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73)화 (273/385)
  • 273화. 신봉의 수양

    “주지! 어쩐 일이십니까?”

    청옥은 궁전의 잡무를 처리하고 밥을 먹으러 가려던 차에 능양진인이 들어오고 싶은데 못 들어오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청옥이 묻자, 그녀에게 들킨 능양진인은 바로 근엄한 척을 했다.

    “청옥이구나! 바쁜가?”

    “아닙니다. 잡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대답한 청옥이 물었다.

    “주지께서는 대사저를 찾으러 오셨습니까?”

    “어,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자네들도 좀 보고……그래, 사질도 있으면 겸사겸사 보면 좋고 말이지.”

    능양진인은 고인(高人)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에서 지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능양 사숙이십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이 있어 직접 마중을 못 나가니 용서해주십시오.”

    ‘이 아가씨야! 누가 감히 너더러 친히 마중을 나오라고 하겠느냐!’

    능양진인은 웃음을 짜내기 바빴다. 

    “사질,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러는가? 내가 그냥 가면 되지, 내가 가면 되네.”

    청옥은 방금까지만 해도 허세를 부리던 능양진인이 바로 얼굴에 아첨하는 웃음을 띠며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능양은 문턱을 넘다가 하마터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청옥은 자기 눈이 잘못된 줄 알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옆에 있는 함옥에게 물었다. 

    “방금 저 사람 주지 맞지? 다른 사람이 사칭하는 거 아니지?”

    함옥이 말했다. 

    “누가 사칭하겠어? 저 면상은 평생 가도 못 잊게 생겼구먼!”

    예전에 능양진인에게 얼마나 처참하게 괴롭힘을 당했던지! 지금은 다행히 대사저가 있어 능양진인이 저리 돌변해 아첨을 떠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세상사 다 돌고 돈다고 하는 것이지!’

    “사저,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후에 할 일이 많아.”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대사저가 분부할 게 있을지도 몰라.”

    청옥은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보았다. 

    “분부가 없더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이 못 들어가게 문 앞을 지켜야 해.”

    * * *

    한편 능양진인이 후전(后殿)으로 들어가자 지온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향료를 빻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녀들은 오히려 옆에서 보고 있다가 때때로 거들기만 했다. 

    ‘이 계집애는 신분을 잊었나! 왜 자기가 이런 막일을 하는 거야? 나였으면…….’

    “서아야, 사숙께 차를 올려라.”

    “예.”

    지온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뜻밖에도 지온을 모시는 여종이 자신을 향해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부라렸다. 여종은 차를 따라서 자신의 앞에 놓았는데 찻물이 다 튀어나왔다. 정말 버릇이 없었다. 

    능양진인이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서아를 칭찬했다. 

    “차가 진하면서도 떫지 않으니 우리 제자들보다 훨씬 낫구나.”

    서아가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것은 어젯밤에 끓인 차로, 손을 씻기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좋은 차를 이 늙은이에게 주는 것이 아까워 하룻밤 지난 차를 가져다가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맛있다니 원래 능양지주의 입맛이 이상한 건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온이 마침내 향료를 다 빻고는 토시를 벗고 손을 씻으며 분부했다. 

    “너희들은 나가 있어. 나는 사숙과 잠시 이야기 좀 할게.”

    “예.”

    지온은 일을 끝내고 앉아 차를 천천히 마시고 나서 물었다. 

    “사숙께서 일부러 저를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결과가 나왔습니까?”

    능양진인은 지온의 손에 들려있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꽃차의 향기가 코를 찌르자 입에 침이 고였다. 

    “사질의 말대로 한 번 물리고 난 다음에 처방전을 옥비마마께 가져다드렸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질, 처방전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거야?”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없지요.”

    “어?”

    능양진인이 눈을 깜빡였다. 

    지온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렇게 많은 태의도 하지 못하는 일을 제가 어찌 처방전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신통하면, 제가 굳이 대장공주마마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명의라는 간판 하나 걸어놓으면 사람들이 자연히 와서 받들 텐데요.”

    ‘그렇긴 하지.’

    능양진인이 잠시 생각해보고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너, 너…… 그럼 거짓말을 한 것이냐?”

    지온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사숙,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신봉(*神棍: 무당)일이란 것이, 사람을 속이지 않고 하는 것이 어디 있다고요? 이건 사숙께서도 아주 익숙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 하지만, 나는 속일 수 있어도 감히 상전을 속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분은 궁에 계신 마마님이란 말이다! 잘못 연루되면 머리가 땅에 떨어질 터인데!’

    능양진인의 말 한 마디에 지온은 기대에 못 미쳐 실망스럽다는 눈빛으로 능양진인을 보며 타이르듯이 가르쳐 주었다. 

    “사숙, 이게 바로 사숙께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보세요. 저희 사부께서 돌아가시고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는데 어째서 아직도 조방궁의 고인을 거론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이름이 저희 사부일까요? 

    신봉(*神棍: 무당)이 되셨으면, 대담하게 속이셔야 합니다. 바깥의 백성을 속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속여야 한다면 큰 것을 속여야지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속이세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도 그건 다른 사람의 잘못이지 사숙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그런 것인가?’

    능양진인은 자신의 인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사저가 자신보다 타고난 도술이 높다고 생각했었다. 관상, 점치기, 점성……. 무엇이든 사저는 금방 깨우쳤고 말하는 것도 이치에 맞아 다른 사람들이 한번 들으면 모두 믿었다. 하지만 자신은 타고난 재능이 부족해 속임수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저의 제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설마 속은 사람이 나였던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정말로 사저보다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죽은 사저는 신도들을 속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매인 자신마저 이렇게 오랫동안 속이지 않았는가!

    지온이 화제를 돌렸다.

    “옥비가 사숙을 의심하던가요?”

    “아니다. 우리 문파의 시조께서 모은 고서에서 처방을 찾았다고 했는데, 한마디도 더 물어보지 않았어.”

    지온이 칭찬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일은 사숙께 맡기는 게 옳았던 것 같습니다. 사숙만이 옥비의 신임을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요.”

    능양진인이 그 말을 듣고 자랑스러운 듯이 가슴을 폈다. 

    ‘그럼! 내 공력이 사저보다 못 한데도 내가 경성 전체를 속인 셈 아닌가?’

    생각하다가 그녀가 또 물었다. 

    “사질, 그 약을 먹으면 해로운 건 아니겠지? 폐하에게 드릴 것인데 만약…….”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사숙을 해치는 것이 저한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조방궁에까지 해가 미칠 텐데요? 그 처방은 확실히 남자의 양기를 보양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보양을 돕는 것일 뿐이어서 그렇지요.”

    지온이 흘끗 쳐다보았다.

    “일단 일이 생기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사숙께서 알고 계시지요?”

    능양진인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그녀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능양진인이 또 물었다. 

    “그럼 다음엔 내가 뭘 하면 되는가?”

    “아무것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온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할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능양진인은 한숨을 돌렸다. 

    그럼 다행이었다. 능양진인은 자신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것이 자신을 옭아맬까 봐 두려웠다. 그때가 되면 아는 비밀이 너무 많아 죄가 없어도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다. 

    능양진인이 떠나려고 할 때, 지온은 서아에게 꽃을 말려 만든 차를 한 봉지 가져오라고 명했다. 

    “사숙께서 좋으시면 가져가서 타드십시오. 계속 쳐다보시는 통에 민망했습니다.” 

    * * *

    신비는 겨울철에는 얻기 힘든 신선한 과일을 먹으며 심복인 한 궁녀의 보고를 들었다. 

    “옥비마마는 일찍 일어나 어화원에서 아침 운동을 하고, 궁으로 돌아가서 글씨를 연습하셨습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는 류 첩여와 몇 명의 미인들과 마작을 하셨는데, 지금까지 은자 세 냥을 잃으셨고…….” 

    신비는 과일의 씨를 뱉더니 물었다. 

    “그게 다인가?”

    “이게 다입니다.”

    “너무 정상적이잖아? 아니지, 그게 옥비라면 이거야말로 진짜 비정상인 거지.” 

    신비는 아주 의심스러웠다. 

    “사람들과 마작 약속을 잡다니, 그 성격에 마작도 하나? 시 짓는 모임을 하면 모를까.”

    상급 궁녀가 웃으며 말했다. 

    “마마. 쇤네가 불경하게도 한 말씀 올리자면, 옥비가 입궁하기 전에 사람들이 그녀가 아주 뛰어난 재녀라고 했습니다. 만약 여인이 아니었다면 옥씨 가문에서 다시 제사(*帝师: 제왕의 스승)를 배출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입궁한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옥비가 어떤 시를 짓거나 읊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쇤네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나서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비가 하하 하고 웃었다. 

    “나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긴 하지. 그래도 정말 총명함을 숨긴 사람이라면 말이야, 폐하와 매일 함께 지냈는데 폐하께 어떤 문학적인 기운이 조금이라도 느껴져야 하지 않겠나? 내가 보기에 폐하는 이삼 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것이 없네.”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너무 명확해서 나이든 궁녀는 주의를 시키듯이 말했다.

    “마마! 문을 닫고 계셔도 이런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듣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본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자네가 생각이 너무 많은 게지.”

    신비는 떡 한 덩이를 다시 집고 즐겁게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집오기 전에 본가에서 형제들을 따라 글을 읽고 글자를 익혔다. 재능이 많지는 않았지만, 학문적인 소양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신비는 가문의 뒷배로 왕비로 간택되어 선제의 양자였던 의안왕에게 시집을 왔다. 처음에는 황제가 옥형 선생께 배웠다기에 틀림없이 문학적인 재능이 범상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야 비로소 자기가 착각했음을 알았다. 

    ‘간혹 폐하께서 장주를 가져와 읽는 모습을 보면, 그 수준이 나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됐다 됐어. 식견도 없는 일개 후궁이 말해서 뭘 하겠어?’

    떡을 다 먹고, 신비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영수궁의 마작은 아직 안 끝났겠지? 우리 구경하러 가볼까?”

    상급 궁녀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마마. 밖에 나가서 움직이는 것은 좋은 일이오나, 옥비마마를 뵙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옥비가 나를 해칠 수나 있겠느냐?”

    신비는 손을 내저었다. 

    “가자,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왔는데 본궁이 즐거운 자리에 빠지면 안 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