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71)화 (271/385)

271화. 그녀는 바로 그런 사람이지

“계속하시게.”

“예.”

두 사람은 정실로 옮겨가 부들방석(*蒲团: 스님이 깔고 앉는 방석)에 앉아 천천히 경전을 읽었다.

능양진인은 입이 바짝 마르도록 말을 하면서 잠시 자신의 추측이 틀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옥비는 그냥 경전을 강의하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면 왜 아직 아무 말도 없지?’

한 단락의 강의가 끝나자, 금벽이 능양진인의 벗겨진 입술을 보고 찻물을 한잔 따라주었다.

“주지께서는 목을 좀 축이십시오!” 

능양진인은 받고 싶었지만, 그 꽃 화분만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금벽 낭자, 고맙습니다만 빈도는 목이 안 마릅니다.”

금벽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옥비가 웃으며 분부했다.

“좀 춥구나. 금벽아, 가서 내 보온 토시를 가져오너라.”

“예.”

금벽이 문을 나서자 옥비가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주지,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혹시 본궁이 차에 독이라도 탔을까 봐 걱정되는가?” 

능양진인이 뺨에 경련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마마, 공연한 걱정이십니다.”

“본궁이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것이면 좋겠네만, 자네 좀 보게. 언제까지 이렇게 전전긍긍할 겐가?” 

능양진인은 헛웃음을 지었지만, 감히 말을 잇지는 못했다. 

옥비는 계속해서 말했다.

“주지는 총명한 사람이니 본궁도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겠네. 한동안 내 자네를 부르지 않았는데 혹여 싫증이나 버림받았을까 봐 두려웠는가?”

옥비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눈빛은 사무치도록 차가워 능양진인은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갑자기 방석 위에 엎드려 절을 했다. 

“마마, 마마께서 빈도에게 가르쳐주시옵소서.”

옥비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아주 쉽네, 예전으로 돌아가면 좋지 않겠는가? 안 그런가?”

예전? 전에 능양진인은 자주 궁정에 드나들었고, 귀부인들은 모두 능양을 우러러보았었다. 그녀는 비록 도고(*道姑: 여도사)였지만, 많은 호족의 존경을 받는 귀빈이었다. 

‘참으로 좋은 날들이었지.’

능양진인의 눈에 저절로 갈망하는 빛이 드러났다. 

“마마…….”

옥비는 아직 웃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면 안 될 것도 없지. 그런데 그럼 주지도 뭘 좀 내줘야 하지 않겠는가?”

능양진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빈도의 모든 것은 본래 마마의 것이 옵니다.”

“그런데 왜 전에는 임신을 돕는 비방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지?”

역시 이 일이었다. 능양진인은 가슴이 떨렸지만, 곧 지온의 말을 떠올렸다. 

살짝 열이 올랐던 가슴이 빠르게 식었다. 

‘그 계집애가 늘 나를 위협하긴 하지만, 어쨌든 내게 독을 먹이지는 않을 거야! 동요하면 안 돼, 동요하면 안 돼.’

사실 자신에게는 그런 물건이 없었지만, 그 사실을 옥비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마마, 조방궁에 그런 물건은 없사옵니다.”

능양진인이 재빨리 고개를 들어 옥비를 한번 보더니, 다시 몸을 숙이고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옥비는 오히려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럼 원씨 가문의 며느리는 어떻게 회임한 것인가?”

옥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지온 소저에게 미루려 하지 말게, 그 어린 계집이 뭘 안단 말인가?”

능양진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어린 계집이 지금 마마를 향해 칼을 갈고 있지요!’

그러나 그녀는 얼굴에 전혀 티를 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우연, 우연일 뿐이옵니다!”

옥비가 비웃었다. 

“아직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구나, 원씨 가문의 며느리가 3년 동안 수많은 명의를 만나고도 아이가 없었는데, 화신첨을 뽑고 난 후에 바로 회임하였지. 이것도 우연의 일치라는 한마디 말로 설명하려는 건가?”

능양진인이 지온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예. 향을 조금 쓰긴 했지만, 그것은 그저 마음을 편하게 하는 용도였지 회임을 돕는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마마, 믿어주십시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빈도가 벌써 마마께 바쳤을 것이옵니다. 숨길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그걸 누가 아느냐? 혹시 네가 이득이 적다고 생각해 기회를 봐서 다른 누군가에게 바치려고 했는지. 때가 되어 황자를 낳으면 그것이 다 너의 공이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냐?”

‘그렇긴 개뿔! 비빈에게 바치지 않아서 해를 입을 것이 두려웠다면 차라리 황제에게 바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누가 황자를 낳든 모두 나의 공이 되는 것인데!’

능양진인이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었다.

“빈, 빈도는…….”

옥비가 다시 위로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본궁이 황자를 회임할 수 있게만 도와주면 다른 사람이 주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본궁도 얼마든지 다 해줄 수 있다네.” 

능양진인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빈, 빈도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제가 돌아가서 좀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옥비가 웃음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시게나. 주지는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고 생각이 분명해지면 다시 본궁을 만나러 오게.” 

* * *

십일월 중순, 경성에 드디어 눈이 내렸다. 

온 하늘에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려 도성을 가득 채웠다.

눈이 그치자 평왕부와 강왕부 등 종실의 주도로 경성의 귀족 가문들이 옷과 죽을 기부하는 행사를 떠들썩하게 벌였다. 

조방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출가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밥을 빌어서 먹기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는 당연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조방궁에서는 신도들이 기증한 한 무더기의 헌 옷들을 골라내어 조방궁 앞에 진열해 놓았다. 그리고 일찌감치 지어진 죽을 나눠주는 천막에는 솥과 그릇들이 차려졌다.

대장공주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지온도 자연스레 따라와서 도왔다.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사람이 줄어들어, 다들 교대로 밥을 먹었다. 

지온은 대장공주를 모시고 천막에 앉았는데 앞에 차려진 것은 맑은 죽과 반찬 정도였다. 

대장공주가 몇 수저 뜨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올해는 추위에 떠는 이재민이 많구나!”

경성은 제국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곳이었다. 비록 빈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각종 복지가 비교적 잘되어 있어 극도로 가난한 빈민은 적었다. 

하지만 올해는 무료로 나눠주는 죽을 먹으러 오는 사람이 작년보다 확실히 많았다. 

“사람들 말투를 들어보니, 외지인이 많더군요.”

지온이 말을 이었다.

“올해 하서(河西) 지역이 흉작이라 유민이 많아진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대장공주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천재지변이 빈번하면, 변고가 생기기 쉽지!”

이때, 밖에서 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 대인, 어쩐 일이십니까?”

이어서 그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좀 둘러보러 왔다.”

지온은 몸을 돌려 루안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마 날씨가 추워서였는지 그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위로 희미한 홍조가 돋보여 현실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마.”

그는 대장공주를 향해 절을 했다. 

대장공주가 웃었다.

“관아의 일은 다 끝났는가?”

루안이 대답했다. 

“폐하의 명으로 눈이 온 뒤, 재해 상황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대장공주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제께서 기억을 다 하시다니 감사할 따름이군.”

공주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루안이 황제에게 일깨워 준 것임을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앉거라, 나는 가서 헌 옷들을 다 나눠주었는지 봐야겠다.”

“감사합니다, 마마.”

대장공주가 자리를 뜬 뒤, 지온이 나가서 뜨거운 차 한 잔을 가져왔다. 

“몸 좀 녹여요.”

루안은 그녀의 말대로 찻잔을 들고 손을 녹였다.

몇 마디 잡담을 나누고 나서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큰형님이 북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소.”

지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요? 누가 못 가게 하나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눈 때문에 길이 막혔소.”

지온이 그제야 미간에 힘을 풀고 물었다. 

“북양은 괜찮은 거죠?”

“괜찮소. 북양에는 삼촌이 몇 분 계시고, 둘째, 셋째 형님도 있으니 이제는 알아서 감당할 거요.”

루안은 몇 마디하고는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이어서 많은 이재민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심지어 그럴싸하게 차려입은 평민들조차 덩달아 뛰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두 사람이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가 보니 많은 사람이 수레 하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수레 옆에는 궁복 차림의 여자 몇 명이 서 있었고, 하급 관리가 질서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것을 좋아하는 함옥이 즉시 말했다.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잠시 후,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돌아온 함옥이 말했다.

“사저, 궁에 계신 마마 몇 분께서 수라간에서 간식을 만들어 보내셨대요.”

지온은 루안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하급 관리가 큰소리로 외쳤다.

“밀지 마세요, 밀지 마세요, 줄 서세요. 다른 사람들 받게 받았으면 얼른 가세요!”

간식을 받은 백성들은 아주 기뻐하며 천막 앞을 지나쳐갔다. 

“이게 궁의 간식인가? 진짜 예쁘네! 먹기 아까워.”

“황후마마께서는 정말 마음이 어질고 인심이 넉넉하신 분이야.”

“들어보니까 옥비마마께서 처방을 내려주셔서 만두소에 약재를 넣었대요. 먹으면 추위를 쫓을 수 있다고 하니 아마 동상 걸리는 사람들이 줄어들 거예요.”

“옥비마마께서 이렇게 자애로우시다니 분명히 복을 받으실 거야.”

이 소문은 매우 빨리 퍼졌다.

“옥비마마가 옥형 선생님의 손녀 맞지?”

“그래, 그래! 3년 전에 옥형 선생께서 화를 당하셨을 때 폐하가 마마를 거둬 궁으로 데려가시고 옥비로 봉하셨지.”

“내가 듣기로는, 옥비마마의 평판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던데…….”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좌우를 둘러본 뒤, 콧방귀를 흥하고 뀌면서 말했다.

“그거야 폐하께서 마마를 좋아하니 누군가 일부러 중상모략하는 것 아니겠나? 총애가 뭐라고 다들 그러는지…….”

“그러게 말이야, 옥비마마처럼 선량하고 재능도 있는 여인을 폐하가 안 좋아하시는 것이 더 이상할 일이지.”

간식들은 아주 빠르게 소진되었고, 궁인들은 관리의 호송을 받으며 궁으로 돌아갔다. 

* * *

지온은 대장공주에게 말하고 루안과 함께 돌아갔다. 

눈이 아직 녹지 않아 길에는 사람이 적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묵묵히 걸었고 지온이 말을 꺼냈다. 

“한 번의 좌절이 그녀의 야심을 깨우게 될 줄은 몰랐네요.” 

루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야심은 계속 마음속에 있었을 거요. 단지 전에는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옥종화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을 뿐이지.”

지온은 그저 웃었다.

‘옥종화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계속 뭔가를 한 건 나인데 말이야.’ 

지온…… 아니, 옥종화가 그런 지식을 어떻게 거저 얻을 수 있었겠는가?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들도 겨울에는 삼구(*三九 동지(冬至)로부터 세 번째의 9일간, 겨울의 가장 추운 때)에, 여름에는 삼복(三伏)에 훈련한다. 옥종화였던 시절, 그녀는 과거를 치를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부지런히 공부했었다. 

‘정말 외모만으로 의안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지온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에는 금벽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매일 공부하느라 바빠 그녀와 교류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온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듯 루안을 향해 물었다. 

“금벽이는 정말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요?”

루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말하는 '이런'은 뭘 의미하는 거요? 열등감, 질투, 탐욕? 그런 거라면 내가 대답해줄 수 있지. 맞소.”

지온이 의심스러워하며 말했다.

“어째 당신이 그녀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요?”

루안이 웃었다. 

“제삼자가 당사자보다 더 잘 안다는 말이 있소. 당신은 그녀와 함께 자라서 어떤 것들은 오히려 놓치고 있었지. 그녀가 왜 공부를 포기했다고 생각하오? 아무리 해도 당신보다 못했기 때문이지!”

지온은 멍해졌다.

“그런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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