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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66)화 (266/385)

266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태의는 빠르게 도착해 옥비의 맥을 짚고 약을 처방했다. 그리고는 지시사항을 길게 늘어놓았다. 영수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옥비는 약을 먹고 간신히 잠이 들었고, 호은이 들어와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다.

“폐하, 오전 정무를 보실 시간입니다.”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쉴 것이니 다들 해산하라고 해라.”

“폐하…….”

황제는 그가 더 권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가봐.”

호은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예.”

공공이 침전에서 물러나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추아는 수건을 치우고 침대 쪽을 한번 보고는 조용히 물러 나왔다. 

금벽이 추아를 맞이하며 물었다.

“마마는 괜찮으시지?”

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옆에 계세요.”

금벽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양손으로 합장했다.

“아미타불, 두 분께서 드디어 잘되셨네.”

추아가 별로 기뻐하지 않는 모습에 그녀는 의아해졌다.

“넌 어째 안 기쁜 표정이네?”

추아가 고개를 들더니 양옆으로 저었다.

“아니요. 오전 내내 바빠서 좀 어지러워서요.”

금벽이 웃으며 그녀를 눌러 앉혔다.

“어젯밤에 숙직을 서고 아침에도 못 잤으니 어지러울 만도 하지. 잠깐 앉았다가 죽 한 그릇 먹고 쉬러 가.”

“알겠어요.”

추아는 순순히 대답하고 아침밥이 오기를 기다려 죽을 한 그릇 먹고는 자러 갔다. 하지만 추아는 마마가 어젯밤 문가에 기대어 찬바람을 맞는 모습이 어른거려 줄곧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 *

옥비가 깨어났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황제는 상소문을 손에 들고 침대 가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종일 내 곁에 계셨던 건가?’

옥비는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일어나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황제는 눈꺼풀을 움직이며 곧 깨어났다.

“비…….”

“폐하.”

옥비가 고개를 숙였다.

“소리에 깨실 줄 몰랐습니다. 신첩…….”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소, 좀 어떠하오? 몸은 괜찮은 것 같소?”

“신첩은 괜찮습니다.”

옥비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열은 벌써 내렸습니다.”

황제는 웃으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봐라.”

황제의 말에 궁녀가 들어와 분부를 기다렸다.

“비의 소세 시중을 들고, 태의를 다시 들라 하라.”

“예.”

또 한바탕 영수궁은 부산스러워졌다. 태의가 와서 옥비의 열이 이미 내린 것을 확인하고 간 뒤에야 영수궁은 다시 조용해졌다.

황제는 옥비와 함께 죽을 먹었다.

옥비가 죽을 두어 숟가락 먹고 내려놓자 황제가 물었다.

“왜 그러오? 입맛이 없는 게요?”

옥비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신첩, 화장을 하지 않아 얼굴이 보기 흉할 것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병이 난 사람이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오.”

옥비가 느릿느릿 그릇의 죽을 휘저으며 말했다.

“신첩…… 사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게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황제가 멈칫하고 멈추었다.

옥비는 그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폐하를 따라 궁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신첩은 저 자신을 잊고 폐하 마음속의 그분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폐하가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 신첩도 기뻤고, 그러면 아가씨가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폐하, 신첩은 아가씨가 아닙니다. 신첩은 아가씨보다 너무나도 모자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처럼 될 수가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신첩은 결국 폐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녀의 눈물이 방울방울 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자 황제는 식욕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알겠소, 못하겠으면 안 해도 되오. 짐도 알고 있소, 이 세상에 또 다른 옥종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저 짐이 그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울지 마시오. 앞으로는 비 자신의 모습으로 사시오.”

옥비는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신첩은 앞으로도 예전의 금벽이옵니다.”

하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옥비는 어리둥절했다.

“폐하?”

황제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궁에 또 다른 금벽이 있지 않소, 이 이름을 부르면 자꾸 그 아이가 생각나오. 앞으로는 아금(阿锦)이라고 합시다, 옥금(玉锦), 새 이름이 어떻소?”

* * *

궁중의 동향은 항상 빠르게 변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벽옥헌에 문턱이 닳도록 출석하던 미인과 재인들의 발길이 갑자기 뚝 끊겼다.

향설은 몹시 화가 나서 류명주의 머리를 빗으며 투덜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니 언니하면서 그렇게 사람을 불러대더니, 이젠 며칠째 사람 그림자도 안보이네요.”

류명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웃었다.

“오기 싫으면 오지 말라고 해. 조용하고 좋지.”

옥비가 다시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류명주는 매우 당황했었다. 그러나 그 후 지온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류명주의 마음은 다시 안정되었다. 

한낱 장락지의 손님들조차도 완전히 독점할 수 없을진대, 지금처럼 황제를 모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무릇 사내란 욕심이 많아, 마음에 여러 사람을 담는다. 자신이 언제까지나 황제의 유일한 총비이길 바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유일하지 않을 바에야, 황제가 누구를 총애하든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황제가 자신에게 왔을 때 기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요새 날이 점점 추워지네, 감당궁은 어떻게 고쳐졌는지 모르겠구나.”

류명주가 입궁했을 때, 황제는 그녀를 벽옥헌에 기거하도록 했다. 이곳은 본래 경치를 감상하는 용도로 쓰이던 곳으로, 승원궁에서 가장 가까웠다. 

시작이 이러했으니 그녀도 자연경관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래 살아보니 벽옥헌은 영 형편없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도 벽옥헌에는 담이 없어서 밤에는 몹시 추웠다.

나중에 황제는 근처의 궁궐을 하나 택해서 수리하라고 내정에 명하였으나 아직 미완성이었다. 

* * *

몸단장을 마친 류명주는 화춘궁으로 문안을 드리러 갔다. 

도착했을 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안에서는 이미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조금 놀랐다. 

‘늦게 온 것도 아닌데 다들 오늘 약속이라도 한 걸까?’

궁으로 들어가며 류명주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도 옥비가 미소를 지으며 황후와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류명주는 비록 입궁은 늦었지만, 옥비가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홀로 생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후에게 문안도 드리지 않고, 비빈들과 어울리지도 않으며 마치 다른 세계에 혼자 사는 것처럼 살았다. 

일찍이 류명주는 장락지에 있을 때도, 사람들이 이 총비(宠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 손님들은 황제가 총애하는 옥씨 가문의 아가씨에 대해 감탄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옥비에 관한 얘기가 점점 흥밋거리로 변했다. 그녀는 육궁(*六宫: 황후와 비들이 사는 공실)에서 나오지 않고 혼자 황제를 독점하며 영수궁에서 일반 부부와 같은 나날을 보냈다. 황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후도 공경하지 않았으며 후궁의 모든 규율도 지키지 않았다.

어떤 위치에 있든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었다. 그녀도 그저 한낱 비빈일 뿐인데 황후보다 더 기세를 부렸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분칠이나 한 속물이고 저 혼자 세상에서 가장 수려한 여인인 양 황제가 그녀를 위해 모든 법도를 무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여태껏 고고하게 세속에는 발을 담그지 않았던 옥비마마가 자신 같은 사람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옥비가 황후와 이야기 하는 모습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줄곧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만 같았다. 

“마마께서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면, 신첩에게 처방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조부께서 일찍이 얻은 처방으로 이 처방대로 약을 지으면 약효가 빠른 것은 아니나 몸을 상하게 하지 않지요. 열흘에서 보름 정도 마시면 안색이 좋아집니다. 신첩이 막 궁에 들어왔을 때 자주 마셨는데 나중에는 마실 필요가 없어질 정도였습니다. 이따가 사람을 시켜 마마께 보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신지요?”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고생이 많았구나, 옥 선생의 처방전이면 틀림없이 좋을 테지.”

류명주가 앞으로 나와 예를 표했다.

“신첩 황후마마, 신비 언니, 옥비 언니를 뵈옵니다.”

황후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온화하게 말했다.

“류 첩여 왔는가.”

신비와 옥비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류명주는 자기 자리에 앉아 그들이 연지와 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문득 신비가 이렇게 말했다.

“옥비께서는 요즘 화장이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군요.”

옥비는 웃으며 일부러 얼굴을 들어 화장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아서 늘 기운이 없었지요. 여동생이 제 얼굴형에는 분을 좀 더 발라 생기 있어 보이게 하고 눈썹은 너무 꾸미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요.”

신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예전의 옥비는 눈썹에 아주 공을 들였는데 하필이면 얇은 화장만 해서 아무래도 좀 안 어울렸다. 지금은 화장이 좀 진해지고 신선 같은 분위기가 옅어졌지만, 본래의 자신의 용모와 더 잘 어울렸다. 

‘이제 체념한 것인가? 정말 희한하네, 황제한테 냉대를 받더니 고고했던 선녀가 속세로 다 내려왔구나.’

모였던 이들이 흩어져 돌아갈 때, 류명주와 옥비는 앞뒤로 붙어 화춘궁을 나왔다.

류명주가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던 차에, 갑자기 류명주는 옥비에게서 물건을 하나 받았다.

옥비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듣자니 감당궁의 수리가 아직 안 끝났다던데, 류 동생은 아직 벽옥헌에 있겠군. 요 며칠 날씨가 추워 내가 보온 토시를 몇 개 만들었는데, 동생이 싫지 않으면 가져가서 손 녹이는 데 쓰시게.”

류명주는 손에 든 토시를 만지작거렸다. 

토시는 지금껏 본적이 없는 물건이었는데 솜저고리 소매에 모피를 꿰맨 것이었다. 손 양쪽 끝에서 펼쳐져 아주 따뜻했다.

류명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옥비 언니는 정말 지혜롭고 손재주가 있으시네요. 참 실용적이에요.”

옥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북쪽 지방에서 전해진 건데, 조금 개량해서 보기 좋게 만들었을 뿐이네.”

류명주는 감사 인사를 하고 백옥헌으로 돌아갔다.

향설은 류명주가 토시를 좋아하며 계속 만지작대는 것을 보고 말했다.

“마마, 설마 그런 물건에 넘어가시는 건 아니시죠?”

류명주가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넘어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예의를 차릴 줄 알아야지.”

그리고 향설에게 신신당부했다.

“옥비를 적으로 여기지 마라. 옥비는 폐하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도 폐하를 좋아하니 그분을 난처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게야.”

향설은 이 말을 천천히 생각해보고는 새로 온 마마께 더욱 탄복하게 되었다.

후궁의 비빈은 모두 황제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기에 폐하의 뜻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겉으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마마는 단번에 이 이치를 파악했던 것이다.

‘어쩐지 폐하께서 궁으로 데려오시더라니.’

“예, 쇤네 명심하겠습니다.”

* * *

한편, 옥비는 천천히 걸어 영수궁으로 돌아갔다. 이 긴 골목길은 늘 답답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무척이나 호화롭고 훌륭했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예전의 자신은 옥종화가 되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무척 힘들었었다. 그런데 마음을 열고 보니 옥씨 가문에서 자신에게 남겨준 것들이 많았고, 자신은 그걸로 충분히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약차 처방전이나 보온 토시도 그것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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