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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70)화 (270/385)
  • 270화. 속이는 방법 가르치기

    조용하게 며칠이 지나갔지만, 궁에서는 계속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능양진인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 계집애가 한마디만 하면 정말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곳은 바로 황궁이다. 그 계집애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손을 쓸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일전의 불운들이 떠오르자 능양진인은 다시 고분고분해졌다.

    ‘글쎄, 그 계집애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는 애야.’

    “스승님!”

    이때, 능양진인의 제자가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

    능양진인이 일어나며 물었다.

    “궁에서 사람이 왔느냐?”

    제자가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능절 사숙이 오셔서 곧 큰 눈이 온다는데 저희도 올해 옷을 기부할 것인지 물어보셨습니다.”

    능양진인은 실망하여 다시 돌아가 앉아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기부해! 전에 했던 대로 하거라.” 

    “예.”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 차를 한 주전자 끓였다.

    “이렇게 기다려서 언제 끝난다는 말이야?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말도 안 해주고 그냥 기다리라고만 했잖아. 설마 끝도 없이 기다리란 말인가? 화를 입을까 봐 궁에 발걸음도 못 하고 요 며칠 귀인들의 초청도 다 거절했는데…….”

    차가 다 끓어 그녀가 일어나서 막 차를 따르려는 순간, 밖에서 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스승님!”

    능양진인은 화가 나서 불쾌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왜 자꾸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이야? 또 무슨 별것 아닌 일로 그러느냐? 빨리 말하고 가거라!”

    제자는 그녀가 화를 내자 깜짝 놀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게 아닙니다. 궁에서 사람이 와서 입궁하시라고 합니다!”

    ‘뭐라고? 정말 때가 된 건가?’

    능양진인이 막 끓은 물이 든 주전자를 한 손에 들고 펄쩍 뛰는 바람에, 뜨거운 물이 그녀의 다른 손등에 쏟아졌다. 그녀는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얼른 주전자를 던져 버렸다. 

    “사부!”

    제자는 놀라서 얼어붙었다.

    능양진인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멍하니 뭐 하는 거야? 가서 찬물을 가져와!”

    “예! 예!”

    제자가 급하게 찬물을 가져와 한바탕 정신없이 응급처치를 했다. 즉시 치료한 덕분에 손등이 데어서 빨갛게 변하긴 했지만, 물집은 생기지 않았다.

    * * *

    능양진인은 엉망이 된 바닥을 제대로 청소할 겨를도 없이 대충 정리하고 궁에서 온 사자를 만나러 갔다.

    공공은 그녀를 보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능양주지, 옥비마마께서 부르시니 궁에 들어가 경전을 강의해주십시오. 어서 정리하시고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옥비? 어째서 옥비란 말인가?’

    능양진인은 약 때문에 꽃잎이 다 떨어졌던 열두 개의 화분이 생각나 얼굴색이 변했다. 공공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능양진인이 말했다.

    “공공,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마의 눈을 더럽힐까 걱정되니 빈도는 옷을 좀 갈아입고 가야겠습니다.”

    공공은 그녀의 소매가 물에 젖어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능양주지 말이야. 밖에서는 문파의 고인(高人)으로서의 풍모가 보이더니만, 도관 안에서는 이렇게 신경을 안 쓰다니, 정말 못 알아보겠구나.’

    공공이 말했다.

    “옥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주지께서는 너무 오래 지체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공공.”

    능양진인은 소매를 더듬어 공공에게 은표를 한 장을 찔러주었다. 

    공공이 재빠르게 은표를 한 번 훑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바꿨다.

    “천천히 준비하시지요. 옥비마마께서 아침에 글씨를 쓰고 산책을 하셔야 하니 점심 즈음에 가면 될 듯합니다.”

    * * *

    능양진인은 다과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자신은 뒷문을 통해 사방전으로 급히 달려갔다.

    사방전에 도착하자 청옥이 지온은 난택산방에 갔다고 말했고, 그녀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능양진인이 난택산방에 도착하자 지온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사숙, 무슨 일이십니까? 이렇게 추운 날씨에 땀을 다 흘리시다니요!”

    “아니! 너무 급하게 와서 그렇네.”

    능양진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지온은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사숙, 우리 조방궁의 제자들이 아침부터 권법을 연마하는 것은 무예가 뛰어나길 바라서가 아니라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지가 되셨다고 사숙께서 훈련에 너무 소홀하셨던 건 아닙니까? 이 정도 걸었다고 헐떡이시다니요, 체력이 저보다도 훨씬 못하십니다.”

    능양진인은 감히 반박할 수 없어 웃으며 황급히 말했다.

    “궁, 궁에서 사람이 왔네.”

    “사숙을 부르려고 온 것입니까?”

    지온은 매우 침착했다. 

    “사숙, 그럼 가셔야지요!”

    능양진인은 초조했다.

    “옥비가 불렀단 말일세!”

    “옥비가 어때서요? 옥비가 싫으십니까?”

    “아니……!”

    능양진인이 입구 쪽을 쓱 보고 지온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지난번에 우리를 음해한 것이 아마도 옥비인 것 같은데, 이번에 또 나를 부르니 무서워서 그러지…….”

    지온이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옥비가 주는 독주(毒酒)를 마시고 못 돌아올까 봐 겁이 나십니까?”

    능양진인이 긴장감에 손을 비볐다. 

    지온이 그녀를 다독였다.

    “사숙께서는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저 조방궁의 주지에 불과한데 옥비마마께서 죽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사숙이 죽는다고 옥비마마께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능양진인이 입을 떼려다가 다시 닫았다.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게지!’

    자신이 어떤 비밀들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참 고민하던 능양진인이 말했다.

    “사질, 내가 정말 무서워서 그러네. 이 사숙한테 말 좀 해주게. 이 옥비마마께서 나를 입궁하라고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께서 이리 성의 있게 물으시니 생각나는 대로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옥비마마께서 얼마 전까지 폐하와 갈등이 있으셨다가, 최근에 어렵게 폐하의 총애를 다시 얻었다고 들었는데 필시 마음에 어떤 응어리가 남았을 것입니다. 제왕의 은혜라는 것은 종잡을 수 없어 어떤 때는 은혜가 내리고 어떤 때는 격노가 휘몰아치지요. 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것보다 더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능양진인은 곧 깨달았다. 

    “아이!”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비마마께서 어떻게 총애를 잃으셨는지 기억하고 계시지요? 바로 현비마마로 인해 비롯된 그 소동이 벌어진 후였습니다. 아이로 시작한 사건이니 당연히 아이로 끝나야겠지요. 만약 옥비마마께서 황자를 낳으신다면 앞으로는 그런 것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능양진인은 이제야 이해가 되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또 생각났다.

    “그런데 옥비마마는 왜 날 부르신 거지? 내가 무슨 의원도 아닌데…….” 

    “궁 안에 태의가 있지만 지금 어떻습니까? 폐하께는 아직 황손이 없으시지요.”

    지온은 능양진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건……!”

    능양진인의 미간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하지만 부처님께 빈다고 진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제대로 알고 계시는군요.”

    지온이 조소하듯 한마디 하고는 대답했다.

    “하지만 조방궁은 아이를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능양진인은 지온의 눈빛을 보고 그것이 떠올랐다. 

    “화, 화신첨? 그건 내 능력 밖이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옥비마마께서 그게 사숙의 능력이라고 믿으면 되는 거지요.”

    능양진인은 난감했다.

    “사질, 속 시원하게 말해주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온이 웃었다.

    “시원하게 말을 안 하시면 됩니다. 사람이란 미천한 존재라, 얻기 어려운 물건일수록 귀하게 여기기 마련이지요.”

    “온아!”

    이때, 밖에서 대장공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질, 어서 마마께 가보게. 사질의 솜씨면 옥비마마도 아마 믿어 의심치 않을 거야, 그렇겠지?”

    강호(江湖)의 사기꾼들이 꼭 고인(高人)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인은 반드시 강호의 사기꾼인 법이었다. 

    * * *

    능양진인이 서두르며 돌아갔고 지온은 방으로 돌아왔다. 

    대장공주가 지온에게 물었다. 

    “능양 저 늙은이가 수양은 안 하고 왜 여길 왔어?”

    지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을 어떻게 속이는지 가르쳐 달라더군요.”

    대장공주가 하하 웃었다.

    “정말 제대로 찾아왔구나. 이 조방궁에서 아마 네가 제일 사람을 잘 속일 게다.”

    “누가 아니랍니까? 전에는 소소하게 속이면 됐는데 요즘은 속이는 것도 크게 해야 한다니까요.”

    지온은 말을 끝내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매고고, 점심은 뭔가요?”

    * * *

    영수궁.

    옥비의 곁을 수행하는 궁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능양진인은 황급히 일어섰다.

    금벽이 웃으며 말했다.

    “능양지주, 마마께서 점심을 드시고 쉬고 계시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금벽은 어린 궁녀에게 다과를 가져오라 명하더니, 능양진인에게 점심을 먹었는지, 안 먹었으면 먹을 생각인지를 물었다.

    능양진인은 배 속이 텅 비어 있었지만 이런 시기에, 감히 점심을 먹을 수 없어서 다과조차 한 입도 입에 대지 못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지온이 자신의 원수를 갚아주지는 않을 터였다.

    막 미시(未時)쯤 되었을 때, 드디어 옥비가 나타났다.

    능양진인이 일어나 고개를 낮게 숙였다.

    “빈도, 옥비마마를 뵈옵니다.”

    옥비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주지, 사양하지 말고 앉게.”

    “감사합니다. 마마.”

    능양진인이 조심스럽게 의자 중간에 앉더니 고개를 들어 옥비를 살펴보았다.

    눈앞에 있는 옥비는 그녀가 기억하는 옥비와 아주 달랐다.

    화장이 전의 청초한 느낌과는 다르게 좀 더 짙고 화려했다. 쏘아보는 눈초리가 그녀의 비스듬한 봉황의 눈과 어우러져 기세를 뿜어대는 것 같았다. 

    능양진인은 몸서리쳤다.

    왜 원래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지, 그녀 앞에 앉아있으니 가슴이 다 서늘했다. 

    옥비는 추아가 건네준 차를 건네받아 마시지는 않고 난로처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능양진인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도 공손하긴 했었지만, 오늘처럼 두려워는 모습은 아니었다. 

    ‘역시 그때 내가 너무 상냥했었던 게로군?’

    옥종화는 선량한 사람이라 누구를 만나든 미소를 잃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녀가 온화하고 친절하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옥종화에게 배운 그대로 했더니 결과는 어땠는가?

    이 궁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고상하지만 오만해서 얼굴은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어. 사람들한테 겁주는 재미도 나쁘진 않군그래?’

    “주지도 제법 오랜만에 궁에 왔군.”

    옥비가 천천히 말했다. 능양진인은 억지로 웃었다.

    “예! 마마께서 그동안 바쁘셔서 빈도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시다고 생각했사옵니다.”

    말이 입에서 나가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뺨을 때릴 뻔했다. 

    ‘옥비가 한동안 총애를 잃었던 것을 누구나 다 아는데 바빴을 거라고 말하는 건 괜히 마음을 찌르는 말이 아닌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재간이 없어졌단 말인가? 다 그놈의 꽃 화분 때문에 놀란 탓에……!’

    능양진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기왕 왔는데 더 뭘 어쩌겠는가?

    옥비는 웃으며 그녀를 탓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지난번에 강의했던 경전이 어떤 것이었나? 주지는 아직 기억하는가?”

    능양진인이 바로 대답했다. 

    “<태상노군설상청정경(太上老君说常清静经)>이옵니다. 현자는 다투지 않으나 범부(凡夫)는 다투기 좋아한다는 구절입니다.”

    “현자는 다투지 않고 범부는 다투기 좋아한다……. 허, 정말 일리가 있구나!”

    예전에는 현자가 되기 위해서 다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 같은 사람들은 원래 평범한 사람이라서 다투지 않으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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