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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68)화 (268/385)
  • 268화. 그녀가 변했다

    저녁이 되어 루안은 조방궁으로 갔다. 

    그는 족자를 꺼내 지온에게 주었다.

    “황제 폐하가 주시는 약혼 선물이오.”

    지온이 펼쳐서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3년이나 지났는데 어쩜 이렇게 하나도 안 늘었을까요? 어떻게 이런 글자를 보낼 수가 있죠?”

    루안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아직도 그분을 모르오? 애초에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없는 분이오. 3년 동안 용상에 앉아서 여러 사람 강요에 못 이겨 상소문이나 읽고 있으니 이미 충분히 괴로울 거요.”

    지온은 과거를 회상하고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요.” 

    루안은 자신이 처리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리니 머리가 다 아팠다.

    “예전에 형부에 있을 때는 궁에 자주 오지 않아 그나마 괜찮았지. 근데 통정사에 온 이후로는…….”

    그는 차마 다 헤아리기도 힘들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지온이 놀라며 물었다. 

    “설마요? 벌써 3년이나 황제로 지냈는데 아직도 그 모양이라고요?”

    루안이 말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다고 할까, 말하자면 대충 그 정도라오. 황제처럼 생각하는 방법도 배웠고 때로는 권력을 견제할 줄도 아는데, 정무 처리는 영 엉망이오.”

    지온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정도로 모르는데 대권을 장악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루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정사당의 재상들이 강왕부의 애송이를 전혀 상대하지 않는 거요. 어쨌든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은 모두 정사당에서 쥐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의 말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런 상황은 절대 강왕부가 바라는 게 아니니 앞으로 또 괴롭힐까 걱정이군.”

    지온은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서영왕…….”

    루안은 지온의 속내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갑자기 서영왕 얘기가 왜 나오는 거요?”

    지온이 말했다.

    “지난번에 도대체 누가 서영왕을 모함했는지 몰랐잖아요? 갑자기 병권이 정사당 손에 있지 않다는 게 생각이 났어요.”

    루안은 그녀의 말에 문득 깨달았다.

    “그러니까, 누군가 병권을 이용해서 정사당에 대항하려고 한다는 말이오?”

    지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롱하듯 웃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군, 이 가족은 정말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론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야.”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북양이 끼어들까 봐 사람을 보내어 당신 아버지를 암살했잖아요. 생각해보면 서영왕세자 사건과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루안이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맞소! 그들은 나라의 안정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권력만을 탐할 뿐이오.”

    그러니 북양이 혼란스럽든 말든 서남이 있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멍청한 일족 같으니!’

    내로라하는 총명한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던 것이다!

    지온은 족자를 거두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가져가서 상자 바닥이나 누르는 데 쓰세요. 저런 글씨가 방에 걸려있으면 창피하겠어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거 어필(*御笔: 황제의 글씨)이오.”

    지온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상자 바닥에 눌러 놓아야죠, 잘 보관할 겸!”

    루안의 웃음이 터졌다.

    그는 또 류명주와 옥비의 선물을 꺼냈다. 

    지온은 옥추를 들고는 아주 좋아했다. 

    “역시 궁의 물건들은 정말 정교하네요.”

    그녀는 그중 하나를 풀어 루안에게 주었다.

    “당신 하나, 나 하나 가지면 딱 되겠네요.” 

    루안은 웃으며 옥추를 자신의 허리에 달았다. 

    ‘그런데 이 조향법은…….’

    지온은 종이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성이 담긴 필체지만, 너무 부드러움을 추구해서 뼈대가 무너졌네요.”

    “조향법을 적은 것이라던데 설마 당신 건 아니겠지?”

    지온은 힐끗 보았다.

    “내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겠어요?”

    루안은 고개를 저었다.

    “옥비는 참으로 편하시겠어, 당신 걸 다시 당신한테 선물하다니.”

    그 말을 들은 지온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차 사라지더니 표정이 무거워졌다.

    “왜 그러오?”

    차갑게 실소한 지온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아니, 제가 잘못 봤네요. 이 조향법은 고친 거예요. 옥비가 정말 발전하긴 했군요.”

    루안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지온이 그중 몇 가지 재료를 가리켰다.

    “이것들을 섞어서 장기 복용하면 임신이 어려워져요.”

    순간 찻잔을 꽉 쥔 루안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옥비가 뭘 어쩌려는 거요?”

    지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고서에서 조향법을 하나 찾았는데, 여성 피임용으로 쓰는 것이었어요. 제가 거기서 안 좋은 성분을 빼고 조금 고쳤는데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가 없어요. 옥비가 그걸 찾아다가 이렇게 고쳤을 줄은 몰랐네요. 다른 사람이 아는 게 두렵지도 않은 걸까요? 아니면, 나를 그만큼이나 믿는 걸까요?”

    루안은 류명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옥비가 변했다오.”

    지온이 쳐다보자 루안이 말했다. 

    “예전의 옥비는 당신이 되려고 무척 애를 썼었소.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싶어도 대단한 옥씨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될까 감히 그럴 수 없었을 거요. 그래서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 그런데 이제 옥비는 당신 행세를 그만두고, 마음의 짐도 내려놓은 것 같소.”

    옥종화는 고결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총명함과 재능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질투할 필요도, 모함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옥비는 옥종화의 껍데기를 쓰고서는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는 옥종화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옥종화의 그늘 덕에 입궁하여 황제를 모시게 된, 예전의 시녀일 뿐이었다. 가문도, 조력자도 없는 그녀가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후궁의 소식은 류명주와 루안이 궁에 심어둔 첩자를 통해 낱낱이 전해지고 있었다. 

    지온은 조방궁에 있으면서도 후궁 안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신 조부께 향을 피우러 온 지온은, 종이에 일렁이는 불빛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 금벽이가 이렇게 변한 걸 보시면 슬프시겠지요?”

    비록 금벽이 옥형 선생과 지온을 노야와 아가씨라고 부르긴 했지만, 사실 그녀의 집안은 예전부터 호적이 있었다. 금벽의 아버지가 주부(*主簿: 관직명)를 지낸 적이 있어 백성들이 보기에 금벽 역시 관료 가문의 아가씨이긴 했다.

    옛정이 있어 할아버지는 거의 반 손녀처럼 금벽을 대했다. 지온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금벽에게도 똑같이 가르쳤다.

    하지만 금벽은 공부에는 소질이 없어 따라오지 못했다.

    신분을 도용당한 것에 대해 지온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이름일 뿐이고, 그렇다고 금벽이 옥씨 가문의 아가씨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온은 그 일이 좀 역겹게 느껴지긴 했지만, 금벽이 의안왕을 연모해서 그런 것이라면 자신의 신분을 가져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그렇지가 않았다. 

    금벽은 옥종화에게서 가져온 것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옥종화와 관련된 것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 옥비마마는 사방전에서 살심(杀心)을 품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지온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조향법을 적어 보낸 것이다. 

    조향법이 적인 종이는 곧 검은 재로 변했다.

    불현듯 문가에서 능양진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질.”

    지온은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숙께서 오셨습니까!”

    능양진인은 몸이 떨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뭐 잘못한 게 있는 걸까? 왜 저렇게 무서운 목소리로 부르는 거지?’

    “하하…….”

    능양진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온이 파랗게 질린 능양진인의 눈 밑을 보며 친절하게 물었다. 

    “사숙, 요즘 잠을 잘 못 주무셨습니까? 보세요. 눈 밑이 아주 까맣습니다. 

    능양진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괜찮아요. 제가 아직 사질의 편지를 못 받았는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을 했다.

    지온은 향초 쪽으로 가서 다 타버린 초를 뽑고 떨어진 촛농을 치웠다. 

    “그동안 제가 일이 좀 있지 않았습니까? 옷도 맞추고 장신구도 사느라 너무 바빴습니다.”

    “그럼, 그럼, 그럼…….”

    능양진인이 서둘러 지온을 도왔다. 

    “약혼은 큰일이니 그럴만하지.”

    “아, 참! 사숙께서 제게 큰 선물을 보내셨더군요. 그렇지요?”

    지온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사부님의 유품을 보내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 당연한 것을…….”

    능양진인은 숨이 막힐 지경이라 빨리 본론을 말해주었으면 싶었다. 지온의 이런 사근사근한 말투가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온이 향환(香丸)이 든 상자를 꺼냈다. 

    “사숙, 가져가셔서 밤에 피우십시오. 숙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능양진인은 결국 무릎을 쿵 하고 꿇었다. 

    “사, 사질,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는가? 이걸 왜 나한테 주는가?”

    지온이 화들짝 놀랐다.

    “사숙 왜 이러십니까? 수면향을 드렸습니다. 며칠 푹 주무시면서 몸을 보양하시고 맑은 정신으로 입궐하셔야지요! 이런 모습이시면 귀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능양진인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이, 이거 진짜 수면향인가?”

    “아니면요?”

    능양진인이 멋쩍게 웃었다. 

    ‘영원히 잠드는 줄 알았군.’

    사실 일전에 그녀는 화옥의 일로 지온에게 협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또 생각해보니 예전에 자신이 대장공주에게 오랫동안 독향을 보냈기도 했었다. 지온이 같은 수법을 자신에게 쓰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능양진인은 그 향갑(*盒香: 향을 담는 작은 상자)을 받고 다시 물었다. 

    “사질, 지금 궁에서 나를 부르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궁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지온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소식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

    능양진인은 감히 더 묻지 못했다. 그녀는 지온이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는 오송원을 따라 나와 길목까지 배웅했다.

    문득 지온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사숙께선 들어가십시오, 저는 사방전에도 들러야 합니다.”

    “그래, 사질 잘 가게.”

    능양진인은 뒤돌아서 긴 한숨을 내쉬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지온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 * *

    지온은 사방전에 도착해서 잡무를 처리하고 야우를 불렀다.

    “그 과자가게로 가자.”

    야우가 잠시 멍하다 물었다.

    “루안 공자님과 약속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 오늘 휴일도 아닌데 관아에서 바쁘겠지.”

    “그럼……?”

    그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고 지온이 아예 대놓고 말했다.

    “궁에 있는 첩자를 만나봐야겠어.”

    야우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어, 어떻……?”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다. 궁 안에 첩자가 있는 것은 북양왕가의 가장 큰 기밀이었기 때문이다!

    지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내가 이 일을 안다는 건, 내가 그걸 이용할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지. 알겠는가? 마차나 잘 몰게!”

    서아가 올라와 그의 머리를 때렸다.

    “얌전히 운전해!”

    야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서 마차를 몰아 조방궁을 떠났다.

    ‘혼인이 아직 성사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벌써 알려준 거지? 게다가 맘대로 첩자를 이용하려고 들다니! 돌아가면 이 일을 고해야겠어! 넷째 공자가 너무 제멋대로라는 걸 북양왕 전하께 알려드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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