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59)화 (259/385)
  • 259화. 여기저기 퍼진 소문

    정 공자 익사 사건으로 만수절 연회는 어수선하게 막을 내렸다.

    대장공주와 함께 궁을 나선 지온은 마침 궁 문 앞에 있던 루안을 보게 되었다.

    루안은 형부(刑部)의 관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지라 지온과 그는 스쳐 지나가며 눈인사만 나눴다.

    조방궁에 돌아온 두 사람의 얼굴색에 매고고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무슨 일이세요?”

    “저희 일은 아니에요.”

    지온이 얼른 나서서 해명했다.

    “다른 이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지온이 정 공자가 익사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매고고는 연신 나무아비타불을 외웠다. 그러던 매고고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가씨와는 관련이 없는 일입니까? 무슨 일을 벌이신 건 아니겠지요?”

    그 말에 지온은 웃음이 터졌다.

    “고고께선 어쩜 어머니와 똑같으세요? 일이 생겼단 말을 듣자마자 바로 제가 한 것이란 생각부터 하시다니요.”

    대장공주 역시 웃음이 터졌다.

    “요것아! 네가 해온 짓이 있지 않으냐?”

    침중했던 분위기가 일거에 사라지자 대장공주와 매고고는 지온에게 은근히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청옥과 함옥을 위해 나섰던 그때 말이다, 그때 이미 본궁까지 염두하고 일을 벌인 게지?”

    매고고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때 전 이미 아가씨께 이용당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어린 소녀가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나쁜 마음으로 그리한 것도 아니란 생각에 밝히지 않았을 뿐이지요. 다만 아직 한 가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뭔가?”

    “선대 태자께서 꿈에 나오셨단 이야기만큼은 아직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장공주와 매고고의 시선이 지온에게로 모였다.

    대장공주와 매고고는 당시만 해도 한 점 의심 없이 지온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태자가 꿈에서 전했다는 그 말이 주변 사람은 알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보게 된 지온의 모습은 어딘지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뭔가 신묘한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지온이 피식 웃음소릴 흘렸다.

    “거짓이에요.”

    지온의 대답에 두 사람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장공주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찌 알게 된 것이야?”

    “선대 태자 전하를 뵌 적이 있습니다.”

    지온의 대답에 대장공주와 매고고, 두 사람은 순간 멍해졌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가 어찌 태자를 봤단 말이냐?”

    두 사람은 개미와 범의 관계만큼이나 상관없는 존재들이었을 텐데!

    “스승님을 따라 천하를 유람하며 상해에도 갔었거든요.”

    대장공주와 매고고의 시선이 부딪혔다. 두 사람의 얼굴에 기함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네가…….”

    지온이 고개를 주억였다.

    “나비를 불러들였던 그 방법은 정말 어머니를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 맞습니다.”

    대장공주는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그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운명. 이것이야말로 운명인 게지.”

    대장공주가 지온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촉촉해진 미소였다.

    “분명 태자가 널 내 곁으로 보내준 것이야.”

    * * *

    “한제 오라버니, 이곳입니다!”

    지온이 손을 흔들자 그녀를 본 한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입에 고기를 넣고 있던 지장은 그제야 한제를 향해 공수했다.

    “한 형님.”

    한제가 지장을 향해 예를 갖추려 하자, 지장이 얼른 그를 끌어다 앉혔다.

    “모두 가족인데, 그리 예를 차리실 게 무엇입니까?”

    한제가 머쓱하게 웃었다.

    지장이 이번에 과거에 합격한 새로운 거인이란 것을 알게 된 후로 한제의 존경심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나보다 몇 달이나 어린데도 벌써 거인이라니!’

    거기다 강현 선생을 스승으로 두고 있지 않은가? 여강 대인께도 가르침을 받았을 정도니, 그야말로 진정한 공부의 신이 아니겠는가!

    “오라버니, 어서 드세요.”

    지온이 한제에게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빨리 안 드시면 지장 오라버니께서 다 드시겠어요.”

    지장은 바삐 우물거리면서도 지온에게 말까지 걸었다.

    “누가 들으면 너는 안 먹는 줄 알겠구나! 얌전하게 앉아서는 나보다 더 빨리 먹고 있으면서!”

    “제가 언제요? 오라버니, 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리 대화를 하는 사이 지온은 이미 고기 한 판을 끝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자극을 받아 한제도 계속 입으로 고기를 집어넣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먹고 있는지 생각지도 못하고 열심히 먹던 그는, 배가 불러 트림을 꺼억하고 난 후에야 제가 도착하고 내내 먹기만 했단 것을 깨달았다.

    “지온아…….”

    젓가락을 놓은 지온이 꽉 찬 배를 문지르며 점소이에게 차를 내오라 하고는 한제를 향해 물었다.

    “정보가 있나요, 오라버니?”

    한제가 지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리 보니 제 외사촌 동생이 그동안 생각하던 소저가 아닌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어…… 그래, 찾았다.”

    “어떻던가요?”

    “호숫가에 미끄러진 흔적을 발견했다. 그래서 정 공자가 떠밀려 물에 빠졌단 게 확실해졌고 서영왕세자가 그 바로 옆에 엎어져 있는 바람에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정보는 형부(刑部)에서 일을 시작한 한 노야의 서재에 몰래 들어간 한제가 찾아온 것이었다.

    지온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사건이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네요.”

    지온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한제는 알지 못했다.

    “왜 그리 말하는 것이냐? 서영왕과 네 가문 사이에 연이라도 있는 것이냐?”

    지온이 손을 내저었다.

    “변방을 수호하는 번왕인 서영왕과 제 가문이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그런데 왜 서영왕을 그리 생각해주는 것이냐?”

    “그야 서영왕세자가 살인사건에 휘말리면 문제가 커지니까요.”

    그 말에 가만히 생각하던 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구나. 서영왕세자에게 죄를 물어야 할지 말지를 두고 형부에서도 아직 의견의 통일을 보지 못했으니.”

    지온이 식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외숙부께선요?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백부님께선 당연히 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사람이 죽지 않았느냐? 서영왕세자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으니, 실수로 그랬을 가능성이 커서 벌이 가벼울 순 있어도, 벌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의견이 주류겠군요.”

    “하지만 이 사건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지온의 대답에 마주 대꾸하던 한제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서생 무리가 우르르 올라오더니 그들 옆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술을 마셨다고 죄가 없어질 수 있나?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정 공자도 별로 좋은 인간은 아니었잖나? 요 몇 년간 일으킨 물의가 몇 개인가? 노래 파는 가희를 희롱하질 않나, 화괴를 두고 싸움을 벌이지를 않나, 들은 것만 해도 셀 수가 없네.”

    “그래도 그게 죽을죄는 아니지 않아? 몹쓸 짓을 하긴 했지만, 그게 법에 저촉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네.”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호감인 인간이 아닌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란 말이네. 오히려 단박에 목숨을 앗아간 서영왕세자의 손속이 얼마나 잔인한가? 여긴 도성일세. 감히 도성에서도 저러는데 서남이었으면 어땠겠나?”

    “당연한 소리. 서영왕이 변경을 수호하지 않는가? 실권을 쥐었으니 그 손에 수십만 병력이 있는 것이지. 바람도 불라 하면 불고, 비도 오라 하면 온다 이 말이란 말일세. 그러니 사람 목숨 정도야 우습지 않겠나? 부족 전체를 멸절시키는 것도 문제없지. 사람 죽여 놓고도 당당한 서영왕세자 좀 보게. 딱 봐도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게지.”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아무리 서남쪽 끝이라도 이 나라에 속한 것을!”

    “우리도 여기서나 이렇게 떠들 수 있지, 서남에 가면 석씨 가문 말이 법이지 않겠나.”

    “서남에서야 그렇겠지만, 도성에서 일어난 일이니 뭐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서영왕세자가 이대로 아무 벌도 받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뭐라 떠들겠는가?”

    “우린 이렇게 구시렁거리기나 할 수 있을 뿐이지. 조정에 계신 대인들이 어찌 생각하는 지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겠지.”

    의견이 분분한 서생들의 이야기에 한제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 

    ‘사건에 대한 소문이 이렇게나 빨리 퍼지다니.’

    한제가 지온과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려 그녀를 보았을 때 이미 지온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지온이 입을 열었다. 

    “역시 문제가 생겼네요.”

    * * *

    난택산방.

    지온은 팔락팔락 서책을 넘기며 매고고가 올리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조정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폐하의 만수절에 일을 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대부분은 서영왕세자를 벌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임창백이 제 가문 장정들을 대동해 서영왕부 문 앞에서 닭 피와 분뇨까지 뿌려대는 통에 소동이 큽니다.”

    “그 이야기만 나오던가? 다른 말은 없고?”

    대장공주가 왜 그런 것을 묻는지 파악하지 못한 매고고가 되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서영왕세자 이야기만 나오고 서영왕부에 대해 말하는 이들은 없는 것인가?”

    “아직 때가 아니지 않겠는지요?”

    지온이 대답했다.

    “지금 서영왕부에 화살을 쏘기엔 시기상조입니다.”

    매고고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내심 읊조렸다.

    ‘모녀로 맺어진 이유가 있는 게지. 머리 회전이 어찌나 빠르신지!’

    그때, 궁인이 북양태비가 찾아왔단 소식을 전했다.

    북양태비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끝났네, 끝났어! 설마 우리 가문까지 불똥이 튀는 건 아니겠지?”

    대장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벌써부터 뭘 그리 시끄럽게 구는 게야! 불똥이 튀거들랑 말해.”

    “그땐 이미 늦지!”

    북양태비가 물었다.

    “봉접,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조정에서 번왕들을 없애려는 게 아니냐?”

    대장공주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런 소릴 이리 대놓고 묻는단 말이냐?”

    “내가 대놓고 묻지 않으면 어쩌겠느냐? 어차피 위에 앉은 분이 네 친조카도 아니지 않느냐?”

    당당한 북양태비의 대답에 대장공주는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가슴만 쓸어내렸다.

    “조정에서 번왕을 처리하기 가장 좋았던 시기는 내 조부이신 현종황제께서 재위에 계실 때였지. 그땐 태종 폐하와 인종 폐하를 거치며 나라가 눈부시게 발전하여 국력도 강했었다. 정해왕이 사라진 시기가 바로 그때였지. 하지만 그 후로 자연재해와 인재가 겹쳤고 갈수록 나라가 어려워져, 내 오라비인 선제께서 황위에 오르셨을 땐 이미 그 어지러움이 극에 치달았다. 더구나 북방 다른 민족의 세도 최근 들어 점점 커지고 있는데 루씨 가문이 동란을 일으키면 문제가 될 게야. 그러니 지금은 번왕을 처리할 상황이 못 돼.”

    대장공주가 가릴 것도 없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자 도리어 어리둥절해진 것은 슬쩍 떠보고 분위기나 알아보려던 북양태비였다.

    “봉접…….”

    대장공주가 자조하듯 웃었다.

    “네 말처럼 그분이 내 친조카도 아닌데 내가 고민할 게 뭐가 있겠느냐? 저들이 내 사람의 목숨을 앗을 때 어디 내 생각을 했다더냐?”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던 대장공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음 놓긴 이르다. 내 오라비께선 루씨 가문의 충심도 알고 치세를 어찌 가져가야 하는지도 알고 계셨지만, 저쪽 가문의 멍청이는 그걸 모르니 말이야. 그걸 알았으면 3년 전에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그런 짓’은 북양왕을 암살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북양태비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침묵에 잠겼다.

    그때 잠시 생각에 빠졌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저쪽은 온통 권력을 쟁취할 생각뿐이지요. 번왕을 쳐내는 것까진 아닐 수 있으나 문제를 이렇게 빨리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면 공의가 아닌 사익을 위해 서영왕부를 어찌해보려는 게 맞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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