쳤다. 

    옥비는 궁녀에게 작은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비빈들에게 주고 각자 나누어 가져가게 했다. 

    신비는 옆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누군가 불렀다.

    “다들 가져가는데 신비 언니도 한 상자 가져가시겠어요?”

    신비가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너무 면목이 없지 않나? 우리가 다 가져가면 옥비 동생은 뭘 쓰겠어?”

    “향환 조금일 뿐인데요. 시녀들에게 좀 더 만들라고 하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옥비는 조금 생각해본 뒤, 말했다.

    “금벽아, 황후마마께도 한 상자 보내 드려라.”

    황후에게도 보내는 것을 더는 거절하기 어려워진 신비는 궁녀에게 받으라고 지시했다. 

    * * *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더 놀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돼서야 돌아갔다. 

    류명주는 영수궁을 나와 미인들과 인사를 한 후, 신비가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을 본 후에야 자기도 돌아갔다. 

    “향설아.”

    “예 마마.”

    “신비가 갑자기 왜 왔을까?”

    향설은 생각하면서 답변했다.

    “아마 그냥 지나는 길에 들른 게 아니겠습니까? 특별한 일도 없었고요.”

    류명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신비는 옥비를 무시하거든. 아무 일도 없는데 영수궁에 갈 리가 없어.”

    “그, 그렇습니까?”

    ‘향설이는 물정에 밝지 않은 아이라 눈치를 못 챘구나!’

    류명주는 자기가 잘못 보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장락지에서 웃음을 팔던 날들 덕분에 그녀는 일반인들보다 더 날카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신비는 겉으로는 누구든 똑같이 대하는 것 같았지만, 옥비가 말을 할 때는 유독 대답을 잘하지 않았다. 

    “마마, 이 향환은 어찌할까요?”

    “일단 놔둬라.”

    ‘이 궁 안에서, 남이 준 물건을 어찌 함부로 사용할 수 있겠어? 폐하께서 좋아하신다는 말 한마디로 나를 낚으려고?’ 

    * * *

    벽옥헌으로 돌아오자 향설은 상자를 치워두고 더는 관리하지 않았다. 

    * * *

    이틀 후.

    여러 비빈들이 화춘궁에 문안을 갔을 때, 황제는 사람들 앞에서 옥비가 새로 만든 향환을 칭찬했다. 여러 미인이 써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을 보고 류명주는 덩달아 웃기만 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향설에게 말했다. 

    “그 향환에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을 게야.”

    향설은 이해하지 못했다.

    “마마,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옥비마마께서도 쓰던 향환이 아니었습니까?”

    류명주가 말했다.

    “엊그제 선물로 준 것은 일시적인 여흥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폐하 앞에서 칭찬을 받기 위해 분명히 엄청 힘을 썼을 거다. 어찌 의도한 바가 없겠어?”

    향설이 그런 사고의 흐름을 따라 생각해보더니 매우 감탄했다.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향환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류명주도 이 부분이 곤혹스러웠다.

    향환은 독을 넣기 가장 쉬운 물건이긴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나눠 가졌는데 사고가 나면 옥비가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황후라 해도 감히 그런 짓은 못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피임…….”

    류명주가 중얼거렸다. 

    이런 방법을 써야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터였다. 

    황제는 지금까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낳지 못하는 것이 정상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말이 안 돼! 태의가 정기적으로 평안맥(平安脉)을 진맥하러 오는데 이렇게 광범위하게 독을 쓰다니, 들키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 것일까? 게다가 옥비 자신도 쓰고 있지 않은가!’

    류명주는 정말 헷갈렸다. 

    * * *

    지온은 류명주가 보낸 향환을 받아 루안에게 가져다주었다. 

    “어떤 재료가 들었는지 좀 확인해봐요.”

    루안이 같은 것들을 비교한 다음, 상자 안에 있는 몇 가지 약재를 가리켰다. 

    “이것들을 더 넣었소.”

    지온은 웃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내가 그녀를 정말 만만하게 보았나 보네요. 그 조향법을 나한테만 줬으면 됐지, 감히 궁 안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쓰다니 말이에요. 대체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오는 건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하는 걸까요?” 

    “당신이 만들어준 배짱이지 않소.”

    루안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쨌든 당신의 조향법이니까.”

    지온이 한숨을 쉬고는 함옥을 불러 명했다. 

    “며칠 전에 만들라고 했던 향환은 어디 있어요? 다 가져와 주세요.”

    “네, 사저.”

    함옥이 대답했다. 

    지온은 두 종류의 향환을 가지고 관찰하면서 냄새를 비교해보고, 함옥이 만든 것을 류명주의 것과 바꿔서 한등에게 건네주었다. 

    “궁으로 가져가서 류 첩여께 꼭 쓰시라고 하게.”

    한등이 소리 내어 대답했다. 

    * * *

    그날 밤, 류명주는 이 향환 상자를 받았다. 

    그녀는 재차 확인했다. 

    “그쪽에서, 꼭 쓰라고 했다고?”

    “예.”

    그 젊은 공공이 대답했다. 

    “마마께서는 잊지 말고 꼭 이 향환을 쓰셔야 합니다. 다른 데서 보내온 것이 있으면 절대 사용하시면 안됩니다.”

    류명주는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향환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고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거, 바뀐 거로구나? 그렇다면 원래 향환에 정말로 문제가 있었다는 거 아니야?’

    그녀가 물었다.

    “본궁이 이 일을 폭로할 필요가 없을까?”

    젊은 공공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그쪽에서 마마께선 이런 사소한 일로 다른 사람의 질투심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일이 진전되길 조용히 기다렸다가 물꼬가 트이면 그 흐름을 타시면 된다고 합니다.”

    류명주가 웃었다.

    “본궁을 대신해서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전해주게.”

    * * *

    화춘궁.

    궁녀 한 명이 상자를 들고 와 기뻐하며 물었다. 

    “마마, 오늘 밤에 이 향환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오신다고 하셨사옵니다.”

    황후가 상자를 한 번 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 좋으면 너에게 상으로 주마.”

    궁녀는 몹시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쇤네가 다른 마음을 품었던 것은 아니옵니다. 마마 용서해주십시오.”

    황후는 어리둥절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왜 무릎을 꿇고 그러느냐? 본궁이 너를 꾸짖으려 한 것도 아닌데.”

    궁녀는 멍해졌다. 

    ‘꾸짖는 게 아니라고? 그럼, 말 그대로란 말이야? 오늘 폐하께서 이 향이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마마께선 왜 안 쓴다고 하시는 걸까?’

    황후 곁에 있던 궁녀가 나서서 나무라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육궁의 주인이신데 이런 물건으로 폐하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겠느냐? 비빈 무리와 총애나 다투면서 품위를 떨어뜨려선 안 되는 것이다. 어서 일어나거라!”

    궁녀는 그제야 깨닫고 공손히 일어났다. 

    * * *

    한편, 이와 같은 장면이 장복궁에서도 벌어졌다. 

    다른 점은 신비는 그 향환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손에 들고 가지고 놀았다는 점이다. 

    “옥비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얼마 전에는 머리띠를 보내질 않나 보온 토시를 보내질 않나 여기저기에 자잘한 물건들을 보내더니만 이제는 또 향환을 보내고 말이야. 그렇게 고고하신 분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향을 어찌 쓰겠어?”

    심복 궁녀가 말했다. 

    “마마, 아직 그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옥비마마께서 요즘 심상치 않은 일을 많이 벌이는데 마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부러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신비가 하하 웃었다. 

    “환심을 산다고? 그래서 뭐 하려고? 요즘 옥비는 하루하루가 힘들 텐데, 폐하를 붙잡아 놓을 수단이 있으면 자기가 얼른 써버리고 말지, 그걸 남에게 나눠주겠느냐?”

    궁녀는 신비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마, 옥비마마께서 총애를 회복했는데 왜 하루하루가 힘들겠습니까?”

    “그래, 확실히 총애를 회복하긴 했어, 하지만 다른 비빈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이 궁에서 그녀의 기반은 그녀가 아주 특별하다는 데에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해. 더는 특별할 것이 없다면, 그건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뜻이지. 이런 불안감 때문에 옥비는 폐하를 단단히 붙잡으려 할 테고.”

    신비는 향환을 상자 안으로 던져 넣으며 말했다.

    “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께 편지를 전해드리고 이 향환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보아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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