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64)화 (264/385)
  • 264화. 지난 일을 들춰야겠어!

    강왕부.

    세자빈은 빠른 걸음으로 나와 강왕세자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세자 전하.” 

    “예를 거두시오.” 

    강왕세자는 그녀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간 뒤 시녀가 들어오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차를 따라 한 모금 들이켰다.

    강왕세자비는 안으로 들어가 찻잔을 받으며 물었다.

    “세자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으시다고요?”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궁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어떻게 된 일이오? 누가 어전 시위와 결탁해서 서영왕세자를 모함했다던데. 약을 쓴 거라는 서영왕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서영왕세자를 독살하려 했다는군. 정말 이상한 일이지, 누가 손을 궁궐 안까지 뻗치는 건지.”

    강왕세자비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부군께서도 전혀 모르시는 겁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소?”

    강왕세자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서영왕부와 맞서는 게 나한테 무슨 득이 된다는 말이오? 북양왕부도 마찬가지고.”

    북양왕부는 예전의 원한도 있거니와 병력이 강하여 강왕세자는 북양왕부가 꺼림칙했다.

    ‘서영왕부는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서남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고, 또 전쟁도 끊이지 않고 있어. 서영왕은 도성에 와서 그저 돈이나 구걸하고 있을 뿐 아니던가.’ 

    반면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강왕세자비는 웃음으로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궁궐에 사람이 숨어들었다는데 부군께서 전혀 모르고 계시니 그것이 이상해서 그럽니다.”

    강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설마 떠난 지 3년도 안 되어 수도에 또 다른 세력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왕세자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강왕세자비가 곧이어 말했다.

    “부군께서 소달을 불러 물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가 계속 도성을 지키고 있었으니 전혀 모를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강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사람을 시켜 소달을 불러오거라! 일단 물어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예.”

    * * *

    얼마 지나지 않아, 소달이 도착했고 강왕세자는 서재로 소달을 만나러 갔다.

    소달은 묻는 말에 억울함을 호소하듯 황급히 말했다.

    “영민하신 세자 전하, 이일은 소장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어느 놈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강왕세자의 안색이 누그러졌다.

    “너도 모르는 일이냐?”

    소달이 예를 갖추고 사죄하며 말했다.

    “신, 신이 무능하여…….”

    강왕세자가 손을 저었다.

    “됐다. 돌아가서 잘 조사해 보아라, 이 궁에 다른 세력이 있다니 걱정이 되어 밥이 다 안 넘어갈 지경이야.”

    “네, 소장 반드시 엄중히 조사하겠습니다!”

    * * *

    소달은 자택으로 돌아간 뒤 등불 아래서 천천히 밀서를 썼다.

    《전하, 보십시오, 신이 무능하여…….》

    * * *

    황제는 서영왕을 달래기 위해 하사품을 내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히 정사당에 말해 서남 지역에 군비를 지원하도록 허가해주었다.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되자 입이 귀에 걸린 서영왕은, 수도를 떠나기 전에 루안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

    “진심으로 감사하오. 대인이 일깨워준 덕에 우리 아들이 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

    루안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황제의 녹을 받는 사람으로서, 황제께 충정을 다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너무 예의를 차리시는군요.”

    “어쨌든, 이번에 루 대인이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 서영왕부가 아주 힘들 뻔했구려.”

    서영왕이 몸을 굽혀 인사했다.

    “루 대인이 돈을 좋아한다고는 들었네만, 하필이면 본왕도 돈이 필요한지라 사례하지는 못하오. 언젠가 루 대인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우리 석씨 가문에서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소.”

    * * *

    서영왕부 사람들은 뜻밖에 일어난 사건에 겁이 난 나머지, 사건이 정리되자 부리나케 짐을 꾸려 서남으로 향하기로 했다. 다만 서영왕세자는 아직도 이렇게 소리쳤다.

    “어렵게 수도까지 왔는데, 며칠밖에 못 놀고 가다니요?”

    그러자 그의 부친인 서영왕이 끼어들어 말했다.

    “놀긴 뭘 놀아! 이번에 하마터면 네 녀석 머리가 없어질 뻔했느니라! 아직 범인도 못 찾았고, 임창백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넌 무섭지도 않으냐?”

    이에 서영왕세자가 임창백 정도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실권도 없는 큰아버지가 뭐가 무섭습니까? 그리고 범인을 아직 못 찾았으니 여기 남아야죠! 어느 간 큰놈이 감히 본 세자를 모함했는지, 소자는 꼭 봐야겠…… 아야!”

    “닥치거라! 당장 짐 싸서 도성을 떠나자!”

    * * *

    주점 창가에 서 있던 지온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서영왕부 사람들은 떠났는데, 북양왕부는 안 가나요?”

    루안은 새우 한 마리를 까서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

    “당분간 가지 않을 생각이오.”

    “왜요? 서영왕부가 함정에 빠질 뻔했는데, 당신 형님께선 무슨 일이 생길까 무섭지도 않대요?”

    루안은 그녀를 쓱 보고 말했다.

    “형님이 내가 혼인하는 걸 보고 싶다고 했거든.”

    지온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럼 여기서 설을 지내신다고요? 너무 오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렇소. 그래서 어머니한테 쥐어박혔지. 우리가 약혼하고 나면 갈 거요.”

    “아, 그럼 괜찮겠네요.”

    * * *

    어느덧 십일월이 되어, 능운진인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지온은 향초를 손질하여 제사를 지내러 갔다.

    오송원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능양진인이 이미 와있었다.

    “능양 사숙, 안녕하세요! 제 사부님께 향을 피우러 오셨나요? 감사드립니다.”

    인삿말에 능양진인이 멋쩍은 듯 말했다.

    “사질, 무슨 소리야? 당연한 것을.”

    지온은 더 말하지 않고 초를 켜고 향을 피워 제사를 지냈다.

    그녀가 일어서자 능양진인이 앞으로 나가 향을 받아 향촉에 꽂았다.

    “사질 축하해, 이제 상복을 벗을 수 있겠네. 그래, 언제 인사드리고 예물을 받을 거야?”

    지온이 흘끗 그녀를 보았다.

    “사숙께서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능양진인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같이 사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저 죽은 네 스승의 제삿날도 아직 안 지났으니 입에 올리지 않는 것뿐이지.”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숙.”

    “아니야, 어딜 감히.”

    능양진인은 머뭇거리며 살피듯이 그녀를 보았다.

    지온이 화로의 재를 헤집고 경을 태우며 말했다.

    “사숙,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모두 한 가족인데 서로 눈치 볼 필요 없지 않습니까?”

    능양진인은 ‘한 가족’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는 미간을 떨며 억지로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그게, 그것이…….”

    “만수절에 있었던 축하 선물과 관련된 일을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능양진인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그렇네.”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물었다.

    “사질, 정말…… 그분이 우리를 해치려 했다고 생각해?”

    “해치려는 건 사숙입니다.”

    지온이 바로잡으며 말했다.

    “저와 사매들이 아니라요.”

    능양진인이 얼굴을 떨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질 혹시, 혹시…….”

    지온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향해 웃었다.

    “도와달라는 말씀이신지요?”

    능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수절이 돌아오자, 능양진인은 두려웠다.

    조방궁은 내정에 귀속되어 있어, 까놓고 말해서 능양은 황실의 노복이었다. 궁의 주인이 자신의 목숨을 원하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지온의 기지와 대장공주의 두둔으로 운 좋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능양진인은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렸다. 

    게다가 그녀는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화옥이 갑자기 죽은 것처럼 자신도 갑자기 죽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껏 맞붙어 싸우는 동안, 지온은 말하자면 적에 속했다.

    그런데 충성을 바쳤던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반대로 눈앞에서 자신을 살려주었다.

    “사질이 도와만 주면, 훗날 사질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하겠네.”

    지온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사숙께서 저를 위해 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능양진인이 황급히 말했다.

    “사질 말해봐, 내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주겠네.”

    지온은 그녀를 보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물었다.

    “화옥이 왜 죽었는지 알려주십시오.”

    능양진인이 갑자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눈을 크게 부릅떴다.

    지온이 빙긋 웃었다.

    “알려 줄지 말지는 사숙께서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 * *

    지온이 난택산방으로 돌아오자, 방안에 옷감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대장공주와 매고고가 옷감을 보고 있었다.

    “이런 옷감은 편안해서 일상복으로 적합하겠어.”

    “색깔이 너무 밝지 않나요?”

    “젊은 사람은 좀 밝게 입어야지, 우리처럼 온종일 어둡게 입어서 뭐하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대장공주가 지온을 보고 손짓하며 불렀다.

    “온아, 어서 와서 골라보거라. 네 옷은 빨리 만들어야겠어.”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봄옷이요? 너무 이르잖아요!”

    “뭐가 일러? 이건 네 외출용으로 해야겠다, 석 달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안 하면 언제까지 기다리려고?”

    “시간이 부족하면 미루면 되죠.”

    대장공주가 놀리며 말했다.

    “너는 기다릴 수 있겠지만, 북양왕부 넷째 공자는 못 기다릴 게다. 그 댁 어머니가 아들이 손주를 안겨주길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공자를 좀 불쌍히 여겨주렴.”

    대장공주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본궁이 곽여단과 사돈이 될 거라곤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공주는 한바탕 웃었고 매고고는 점심 식사를 챙기러 갔다.

    지온이 대장공주의 곁으로 가 앉자, 대장공주는 옷감을 내려놓고 물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느냐?”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머니, 만수연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세요?”

    대장공주는 ‘아’ 하고는 말했다.

    “누가 꽃에 약을 뿌린 그 일 말이냐?”

    “네. 만약에 어머니께서 제때에 나서주시지 않았거나, 제가 설득하러 나서지 않았다면……. 이 일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대장공주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누가 그런 건지 말해보렴, 본궁이 찢어 죽일 테니!”

    지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일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대장공주는 의아했다.

    “온아! 이 일을 벌인 자는 반드시 궁 안에 있을 게야, 네가 손 쓸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온은 도리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가진 힘은 흉수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지온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대장공주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 너도 알고 있잖니.”

    지온이 말했다.

    “어머니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에 흉수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한테도 다른 방도가 없겠지요. 하지만 저만이 이 사람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어요.”

    대장공주는 어리둥절해했다.

    “온아, 그 무슨 소리냐?”

    “어머니, 저를 믿어주세요.”

    지온은 대장공주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한 번 만요.”

    지온의 이런 모습을 본 대장공주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애롭게 지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알았다. 네가 뭘 하든지, 본궁이 확실히 뒷받침을 해주마.”

    지온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무릎 위에 엎드려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제 친어머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지만, 만약에 살아계셨다면 꼭 어머니 같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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