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58)화 (258/385)
  • 258화. 뭔가 잘못됐다

    오작과 다른 이들이 도착해 모두 편전으로 들었을 때, 임창백의 친족들은 전보다는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였다.

    눈물을 줄기줄기 흘리는 임창백의 부인과, 초점 없는 눈을 한 임창백을 그들의 자녀들이 둘러싼 채 연신 눈물을 닦으며 다독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신지는 내심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정 공자가 방탕한 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부모는 얼마나 아꼈겠어.’

    “대인!”

    그들이 들어오자 임창백은 마치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부상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위로했다.

    “상심이 얼마나 크시오? 우린 정 공자를 살피러 왔소이다.”

    시뻘건 눈을 한 임창백이 살기가 등등한 채로 입을 열었다.

    “막내의 원통함을 풀어주십시오, 대인! 그 아이를 해친 범인은 반드시 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게. 사심 한 톨 없이 법으로 처리할 것이네.”

    대답한 대리시경이 오작을 향해 눈짓하자 그들이 앞으로 나섰다.

    검시를 한 오작이 보고를 올렸다.

    “대인, 익사입니다.”

    “다른 상처는 없느냐?”

    오작이 다시 한번 자세히 보고를 올렸다.

    “옷이 찢어지긴 했으나 몸의 상처는 찰과상 한 곳이 전부였습니다.”

    사인이 명백해졌다. 정 공자는 누군가 물에 떠밀어 익사하게 된 것이다.

    임창백이 말했다.

    “어제 아들은 석씨 가문 녀석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것에 원한을 품고 오늘 이런 짓을 벌인 게 틀림없습니다!”

    “술을 마셨는가?”

    유신지의 질문에 오작이 시신의 입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술 냄새가 많이 나는 것으로 보아 꽤 마셨을 것입니다.”

    상황이 서영왕세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신 상태로 다툼이 벌어지자, 서영왕세자가 순간 충동적으로 임창백의 아들인 정 공자를 물에 밀어 빠뜨렸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신에 가까이 다가간 루안이 정 공자 시신의 손을 확인했다. 손에는 수초와 진흙뿐이었다.

    사인에 의심점이 없고, 용의자는 술을 마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젠 증거를 찾아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은 사건 현장을 찾아가 확인했고, 다른 관졸들은 시위에게 여러 증언을 확보했다. 물 흐르듯 진행된 사건 조사에서는 크게 의심스러운 부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유신지가 몰래 루안에게 물었다.

    “아직도 의심하고 있나?”

    “그래.”

    루안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사건 정황은 정 공자가 물에 빠져 익사한 게 확실해. 궁녀도 멀리서 봤다고 하고 시위도 소리를 듣고 가보니 서영왕세자가 물가에 있었다고 했지…… 앞뒤가 딱 맞아.”

    “그렇지, 앞뒤가 딱 맞지.”

    다른 생각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루안의 대답에는 성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유신지는 기분이 나빠졌다.

    “뭐가 의심스러운데? 내게도 말하지 못하나?”

    루안이 한숨을 푹 쉬더니 설명했다.

    “정 공자의 시신에 나 있는 다툼의 흔적이 너무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나?”

    “그러니까 루안 네 녀석 말은, 두 사람이 싸운 것치고는 상처가 너무 없다 그 말이지?”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세상엔 온갖 일들이 우연히 벌어지지 않나. 정황상 당연해 보이는 일도, 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왕왕 있지. 이를테면 두 사람이 물가에 있었는데 정 공자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뒤로 밀려 물에 빠졌을지도 몰라. 그럼 다툼의 흔적 같은 건 남지 않을 수 있지.”

    “그런 일도 분명 있을 수 있지.”

    루안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계속 의심을……?”

    “직감.”

    루안이 대답했다.

    “누군가 나를 위협하리란 직감 때문이지. 난 이로 인해 뭔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 말을 듣자 유신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서영왕세자의 불운이 루안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랑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인마!’

    * * *

    대화를 나누고 서영왕 부자가 있는 편전 옆 건물로 이동하던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부자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네?! 제가 정 공자를 물에 빠뜨렸단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서영왕세자의 목소리였다.

    “이 아비는 네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믿지만, 눈에 보이게 드러난 상황만 따져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정 공자는 익사했고, 그 현장에 네가 있었다. 더구나 어제 넌 정 공자와 다투기까지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서영왕의 말에 서영왕세자가 대답했다.

    “아버지, 제가 그 일은 해명하지 않았습니까? 어제 일은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저도 제가 어쩌다 그렇게 술에 취하게 됐는지 알 순 없으나, 정 공자가 소녀를 괴롭히고 있기에 말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 공자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아직도! 내 너더러 그리 신중하라 일렀는데, 어찌 그리 술에 취했단 말이냐! 어찌 루 통정이 직접 널 데려오게 만들어!”

    서영왕세자도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도, 도성의 술이 이렇게 독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집에서도 이 정도 양은 자주 마셨는데, 어쩌다가…….”

    그때 밖에서 듣고 있던 루안이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두 번…….”

    그 소리에 유신지가 물었다.

    “뭐가 두 번인데?”

    루안이 물었다.

    “자네는 도성의 술이 독한 것 같나? 오늘 술이 독했는가?”

    유신지는 고개를 저었다. 도성 사람들은 달콤하게 입안을 휘도는 술을 좋아하지 않던가? 그래서 도성의 술은 정말 도수가 높지 않았다. 특히나 황제까지 계시는 오늘 같은 연회는 취기로 인해 실수할 것도 고려하기 때문에 더욱 도수가 높지 않은 술만이 준비된다. 그래서 어린 소저들도 연회에 나온 과일주를 많이 마시지 않았던가?

    루안과 유신지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뭔가 잘못됐다.’

    유신지는 고민스러웠다.

    “누구지? 누가 서영왕에게 이런 큰 원한을 가진 거지?”

    루안이 대답이 없자 유신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을 이렇게 여러 번 취한 상태로 만드는 약물이라니, 재밌네. 내가 이 대인께 당장 조사하시라 전하지.”

    그러나 루안이 유신지를 제지했다.

    “아니, 가지 말지.”

    유신지가 루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뭔데?”

    “지금 가서 말하면 흉수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유신지가 흠칫 놀랐다.

    * * *

    멀쩡히 잘 진행되던 만수절에 돌연 이런 변고가 났으니, 올랐던 흥이 식은 모두는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온이 연회자리로 돌아가자 대장공주는 아예 지온을 붙들고 물었다.

    “너와 관련된 건 아니지?”

    지온이 고개를 저으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것입니까, 어머니? 정 공자가 물에 빠진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으려고요?”

    “내 녀석에게 온갖 일들이 벌어지니 그런 것이지 않느냐. 범상찮은 일 중에 너와 관련이 없었던 적이 드물었다. 더구나…….”

    더구나 정 공자는 그녀와 악연이 있다면 있기도 하지 않던가!

    지온은 저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과거의 일은 과거일 뿐, 저는 과거 일을 들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제 분수를 모르고 덤벼든다면 나도 깔끔하게 처리해버리겠지만요.’

    그런 생각을 하는 지온의 시선이 옥비에게로 향했다.

    “없으면 다행이다.”

    지온을 붙들었던 손을 놓은 대장공주가 말했다.

    “가서 놀거라. 우린 이 일에 끼지 않을 것이야.”

    지온은 다시 소저들이 모인 뒤쪽으로 돌아갔다.

    경소소는 그 사이 소저들에게 제가 본 것을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었다. 시신을 본 적 없는 어린 소저들은 심장이 콩알만 해져 저들끼리 딱 붙은 채 비명까지 질러대고 있었다.

    지온이 경소소를 툭 치며 말했다.

    “그만해, 괜히 놀라게 말고.”

    편전 안에 있을 임창백의 가족들을 떠올리니 지온은 내심 탄식이 나왔다.

    ‘제 집안사람들에겐 하늘 무너지는 듯 큰일인 삶과 죽음이, 다른 이들 눈엔 한낱 이야깃거리일 뿐이로구나.’

    할아버지께서 좋아하던 시에서 말한 그대로가 아닌가.

    ‘가족에게는 혹 슬픔이 남았으려나, 타인은 이미 잊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네…….’

    제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한 경소소가 지온을 끌고 가더니 작게 물었다.

    “언니, 서영왕세자가 진짜 정 공자를 물에 밀어 넣은 거면 어떻게 되는 거야?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거 아냐?”

    살인을 했으면 목숨으로 갚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그러기에는 서영왕세자의 신분이 범상치 않았다. 그 정도가 되면 다른 여러 가지 고려할 문제들이 생겼다.

    서영왕은 변경을 수호한다. 그런 왕세자의 목숨을 앗겠다 한다면, 서영왕의 가문인 석씨 가문이 그냥 받아들이겠는가?

    조정에서는 과거부터 실권을 가진 번왕에겐 다독이는 방법을 주로 택해왔다. 설령 명분이 이쪽에 있다 하더라도 서영왕세자가 도성에서 죽는다면 소요(騷擾)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벌을 내리지 않을 수도 없지.’

    황제의 만수절 연회에서 감히 술에 취해 실태(失態)를 한 것도 모자라 사람의 목숨까지 해쳤다. 그것만 해도 황제의 면을 상하게 한 것과 같았다.

    질문에 고민을 해봤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 * *

    오후가 되자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함께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오자 황제는 희멀겋던 얼굴에 다소 생기가 돌았다.

    “어찌 된 사건인지 밝혀졌나?”

    형부상서가 대답했다.

    “폐하, 오작이 시행한 검시로 임창백의 아들, 정 공자가 물에 빠져 익사한 것을 확인하였사옵니다. 서영왕세자는 술에 취하여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저희는 상황을 목격한 궁녀를 조사하였고,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던 시위들의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정 공자가 물에 빠졌을 당시 서영왕세자가 그 옆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서영왕세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단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겠는가?”

    대리시경이 대답했다.

    “폐하, 신은 당장 사건을 마무리하지 않았으면 하옵니다.”

    “오?”

    “임창백의 아들, 정 공자를 서영왕세자가 물에 빠뜨렸다는 것은 아직은 추측일 뿐이옵니다. 정확한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 없는 상황에 급하게 사건의 결론을 내린다면, 차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사옵니다.”

    황제는 피곤해졌다.

    ‘결국에는 이 사건을 계속 끌고 가야 한단 말이로구나.’

    “경의 말대로 한다면, 이 사건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대리시경이 제 의견을 보고해 올렸다.

    “다방면으로 조사를 벌여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증거를 수집해, 결론이 오판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하옵니다.”

    대리시경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 있던 다른 신하 하나가 입을 열었다.

    “폐하, 크게 복잡한 사건도 아닌데 그렇게 계속 끌고 가는 것은 도리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임창백은 자식을 잃었사온데 그에게 제대로 된 결론조차 내려줄 수 없단 말이옵니까?”

    그 말에 대리시경의 미간이 바로 좁아졌다. 그는 황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대꾸했다.

    “임창백만 제대로 된 결론이 필요하고, 서영왕에겐 필요치 않단 말인가? 만약 이 사건에 다른 내막이 있다면 서영왕세자는 무고하게 죄만 뒤집어쓰게 되는 게 아닌가? 무고는 작은 일이 아니네! 당연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단 말일세!”

    그러나 다른 신하는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 대리시경께서는 어찌 서영왕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가장 크게 의심할 만한 용의자가 그의 아들인 것은 맞지 않습니까?”

    “강력한 용의자라도, 그게 그가 범인이란 소린 아닐세.”

    대리시경이 차갑게 대꾸했다.

    “당연하게 그리 추론을 하는 걸 보니 월 대인은 아무래도 사건 문서를 많이 접해보지 않은 것 같군. 자네가 아무렇게나 떠든 말 한마디가, 상대에겐 목숨이 오가는 일일세! 목숨이 달린 일엔 아무리 신중을 기해도 모자라지 않음일세.”

    대리시경의 의견에 설득된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시경의 의견대로 하지. 사건은 형부상서와 대리시경, 두 곳에 맡기겠네. 한 톨의 의심도 남지 않도록 사건을 철저히 밝히게.”

    “그리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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