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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72)화 (272/385)
  • 272화. 신비의 궁금증

    두 사람은 눈 쌓인 좁은 골목의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루안이 말했다.

    “내가 무애해각에 있을 때, 당신들은 겨우 12~3세였소. 당신은 이미 경의(经义)를 다 배우고 매일 각종 고금의 저서를 읽었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승님께 달라붙어 끝까지 물어보고 말이오. 그때도 금벽은 당신과 함께 공부했었지만, 오경조차 다 외우지 못했소. 당신과 스승님이 토론할 때 전혀 끼지도 못하고 말이오.”

    그건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흥미가 없었기 때문 아닐까요? 매일 숙제하는 걸 보면 끝까지 미뤄놨다가 마지막에 하는 것 같더라고요, 마치…….”

    “마치 폐하처럼 말이오.”

    루안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 둘은 정말 천생연분이오.”

    지온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루안이 이어서 말했다. 

    “언젠가 칠석날 우리가 함께 나가 등불을 봤던 걸 기억하오? 그때, 금벽이 미인등을 아주 좋아했었는데,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지. 당신이 그 노점의 등불 수수께끼를 전부 맞추고 그 등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고. 다음날 등이 없어지고 나서 금벽이 당신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오?”

    지온이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실수로 넘어져서 타버렸다고 했던 것 같아요. 아쉬워하는 것 같길래 제가 재료를 사 오라고 해서 몇 개 만들어 줬어요.”

    “내가 그날 저녁 늦게 돌아오는 길에 연못가에 금벽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등은 사실 금벽이 일부러 태운 거요.”

    루안이 눈을 내리깔고 지온 바라보았다.

    “금벽은 그 후로 더는 당신과 함께 공부하지 않았을 거요. 그렇지 않소?” 

    * * *

    화춘궁에서 한 무리의 비빈들이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이 오래된 일상복들을 기부해야겠어요.” 

    “그럼 저는 천을 좀 기부할까요?”

    “아이고, 자네들은 다 미리 계획했었구먼! 나는 하필 지금 새 옷을 만드는 바람에 남는 천이 없네.”

    “옥비 언니는 뭘 기부하실 건가요?”

    지위가 낮은 비빈 몇 명이 옥비를 쳐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옥비와 함께 웃고 떠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요즈음 옥비와 만나보고 나서야 옥비가 사실 아주 붙임성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때로 옥비는 그들에게 급히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옥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얼마 전에 새 옷을 만드는 바람에 돈을 기부할 수밖에 없겠어.”

    그렇게 말하며 옥비는 고개를 돌리고 황후에게 물었다.

    “마마, 이번 한 번만 요령을 부릴 테니 눈감아 주십시오.”

    황후가 미소 지었다.

    “기부는 돈으로 하는 것이 제일 좋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살 수 있으니 말이야. 옥비가 이번에는 제대로 요령을 부렸구먼.”

    온 방 안에 비빈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뒤질세라 앞다투어 동참했다.

    “그럼 저도 돈을 기부하겠습니다.”

    “저는 안 쓰는 장신구들을 기부하겠습니다, 돈으로 바꿀 수 있을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이 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황후가 고개를 돌렸다.

    “신비 동생?”

    손난로를 품에 안고 멍하게 있던 신비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대세를 따라 돈을 기부하겠습니다.”

    말하는 도중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폐하 납시오!”

    방에 있던 모든 여인들은 즉시 일어나 화장을 정리했고, 곧 그녀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황제는 안으로 들어오며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미인이 모여 있는 데다 보석까지 많으니 눈이 멀 것만 같구나.’ 

    “지금 뭐 하는 건가?”

    그는 탁자에 쌓여있는 금은 장신구를 가리켰다.

    황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도성 내에 이재민이 있다고 하여, 비빈들이 재물을 모아 기부하려는 것이옵니다.”

    황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거참 좋은 생각이구려, 비빈들의 선량한 마음씨에 감사하오.”

    황제가 호은을 불렀다.

    “나중에 안제방(*安济坊: 송나라 때 병자와 빈자를 구명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으로 보내 백성들이 비빈들의 은혜를 느낄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서 황제는 그녀들이 각자 무엇을 기부했는지 물었다.

    비빈들이 앞다투어 한 명씩 대답했다.

    옥비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자진하여 말했다.

    “신첩은 신경 쓰기 귀찮아서 돈을 기부했습니다.” 

    황제가 하하 웃으며 그녀를 가리켰다.

    “얼마 전까지 온갖 술수들을 다 생각해내기에 짐은 비가 또 무슨 놀라운 것을 생각해냈을까 기대하였더니 게으름을 피울 줄은 생각도 못 했구려.”

    옥비는 웃고 있다가 투정 부리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신첩에게 무슨 술수가 있사옵니까? 그저 평소에 쓰는 작은 장난감 같은 것들인데 폐하께서 보시고 놀리셨지 않습니까.”

    “그래, 알겠소, 안 놀리겠소. 비가 애 많이 썼소.”

    뒤이어 황제는 류명주에게 물었다.

    신비는 손난로를 든 채 냉정한 눈빛으로 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옥비의 생각이 바뀐 것이야 별일도 아니지. 그런데 어째서 폐하께서도 다른 사람처럼 바뀌신 걸까?’

    전에는 이런 자리에 옥비가 어쩔 수 없이 참석하면, 황제도 그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만 볼 뿐 옥비에게 상처를 줄까 염려하여 말을 아꼈다. 

    그런데 지금은 옥비에게 다정한 것은 물론이고 다른 비빈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대했다. 

    ‘이상하네, 이 두 사람 정말 이상해.’

    신비는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 * *

    일이 끝나고 그녀들은 황제와 함께 나왔다. 

    황제는 요즘 후궁에 있는 시간을 아주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있었다. 

    옥비와 류명주가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고, 영수궁과 벽옥헌에 머무르는 시간이 제일 길었다. 

    다른 미인과 재인들도 임행(*临幸: 황제와 비빈의 동침)을 택해 챙기고 신비도 냉대하지 않았다. 

    황후 쪽에는 고정으로 동침하는 날 이외에도 자주 가서 대화했다. 

    이렇게 은혜를 고루 나누어주며 그는 점점 더 황제다워지고 있었다. 

    신비가 나왔을 때, 황제와 옥비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비의 손이 너무 차갑구려. 얼른 돌아가서 뭘 좀 덮으시오. 요즘 몸도 안 좋은데 더는 아프면 아니 되오.”

    옥비가 웃으며 말했다. 

    “신첩이 어디가 연약하다고 그러시옵니까? 그날 열이 난 것은 찬물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옵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큰 병이 났을 터인데, 신첩이니 며칠 만에 좋아진 것이옵니다. 신첩이 그만큼이나 튼튼하옵니다.”

    황제가 하하 웃었다.

    “그렇다면 무척 다행이로군.” 

    이 대화를 듣고 신비는 황제가 옥비와 영수궁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황제는 류명주를 데리고 갔다. 

    신비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줄곧 궁 안의 유일한 비빈인 것 같았던 옥비가 정말 총애를 잃은 건가?’ 

    “신비 언니.”

    옥비가 그녀를 보며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신비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동생은 지금 돌아가는가?”

    “돌아가야지요!”

    옥비가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 글씨도 쓸 수 없으니, 돌아가면 이불 속에 들어가 게으름이나 피우렵니다.”

    신비는 하하 웃으며 그녀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가마에 올라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비는 내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 궁문이 보이자 그녀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제대로 알아봐야겠어.”

    곁에서 수행하는 궁녀가 깜짝 놀랐다. 

    “마마?”

    * * *

    신비는 궁으로 돌아와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았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에 궁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마, 왜 이러십니까?”

    “쉿! 조용히 해라.”

    신비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영수궁에 우리 사람이 있느냐?”

    수행 궁녀는 신비가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줄 알고 기뻐했다.

    “네, 있습니다. 마마께서 드디어 총애를 다투는 일에 관심을 두시기로 하신 겁니까?”

    신비가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무슨 총애를 다투느냐? 본궁이 그렇게 답답한 사람인 줄 아느냐? 가서 그런 사람들한테 옥비나 잘 감시하라고 하거라.” 

    “마마?”

    궁녀는 그녀 때문에 헷갈렸다. 총애를 다툴 것이 아니라면 왜 옥비를 주시하는 것일까?

    신비는 잠시 생각해본 후 다시 말했다. 

    “참, 옥비가 요즘 류 첩여와 자주 왕래한다지?”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께서 자주 불러서 두 분이 같이 폐하를 수행한다고 들었습니다.”

    “틀림없어, 분명히 뭔가 이상해!”

    신비가 말했다. 

    “벽옥헌 쪽도 조심하거라. 본궁은 옥비같은 사람이 폐하의 총애를 나누는 것을 용인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 * *

    옥비가 가마에서 내리자, 금벽이 맞이하러 왔다. 

    “마마, 능양주지가 와 있습니다.”

    옥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실로 들어갔다. 

    능양진인은 이미 거기에 앉아있었는데, 그녀를 보자 황급히 일어섰다.

    “빈도, 마마를 뵈옵니다.”

    옥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앉게.”

    “감사합니다, 마마.”

    두 사람이 부들방석 위에 앉자, 두 사람의 거리가 채 한 자(一尺)도 되지 않았다. 

    “주지, 생각은 잘 해보았는가? 

    옥비가 뜨거운 차를 들고 담담하게 물었다. 

    능양진인의 얼굴이 두어 번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니 몹시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구 쪽을 보고 나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마, 생각해보신 적이 있사옵니까?”

    옥비가 눈썹을 추켜 올렸다.

    “응?”

    “영종황제부터 3대에 걸친 궁의 주인 모두 자손을 얻기가 아주 힘드셨사옵니다.”

    옥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인가?”

    능양진인은 그녀의 매서운 시선을 감히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빈도의 뜻은, 비빈들에게는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옵니다.”

    옥비가 멈칫하며, 전에 현비가 가졌던 그 아이를 떠올렸다.

    “그래서?”

    능양진인이 조심스럽게 낡은 처방전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은 빈도의 문파 시조께서 수집한 고서에서 찾은 것 이온데, 남자의 원기 보양에 도움이 되는 처방이옵니다.”

    옥비가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의 옥체가 귀중하시어 이렇게 출처가 불분명한 것은 드실 수 없네.”

    능양진인이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서 이 처방전을 가져가 태의에게 보이시고 폐하께 드려 복용하게 하시면 되옵니다.”

    옥비는 잠시 침묵한 뒤 처방전을 가져갔다.

    능양진인이 한숨을 내쉬고 물러가겠다고 고했다.

    “빈도는 이만 돌아가 보겠사옵니다.”

    그러나 옥비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금벽이 들어오자 옥비는 결단을 내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가서 며칠 전의 그 처방전으로 향환을 좀 만들어오거라.”

    * * *

    능양진인은 사방전 밖에서 기웃거렸다.

    사방전을 빼앗긴 후부터 그녀는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길을 돌아서 다녔다. 

    그 이후, 오늘이 그녀가 사방전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날이었다. 

    ‘전이랑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사방전을 관리할 때에는 신상(神像)을 매월 닦고 반년에 한 번씩은 수리해서 항상 깨끗하고 반짝반짝 빛나게 유지했다.

    다시 보니, 그 계집애의 손에 들어간 지 반년이 넘었는데 전혀 수리한 것 같지 않았다. 제사상에 금발은잔(金钵银盏)도 하나 올라가 있지 않았다. 

    ‘사방전에서 그렇게 많은 향불 값을 벌었는데, 어째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거지? 나였으면, 진즉에 신상에 금칠을 한 번 더 했을 텐데! 신도들은 겉치레를 좋아해서 더 빛나게 꾸밀수록 더 쉽게 속일 수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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