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67)화 (267/385)
  • 267화. 했던 말

    초엿샛날.

    지씨 가문에서는 북소리와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지온은 대부인 정씨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대장공주가 함께 와서 납폐(*納幣: 신랑이 신부 측에 보내는 예물)에 관한 일을 처리했다.

    지온의 약혼식이라고는 하나, 모든 절차는 사실상 지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집안 어른들이 나섰다. 

    지온의 큰숙모는 친척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얼굴에 경직된 미소를 드리우던 위씨 부인은 사실 속에서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계집애는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 유씨 집안의 혼사를 물리고 또 이런 남편을 얻다니. 비록 명성이 좀 떨어진다고는 하나, 능력이 좋지 않은가! 생각해보니, 유씨 가문 둘째 공자는 가문이 청렴한 것 외에는 어디 비교도 안 되는구나.’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이건 자신이 상상했던 제 딸의 약혼풍경이 아니던가! 

    한편 지온은 지씨 가문에 친척이 이렇게나 많은 줄 전혀 몰랐었다.

    본래 지씨 가문은 이렇게나 왁자지껄할 수 있었던 곳이었으나, 친척들이 왕래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외삼촌 일가를 제외하면, 지온이 친숙하게 느끼는 건 유씨 가문밖에 없었다.

    유 대부인이 지온의 손을 당기더니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직 혼인서를 안 썼으니, 후회하긴 이르네. 우리 집 맏이는 정말 생각 안 해보았는가? 틀림없이 지금보다 더 떠들썩할 게야.”

    지온이 대답했다.

    “안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북양태비께서 죽이겠다고 문을 박차고 오실까 봐 걱정이지요. 아니면 부인께서 태비께 말씀해보시겠습니까? 태비께서 좋다고 하시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유씨 가문의 대부인인 유 대부인은 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네 됐어, 그냥 농담일세.” 

    손으로 닭 한 마리도 잡을 힘이 없는 그녀로서는 저렇게 용맹한 북양태비를 어떻게 건드려 볼 수도 없었다. 

    * * *

    날씨가 맑고 화창하여 햇볕이 따사로웠다.

    황제는 마음이 들떠 서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호은에게 명해 상소문을 정원으로 가져가서 읽었다.

    바로 근처에 백옥헌이 있어 류명주가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황제를 만나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옥비가 만든 간식이 생각나서 사람을 시켜 영수궁에 가서 옥비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공무는 자연스레 해이해졌다. 

    루안이 도착했을 때, 세 사람은 한창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루안을 보고 류명주와 옥비의 눈에 이상한 광채가 반짝했다가 사라졌고, 황제는 이에 약간 부끄러워졌다. 

    무애해각에 있을 적에 황제는 공부를 대충했었는데, 루안은 옥형선생 문하의 제자로서 자주 와서 학생들의 숙제를 걷었었다. 의안왕이었던 시절, 황제가 루안을 마주칠 때의 첫 번째 반응은 대개 오늘의 숙제를 다 마치지 못한 것을 들켜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지금 황제의 심정이 그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서재에 남아 업무를 하지 않고 밖에 나와서 비들과 노는 바람에 결국 그가 상소문을 들고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루안의 표정은 평소와 같은 것이, 간언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사실 자신이 바로 황제이니 어디에서 상소문을 읽든 그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루안은 결코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애초에 무애해각에서도 자신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뭐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루안의 얼굴이 너무 엄숙해서 제 발 저렸던 것뿐이었다. 

    두 비가 잠시 물러난 뒤, 루안은 오늘 지시가 필요한 상소문(*章奏: 장주)를 황제에게 올리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황제는 결재할 것은 결재하고 나머지는 루안에게 떠넘겼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

    루안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말했다.

    “폐하, 강둑을 수리하는 일은 신이 알아서 할 수 없사옵니다. 이 안건은 정사당에 내려보내어 의논하게 하시옵소서.”

    “그래, 자네 말대로 하겠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문하생이란 말인가!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더할 나위가 없구나. 하지만 얼마나 능력이 출중하든, 짐의 말을 잘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말이야.’ 

    황제는 이런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기쁜 마음에 황제는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오늘이 약혼하는 날 아니었나? 왜 휴가를 안 냈지?”

    루안이 말했다.

    “그 일은 제가 나설 필요가 없고, 어른들이 처리하면 될 일입니다.”

    “오, 그렇군. 자네 모친이 계시지!”

    황제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정혼했으니 짐이 무슨 선물을 주면 좋겠는가?”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주지 않으셔도 신은 괜찮습니다.”

    “마음의 표시이니 선물은 해야지. 어쨌든 우리가 여러 해 같이 공부한 사이인데 우정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나.”

    황제는 기쁜 마음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짐이 자네에게 글씨를 한 폭 써 주는 게 어떤가? 축복의 의미로 말이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제는 즉시 호은에게 종이와 붓을 가지고 오라고 명했다.

    옥비와 류명주도 정자로 돌아와 먹을 갈고 붓을 씻었다.

    황제는 몇 번 시험해 본 끝에 ‘천작지합(*天作之合: 하늘이 맺어준 혼인)’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 

    류명주가 그 글자를 보고 황제를 우러러보며 말했다.

    “폐하, 저도 같이 어울려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어울리겠다는 게야? 글씨라도 써주려고?”

    류명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신첩의 수준으로 어찌 폐하 앞에서 추태를 보이겠습니까? 다만 신첩이 지온 소저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

    황제는 자신이 류명주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그 계기는 소달이 학생을 괴롭힌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지온 소저의 부탁으로 류명주는 그 사건을 증언하러 왔었다. 그리 생각해보니 지온 소저는 자신들의 중매인이 아닌가!

    황제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중매인한테 당연히 감사 선물을 줘야지.”

    류명주가 향설에게 한 마디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설이 한 쌍의 꽃 모양의 옥추(*玉坠: 옥 펜던트)를 가지고 왔다.

    “신첩, 이 옥추를 보고 지온 소저가 생각났습니다. 특별히 귀한 물건은 아니지만, 성의의 표시로 생각해 주세요. 수고스럽겠지만 루 대인이 지온 소저에게 가져다주세요.”

    루안이 옥추를 건네받으며 류명주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옥비가 눈을 반짝이더니 웃으며 끼어들었다.

    “폐하, 류 동생이 선물을 보내는 김에 신첩도 하나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좋구려!”

    “폐하의 필묵을 빌려 쓰겠습니다.”

    옥비는 웃고는 붓을 들어 종이에 대고 조용히 읊조리며 글자 몇 줄을 썼다.

    그녀는 종이를 가볍게 들고 말리면서 무심코 류명주의 얼굴에 대고 흔들었다. 

    옥비의 필체는 잠화(簪花)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해서체로 적당한 크기에 부드러운 형태를 지녔는데, 사람들 앞에 내놓아도 재능이 있다 할만했다. 

    류명주는 힐끗 그것을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옥비는 이것을 궁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본궁이 일찍이 얻은 조향법인데, 지온 소저가 이것에 정통하다고 하니 마침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야.”

    루안이 종이를 받았다.

    “마마, 선물 감사드립니다.”

    거의 정오가 되어, 호은이 와서 점심을 올리겠다고 고하니 황제가 말했다.

    “루안, 지금 자네가 출궁하면 또 식사 시간이 늦어질 것이네. 오후에 조회가 있어 다시 궁에 들어와야 할 테니 여기서 함께 식사하는 게 어떤가?”

    황제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루안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는 바로 응했다.

    네 사람은 소화청(*小花厅: 화원에 설치된 작은 응접실)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황제와 두 비는 정청(正厅)에서 식사를 하고 루안은 혼자 편청(偏厅)에 앉았다.

    * * *

    식사가 끝나자 황제는 몇 걸음 걷고는 휴식을 하러 갔다. 

    루안은 상소문을 정리하고 침대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창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가 눈을 뜨자 창문으로 옥비가 복도에 앉아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흘끗 루안을 쳐다보더니 그가 깨어난 것을 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루 통정, 오랜만이네.”

    현비가 낙태한 사건 이후, 벌써 두 달가량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이 두 달 동안 옥비의 신세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루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본궁은 자네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왔네.”

    루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옥비는 옆으로 돌아서서 곁눈질로 그를 스쳐보았다.

    “공자 말이 맞더군. 옥종화의 신분으로 사는 건 장기적인 계책이 아니었어.”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안이 그런 말은 한 것은, 그녀를 일깨워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옥비는 계속해서 말했다. 

    “공자는 그날, 내가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다시 찾아오라고 했지. 이제야 그렇게 되었으니 약속대로 공자를 찾아왔네.”

    “…….”

    루안은 당시에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보게. 나는 이제 옥종화가 아니지만, 폐하는 전처럼 나를 총애하고 있네. 비록 처음의 믿음보다는 못하지만, 예전만큼의 부담도 없지. 이제는 공자의 맹우(*盟友: 동맹을 맺은 벗)가 될 자격이 되는가?”

    ‘아, 이거였구나!’

    루안은 처음에 옥비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나중에 류명주가 나타났고, 그녀는 옥비보다 똑똑했다. 뿐만이 아니라 류명주에게는 신세를 진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옥비에게 굳이 또 힘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이번에는 옥비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루안이 말했다.

    “맹우라고 하기에는 좀 지나치십니다. 마마께서 제가 원하는 물건을 주신다면, 보답하신 셈 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 답이면 충분했다.

    옥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약속했네.”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참, 공자. 좋은 짝을 얻게 된 걸 축하하네. 지온 소저는 정말 아가씨를 닮았어. 두 사람의 결혼이 원만하길 기원하겠네.”

    루안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지자 옥비는 또 무언가 말을 하려 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옥비언니, 왜 여기 계세요?”

    옥비는 몸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물고기 밥을 주러 왔네. 이제 갈 참이야.”

    옥비는 정청으로 돌아가면서 류명주와 루안이 친근한 말투로 서로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다. 

    “루 대인, 일어나셨군요!”

    류명주는 입가에 설핏 무시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 기지로 루 공자에게 줄을 대려고? 안됐지만 공자는 이미 내 사람이다. 아무리 매수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옥비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류명주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루 대인, 옥비가 귀찮게 하지는 않았나요?”

    루안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몇 마디 나눴을 뿐입니다.”

    류명주가 웃으며 당부하듯 말했다.

    “옥비가 요즘 성격이 많이 변해서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출궁도 자주 하고 사람들 환심을 사려 하네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매일 화춘궁에 가서 문안을 드린다니까요. 청녕궁 쪽에는 태후께서 안 계셔도 물건을 보내곤 한답니다. 신발 깔창이나 무릎 덮개 같은 것들요. 참, 심지어 나한테는 보온 토시까지 주더라고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깨달은 게 있나 보군요.”

    류명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루 대인, 요즘 옥비를 보면 자꾸 마음이 불안해요. 내가 생각이 많은 거겠죠?”

    루안이 말했다.

    “마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옥비가 무엇을 하든 저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처음 입궁할 때의 마음만 잊지 않으시면 폐하의 마음에 항상 마마의 자리가 있을 겁니다.”

    류명주는 위로를 받고는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루 대인이 항상 보살펴주시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 같은 기녀가 갑자기 세상 제일 귀한 곳에 들어와서 정말 어떡하면 좋을지 몰랐을 거예요.”

    루안이 두 손을 합장하고 인사하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이미 마마시니 속세의 티끌은 잊으십시오. 과거에 관한 것은 앞으로 다시는 언급하지 마십시오.”

    “루 대인의 말이 맞습니다.”

    류명주는 마지막으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폐하를 모시러 가야겠어요. 지온 소저와 백년해로하길 기원할게요.”

    루안이 그녀를 눈인사로 전송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공이 와서 곧 조회가 시작됨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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