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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61)화 (261/385)
  • 261화. 도움

    다실(茶室).

    루안은 차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손님을 위해 제공된 여행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등이 손님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왔다.

    “공자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루안은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변장을 한 서영왕이었다. 서영왕은 루안에게 두 손을 모아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루 대인.”

    서영왕이 갖춘 예는 사실 루안의 관직을 생각하면 과한 예였다. 서영왕과 함께 온 막료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손히 루안에게 예를 갖췄다.

    둘을 향해 마주 예를 갖춘 루안의 목소리는 그저 덤덤했다.

    “앉으시지요, 전하.”

    자리에 앉자마자 서영왕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지난번 도움을 줬던 것엔 감사하고 있소. 오늘은 본왕에게 어떤 고견을 들려주시겠소?”

    제 찻잔을 채운 루안은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릴 했다.

    “찾아가는 곳마다 막히고 도움 주려는 이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서영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부정할 것도 없었다. 눈이 있으면 모두가 볼 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작금의 여론은 서영왕세자의 목숨을 바라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누군들 반대편에 서고 싶을까.

    “계속 이렇게 상황이 흘러간다면 전하께서는 위험한 선택을 하시겠지요.”

    흠칫한 서영왕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설마 본왕이 옥이라도 습격하겠소?”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옥을 습격하진 않으시겠지만, 서남 지역에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조정에선 서영왕부를 다독여야 할 테니 세자를 참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계획이 들통 난 서영왕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함께 온 막료의 표정 역시 부자연스러웠다.

    루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을 벌이시면 서영왕부의 존재는 이른 시일 안에 사라질 것입니다.”

    서영왕의 얼굴에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뜻이오, 루 대인?”

    “누군가 서영왕부가 그리 나와 주길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 일을 빌미로 죄를 물어 서영왕부가 가진 병권을 가져오기 위해 말입니다.”

    서영왕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남 지역을 지켜온 서영왕부를 쉽게 흔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그들은 변경 지역의 안위 따윈 생각지도 않는단 말이오?”

    “생각지 않습니다.”

    루안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남 지역이 조정에 무슨 도움을 주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전하. 세금입니까? 도리어 조정에서 보태주고 있지요. 하면 민심입니까? 그곳에 있는 다른 민족들은 들고일어나지 않는 게 다행인 자들입니다. 광산과 약물이 있으나 들어가는 군비에 비하면 출혈이 더 큽니다. 그러니 조정이 서남을 버리는 것도 아주 하지 못할 거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영왕은 루안의 논리에 반박할 말이 없어 그저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러나…….”

    영토를 넓히는 것은 왕조가 가진 본능적인 야심이 아니던가!

    그러나 루안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모두가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아쉬울지 아닐지를 알려면 상대가 무엇을 중히 보는지를 살펴야지요.”

    한참을 말없이 있던 서영왕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것이 윗분의 뜻이오?”

    그가 말한 윗분은 바로 황제였다.

    그러나 다시금 고개를 저은 루안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폐하의 뜻이 그러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영왕의 눈 속에 작은 희망의 불꽃이 피어났다.

    “그렇다면…….”

    “내일 궁 문 앞에서 울부짖으십시오.”

    루안이 대답했다.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좋습니다. 석 세자께 누군가 약을 먹였고, 세자께서 정 공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해야 합니다.”

    서영왕이 흠칫 놀랐다.

    “동시에 도성 전체에, 먹으면 사람이 취한 것처럼 변하고 깨어나면 기억을 잃게 되는 약이 있는지 묻고, 현상금을 걸어 찾도록 하십시오.”

    서영왕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막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이상하다 했습니다! 평소 자택에서도 술을 많이 마시는 세자께서 왜 그리 쉽게 취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민보에 새로운 소식이 하나 올라왔다.

    [현상금. 

    사람이 복용하면 취한 듯이 변하고 약에서 깬 후에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약물을 찾고자 한다. 답을 아는 자는 서영왕부를 찾아오라. 백금(百金)을 사례할 것이며 선봉랑(*宣奉郞: 과거 중국의 관직명)에 천거할 것이다.]

    민보를 본 찻집 손님들은 저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서영왕부면, 그 누구냐, 사람 하나 잡은 서영왕세자 아니야?”

    “서영왕부라곤 세상에 딱 한 곳뿐이니 그곳이 맞겠군.”

    “서영왕세자가 술을 처먹고 사람을 죽였다더니만, 서영왕부에선 누가 세자에게 약을 썼다 생각하는 게로구먼?”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먹은 후에 기억까지 잃는 게 말이나 되나? 거 생각을 좀 해보라고. 서영왕부에서 괜히 물타기 해서 세자 놈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주려는 게 분명하다니까!”

    “확실하지 않은 거 아닌가? 세상에 수백 수천 가지의 기기묘묘한 약물이 있으니 진짜일 수도 있어.”

    그렇게 분분한 의견이 오가던 그때.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서영왕이 궁 문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네! 제 아들이 평소 주량이 좋아 겨우 과일주 몇 잔에 그렇게 취할 리가 없다면서, 누군가 약을 써 세자를 해치려고 한 거라 하고 있네! 정 공자를 죽이지 않았다면서!”

    다관의 손님들은 모두 몹시 놀랐다.

    사건이 진짜 그리 흘러가고 있다니!

    “사실인 것 같나?”

    “과히 믿기 어려운 소리가 아닌가? 서영왕이 일부러 수작을 벌이는 걸 수도 있다 보네.”

    “내 보기엔 가능성이 있어. 과일주가 쉽게 취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 않나?”

    “하지만 그 전날엔 취하지 않았나! 그래서 정 공자와 충돌까지 빚었으니 어쩌면 주량 자체가 약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맞네,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또 모르네, 서영왕이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걸지도!”

    “그나저나 백금(百金)이라니, 많기도 하군.”

    “관직에 천거까지 한다지?”

    금전도 금전이지만, 중요한 것은 관직이었다. 제대로 하나 걸리면 백성 신분에서 관직에 오르게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격이 아닌가?

    이 소식은 발행된 민보에 실려 도성 전체에 퍼져나갔고 곧 모르는 이들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 * *

    한 시진(*두 시간) 후, 왕부가(王府街).

    떠돌이 의원 하나가 연신 주위를 살폈다. 제 뒤를 쫓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소매를 털고는, 얼마나 빨아 입었는지 하얗게 닳은 옷을 꾹꾹 잡아 폈다. 의원은 약상자를 등에 메고 곧장 서영왕부로 걸음을 옮겼는데 모퉁이를 돌던 그는 그만 반대편에서 오던 이와 부딪쳐 등에 멘 약상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이고! 뭐 하는 게요!”

    의원이 꽥 소리를 지르자 갑작스레 나타난 상대방이 연신 읍을 하며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소, 미안하오.”

    그러나 의원은 바닥에 떨어진 약상자를 주우며 씩씩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 뭐가 들은 줄 아시오?! 약상자가 부서지면 당신이 물어줄 수나 있을 줄 아냔 말이오!”

    의원과 부딪쳤던 이는 사과를 했음에도 불편한 소릴 듣자 짜증이 올라왔다.

    “있어 봐야 먹으면 취한 것처럼 보이는 약이겠지, 그게 뭐라고.”

    그 소리에 의원이 깜짝 놀라 그를 붙잡았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소?! 설마 날 미행이라도 했소?!”

    그러자 상대가 황당한 듯 대꾸했다.

    “미행 같은 소리! 여기 오는 이들이 왜 오겠소? 서영왕이 백금을 주고 약을 산단 소식에 몰린 것이지! 거 직접 보시오!”

    그의 손에 끌려 모퉁이 밖을 보게 된 의원은 서영왕부 앞에 용처럼 길게 이어진 기다란 줄을 보고 몹시 놀랐다.

    “이, 이게……?”

    “저들이 전부 당신처럼 약을 들고 온 자들이오.”

    그는 의원이 붙잡고 있던 손을 툭 풀어내곤 코웃음을 쳤다.

    “서영왕부가 호락호락할 줄 알았소?”

    * * *

    “어이가 없군, 어이가!”

    정사당에서 누군가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아들 생각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넘어가도, 이런 소동까지 일으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이오? 지금 도성에서 의원 노릇 하는 이들이며 약관의 학도 할 것 없이 다 서영왕부 앞에 줄을 섰소! 이게 민심을 흐트러뜨리는 게 아니고 뭐겠소!”

    원 재상은 방방 뛰는 그를 흘긋 보곤 여느 때와 같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쩌겠소? 서영왕부에서 그런 약물을 찾는다고 공고를 낸 것이 죄는 아니잖소?”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강직한 성정으로 이름이 나 있던 재상 하나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빨리 판결을 내리는 게 좋겠소! 사건이 마무리되면 저들도 더는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곧장 형부와 대리시에 서신을 보냈다. 그렇게 정사당이 채근하자 형부와 대리시는 사건을 결론지었다. 서영왕세자가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 임창백 가문의 정 공자를 죽였다는 결론이었다.

    처결을 요청하는 상소는 금방 황제에게 올라갔고 상소를 본 황제가 물었다.

    “서영왕세자가 죽인 것이 확실한가? 실수는 없었나?”

    형부상서가 심사숙고하며 대답했다.

    “사건 현장과 증거를 보면 그리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옵니다. 서영왕세자 또한 자신이 무고하다는 증거를 보이지 못한지라…….”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신은 의견이 다르옵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형부상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제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루안, 설 상서의 말이 틀렸다는 것인가?”

    “아니옵니다. 설 상서께서 하신 말씀엔 틀린 바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신은 그 역시 추론일 뿐,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기에 서영왕세자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을지도 모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무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건을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큰 문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사옵니다.”

    “그럼…….”

    황제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 돌연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저놈의 헛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시옵소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는…….

    ‘엥? 북양왕이잖아!’

    ‘왜 온 거야?’

    ‘가만히 있다가 제 아우랑 또 한 판 하려고 나선 건가?’

    북양왕 루혁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혁의 얼굴을 본 루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중요한 이야기 중인데 북양왕께선 무슨 짓입니까? 조정에서 난동을 부리시는 것입니까?”

    루혁은 거침이 없었다.

    “네 녀석도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본왕이라고 못할 게 무어냐?”

    그리고 그는 앞으로 나서 황제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폐하, 이자가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사옵니다. 무고를 하게 되면 큰 문제가 된다니요, 듣기 좋게 떠들긴 했지만 실은 서영왕에게 뇌물을 받고 저리 나선 게 아니겠사옵니까!”

    루혁이 던진 돌에 조정 전체가 술렁거렸다.

    ‘설마! 굳이?’

    ‘최근 서영왕이 여기저기 줄을 대려고 하긴 했어도 누가 그 돈을 받아!’

    ‘사건이 만수절에 벌어졌으니 분명 폐하께 판결을 주청하는 상소가 올라올 텐데, 그 돈을 받고 일을 어찌 해주려고?!’

    ‘하지만…… 루안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형부에 있을 적에도 자주 뇌물을 받지 않았던가? 지금은 폐하께서 더욱 그를 신뢰하고 계시니…….’

    신하들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루안이 곤란에 처할 것으로 보이자 기분들이 둥실 좋아진 것이다.

    ‘평소에 그렇게 건방을 떨더니, 제 친형에게 뒤통수를 맞게 생겼구먼?’

    ‘어떻게 수습하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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