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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60)화 (260/385)
  • 260화. 약강강약

    ‘서영왕을 쓰러뜨려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

    고민과 함께 양의 혀로 만들어진 꼬치를 질겅대며 지온은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처음엔 길거리를 다니며 음식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서아도 계속하다 보니 얼굴이 두꺼워져 이젠 지온보다 더 신나게 먹어댔다.

    “아가씨, 메추리알 좀 드셔보세요! 엄청 신선해요!”

    메추리알 꼬치를 받아 든 지온이 맛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네.”

    그렇게 계속 먹고 있던 두 사람 앞에 갑자기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둘이 고개를 들어보니 얼굴 여기저기가 꽃밭처럼 울긋불긋한 한등이 꼭 거간꾼처럼 마차에 앉아 두 사람을 향해 웃고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잊었던 지온이 이내 꼬치를 훑어 마지막 남은 메추리알을 손에 쥐고는 꼬치를 버렸다.

    “서아야, 우리 놀다 가자.”

    “아가씨 타시지요.”

    한등은 지온이 안으로 들어와 앉을 수 있도록 바지런을 떨며 마차 천막을 걷어 올렸다. 그녀가 들어가 앉자 한등은 이번엔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서아를 바라보았다.

    “누님 이쪽으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서아가 한등을 밀쳤다.

    “멀리 떨어져 앉아! 제대로 운전이나 하란 말이야!”

    마차 안에서 사건 문서를 보던 루안은 갑자기 지온의 얼굴이 나타나자 웃음을 지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그의 입속으로 메추리알이 쑥 들어왔다.

    “맛있죠?”

    메추리알을 금방 먹어버린 루안은 빙긋 웃으며 저를 보고 있는 지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저에게로 당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한등이 마차를 몰기 시작하는 바람에 사건 문서가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중심을 잃은 두 사람 역시 하나가 되어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세요, 공자님?”

    급히 말을 멈춘 한등이 마차 천막을 걷었다.

    한 덩이가 된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서아와 한등은 순간 놀라 몸이 굳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한등이 얼른 천막을 다시 치더니 수습하듯 소리쳤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계속하십시오!”

    한등이 말을 재촉하며 채찍으로 궁둥이를 찰싹찰싹 때렸고, 그 바람에 막 중심을 잡고 다시 앉으려던 루안과 지온은 또다시 넘어져 몇 바퀴를 더 굴러야 했다.

    “…….”

    ‘한등 녀석, 평소엔 바보 같은데 이럴 때만 꼭 눈치가 좋군.’

    어렵사리 다시 중심을 잡아 지온을 일으킨 루안은 어차피 흔들리는 마차에 굳이 지온과 따로 앉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넘어질 수도 있잖아? 그럼 안 되지.’

    그때 루안의 품에 안겨 있던 지온의 손이 그의 허리를 더듬었다.

    “…….”

    고개를 숙여 잠시 지온을 바라보던 루안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만지고 싶은 것이오?”

    당황한 지온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제가 무엇을 들은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루안의 입꼬리가 위로 걸렸다. 성마른 웃음을 짓던 루안의 손이 천천히 제 허리띠를 풀었다.

    “만지고 싶으면 알려주시오.”

    루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루안에게 잡힌 지온의 손이 슬금슬금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드는데, 오소소 소름이 돋은 지온이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점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손끝에 섬세한 복근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지온의 내면 속 ‘소심한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게 지금 뭐하는 건데! 이 사람이 뭐에 씌였나? 밀어내도 모자를 판국에 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된 거지?’

    곧 만져선 안 될 그것에 손이 닿을 찰나, 드디어 지온의 입에서 소리가 터졌다.

    “꺅!”

    곧바로 손을 쑥 빼낸 그녀가 얼른 제 뒤로 손을 숨기자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린 루안이 금방 옷을 정리하고는 다시 허리띠를 맸다.

    루안은 이제 그녀를 알 것 같았다.

    ‘약강강약이로군.’

    다른 이가 약하게 나오면 그녀는 강해진다. 그러나 다른 이가 강하게 나오면 금방 움츠러드는 것이다.

    루안은 뒤로 움츠러든 작은 그녀의 손을 끌어 쥐었다.

    “앞으로 또 그러겠소?”

    지온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자 루안은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3개월만 기다리시오.”

    그 말에 지온이 고개를 쑥 들었다. 그녀가 반박했다.

    “내가 언제 조급해했어요? 전혀 조급하지 않다고요!”

    “정말?”

    “정말이고 말고요!”

    “그럼 내가 조급하다면 어쩌겠소?”

    너무도 적극적인 그의 말에 지온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 그럼…….”

    루안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농이요.”

    마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 멈췄다. 곧이어 한등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마차 안으로 들려왔다.

    “고, 공자님,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차 마시러 나갈 테니, 가실 때 불러주세요!”

    그러더니 한등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서아를 데리고 바람처럼 멀어졌다.

    마차 천막을 걷은 루안이 먼저 내려 지온을 부축해 내려주었다.

    주변을 둘러본 지온은 그제야 그곳이 대나무 숲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것은 숲 깊은 곳에 안개가 희끗거린다는 거였다.

    “여기가 어디죠?”

    “당신도 왔던 곳이오. 별원 뒷산.”

    루안을 지온을 이끌어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기온이 따뜻해지더니 어느 순간 계절에 맞지 않는 꽃과 풀들까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더 걷자 지온의 눈앞에 수증기를 뿜어 올리는 작은 온천이 나타났다. 지온은 몹시 놀랐다.

    “온천이에요?”

    루안이 빙긋 웃었다.

    “좋소?”

    추운 계절에 온천이 싫다면 그야말로 황당한 소리 아니겠는가?

    신을 벗은 지온은 곧장 온천에 발을 담갔다.

    “후우…….”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던 지온은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도성 교외에 온천이 있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루안도 그녀처럼 신을 벗고는 온천에 발을 담그며 대답했다.

    “근처에 온실이 있소.”

    “아!”

    그제야 지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겨울에도 파종할 수 있는 지역이라면 땅속에 불길이 있다는 뜻이었다.

    루안이 손을 뻗어 지온의 손을 쓸었다.

    “이제 추위를 타지 않는 것 같소. 전엔 겨울만 되면 잔뜩 웅크려 잘 움직이지도 않았잖소.”

    지온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추위를 많이 타던 옥종화였다. 상해는 무척 따뜻한 지역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겨울을 힘겨워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다. ‘지온’이 되며 발견한 것이, 비록 ‘지온 소저’가 무공 실력은 하찮을지 몰라도, 몸 하나는 무척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잠시 그렇게 온천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던 지온이 물었다.

    “요즘 바쁘죠?”

    “그렇소.”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루안의 시선은 물을 첨벙대는 지온의 발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조정에서 매일 다툼이 벌어지는 바람에 나와 형님이 문제를 일으킬 틈도 없소.”

    지온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길거리에서 싸운 것으로 부족해요?”

    “한 번밖에 안 되니 만족이 될 리가 없지.”

    그리 말하며 루안이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가져가 노시오.”

    지온이 열어보자 안에는 진주가 들어있었다. 전부 비슷한 크기의 진주였지만 색깔은 희귀한 금색이었다.

    ‘이 한 주머니만 해도 가치가 엄청나겠구나.’

    “어디서 났어요?”

    “그날 길거리에서 싸우고 얻은 것이지.”

    지온이 웃었다.

    “그랬군요.”

    대화의 주제는 곧 서영왕세자로 바뀌었다.

    “진짜 흉수를 찾을 순 없나요?”

    루안이 미소를 지었다.

    “서영왕세자가 한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오?”

    지온은 순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내가 언제 그랬소?”

    지온이 마차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마차에서 보던 그거, 이 사건 문서였잖아요? 진짜 서영왕세자가 한 일이라면 당신이 그렇게 시간을 쏟고 있지 않겠죠.”

    루안이 웃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지온이 물었다.

    “내 도움이요?”

    “물어볼 것이 있어서. 혹시 사람이 먹으면 술에 취한 것처럼 느껴지고 그 후엔 기억이 소실되는 약물이 있겠소?”

    무애해각에 있던 수많은 잡서를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학생들은 과거를 보려고 모든 시간을 과거 시험 과목에만 쏟았다. 오직 그녀만이 유일하게 욕심껏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루안은 그녀가 모른다면 아마 아는 이를 찾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가만히 고민하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느끼게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소실된다니, 쉽지 않네요.”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로군. 맞소?”

    지온이 방긋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해보죠.”

    지온의 웃음을 본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오늘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끝낸 루안은 온천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앙증맞은 그녀의 발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툭 건드렸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루안이 재빨리 겉옷을 벗어 지온의 다리 위에 덮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북양왕, 루혁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면 소리를 냈어야지!”

    루안이 성질을 부리자 루혁은 온천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깔깔 웃어댔다.

    “내 별장에 오면서 굳이?”

    “지금은 내 거잖아!”

    “큭큭…….”

    루안의 반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루혁의 시선이 지온에게로 향했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 소저.”

    지온은 일어나 예를 갖추고 싶었지만, 발을 온천에 담그고 있었던 터라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곤란해하는 것을 본 루혁은 제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아! 곤란해할 것 없네. 내가 가면 되니까.”

    루혁이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지온이 물었다.

    “왜 오신 거죠?”

    두 사람의 심장을 다 떨어뜨리며 등장해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다니?

    루안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당신을 보러 온 것이겠지.”

    “아…….”

    지온이 말했다.

    “당신 형님은 전과 비슷하시네요.”

    루안이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변할 리가 있겠소?”

    루혁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두 사람은 자리를 정리했다. 신을 신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두 사람은 근처 야시장에 있는 유흥가에 들러 연극을 보았다. 그리고 술시(戌時)가 지날 때쯤, 루안이 지온을 데려다주었다.

    지온이 조방궁으로 돌아가자 한등이 물었다.

    “공자, 돌아가실 겁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루안이 입을 열었다.

    “왕부가(王府街)로 가자.”

    “네”

    * * *

    깊은 밤.

    서영왕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잠을 이루겠는가? 제 아들인 서영왕세자는 여전히 옥에 갇혀 앞날이 불투명한데!

    서영왕의 심복 막료가 말했다.

    “전하,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이는 분명 저희 서영왕부를 겨냥한 일입니다!”

    미간을 가득 좁힌 서영왕은 한참을 서성이다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린 조정과 싸울 것이야!”

    “싸우면 또 뭐가 된단 말입니까? 설마 이대로 세자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으실 작정입니까?”

    서영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까진 아닐 것이네.”

    그러나 막료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들이 이대로 풀어줄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독한 수까지 써가며 세자의 목숨까지 해치려고 했겠습니까?”

    할 말이 궁색해진 서영왕이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서영왕부는 북양왕부 같지 않네. 서남의 상황은 지금까지 안정된 적이 없어. 만약 이대로 조정과 척을 진다면 앞으로 우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견제까지 당하게 되겠지. 세자 하나를 위해 서영왕부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그리 많은 이들을 저희가 찾아갔지만 보낸 선물을 받은 이가 누구 하나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이번 일이 제대로 해결이 안 될 것 같으니 저들이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전하, 저희가 상황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다 생각지 마십시오. 저들이 이 지경까지 저희를 몰아붙인 것입니다!”

    계속되는 막료의 설득에 서영왕은 크게 흔들렸다.

    지금의 세자는 그의 유일한 적자(嫡子)였다. 그런 세자가 도성에서 죽게 된다면 왕작의 계승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남까지 동요하게 될 것이 뻔했다.

    서영왕은 후회했다. 성의를 보이기 위해 특별히 아들까지 데려왔는데 그 결정이 황천길로 향하는 결정이었다니!

    고민 끝에 세자를 석방하라고 조정을 압박하기로 한 그가 막료에게 서신을 전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 서신이 왔습니다.”

    멈칫한 서영왕이 물었다.

    “누가 보낸 것이더냐?”

    “걸개(乞丐)입니다. 다른 이의 부탁을 받고 왔다 합니다.”

    걸개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연락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서영왕이 얼른 손을 내밀었다.

    “이리 가져오거라.”

    서신은 간단했다. 서영왕은 단 한 줄이 전부인 서신을 읽고 도로 접어 넣었다.

    “가세.”

    막료가 급히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전하?”

    얼굴을 덮고 있던 고민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진 서영왕은 다시 기운을 차린 모습이었다.

    “사람을 하나 만나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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