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57)화 (257/385)
  • 257화. 사건 성립

    황제의 낯빛은 푸르스름했다.

    그가 제위에 올랐던 첫해는 선제 때문에 만수절을 그저 구색만 맞추어 보냈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 역시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처음으로 제대로 만수절을 치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연회 중에 사람이 죽다니, 이 무슨 재수 없는 일인가!’

    하지만 임창백의 아들이 죽었으니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치미는 노기를 누르고 그를 위로했다.

    “임창백, 일은 유감이지만 우선 진정하고 자네 아들의 사인부터 조사하도록 하지.”

    그리고 신하들을 훑었다.

    ‘사건 조사는 형부나 대리시 사람을 찾는 게 좋긴 하지만, 내가 가장 신임하는 이라면…….’

    “폐하.”

    돌연 들려온 강왕세자의 음성이 그의 상념을 비집고 끼어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황제의 물음에 강왕세자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정 공자가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엔 서영왕세자가 있었지요. 이 일은 반드시 제대로 된 처결이 필요합니다. 만약 서영왕세자가 벌인 일이라면 임창백에게 제대로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고, 만약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라면 서영왕세자의 무고함을 밝혀야 할 테니, 둘 중 어떤 상황이든, 이 사건은 한 치의 소홀함 없이 엄중하게 해결해야 하지요.”

    강왕세자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서두를 꺼내는지 알 순 없었지만, 황제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강왕세자가 바로 말을 받았다.

    “폐하, 이 일을 조사하라고 명하시어 진상을 밝힐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강왕세자의 말에는 잘못된 것이 없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요. 그럼…….”

    말을 이르려던 황제는 돌연 말문이 막혔다.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는 것은 이 일을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되면 루안에게 조사를 명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황제는 강왕세자를 흘긋 보았다.

    ‘고의?’

    그러나 강왕세자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임창백과 서영왕에게 제 공정함을 보여 호감을 사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 사건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기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루안을 가장 신뢰할 뿐이지 다른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니 말이야.’

    황제가 입을 열었다.

    “형부와 대리시 두 곳에서 공동으로 사건을 맡아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진상을 밝혀 임창백과 서영왕 모두에게 제대로 된 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신, 명을 받드옵니다!”

    즐거운 자리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니, 황제의 기분도 말이 아니었다. 황제는 다시 연회 자리로 돌아갔지만 딱딱한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정 공자의 시신은 잠시 편전에 안치되었다. 임창백의 가족들은 큰 슬픔에 잠겼지만, 만수절 연회에 곡소리를 낼 순 없어 그마저도 못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누가 봐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할 만큼 불쌍했다.

    서영왕세자는 그 옆에 구금당했고, 취해 인사불성이 된 제 아들을 본 서영왕이 함께 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해주탕은?”

    형부상서가 묻자 급히 달려온 내시가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큰 대접으로 해주탕을 몇 사발이나 마시고서야 눈을 뜬 서영왕세자는, 여전히 눈이 풀려있었다. 정신이 얼마나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기엔 좋지 않았다.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서로 먼저 하라며 양보했지만, 결국 형부상서가 먼저 시작했다.

    “서영왕세자 전하, 본관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멍하니 형부상서를 바라보던 서영왕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형부상서가 제 옆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럼 혹 부친은 알아보시겠습니까?” 

    서영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여기가 어디입니까?”

    그러더니 그가 제 팔을 들어 올리며 축축하게 젖은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왜 다 젖었지? 누가 제게 물을 뿌렸습니까?”

    상황을 보던 두 대인은 서영왕세자에게 물어봐야 얻을 수 있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이어갔다.

    “세자 전하,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시겠습니까?”

    제 아들의 멍청한 표정에 가슴이 쪼그라든 서영왕이 다급하게 말했다.

    “명아, 잘 생각해 보거라! 어쩌다 폐하의 정원까지 간 것이냐? 아주 중요한 일이니 제대로 생각해 보거라!”

    원칙적으론 사건 조사에 친족이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되었지만, 오늘의 사건은 특별한 경우였으니 형부상서와 대리시경, 두 대인도 넘어가 주었다.

    그렇게 여럿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서영왕세자였지만 대답은 별것이 없었다.

    “저, 저는 그저 술이 과해 잠시 걸으려고…….”

    “누굴 만나지는 않았느냐?”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던 서영왕세자가 이윽고 대답했다.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영왕세자는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을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 두 분이 뉘신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제가 혹시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까? 죄송합니다, 황궁의 술이 사람을 이리 쉽게 취하게 할 줄 예상치 못하여…….”

    그 말에 서로를 마주 본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서영왕세자가 어제 정 공자와 다툼이 있었다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인사불성으로 취하기까지 하였으니, 두 사람은 서영왕세자를 정 공자처럼 음주가무를 즐기며 놀기 좋아하는 방탕한 공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것을 들으니 상당히 예의 바르지 않은가?

    ‘상황도 모르고 날뛰는 공자 같진 않아 보이는데…….’

    서영왕이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아들 녀석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지만 그런 짓을 할 아이는 절대 아니라네. 그러니 두 분 대인들이 꼭 우리 아이의 무고함을 밝혀주시게!”

    ‘서영왕세자에게 무척 불리한 상황인데 무고라니?’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대리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검시부터 하는 게 좋겠네.”

    형부상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오려는 서영왕을 막았다.

    “서영왕 전하, 임창백의 가족들이 감정이 격해져 있어서 전하를 뵈면 다시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상황이 이러하니 서영왕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연신 두 손을 모아 읍을 했다.

    “두 대인만 믿겠네. 뭐라도 나오면 바로 내게 알려주시게.”

    * * *

    루안은 다시 연회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혼란을 틈타 편전으로 향하던 루안은 미처 도착하기 전에 다른 이의 손에 의해 한쪽으로 끌려갔다.

    “네가 올 줄 알았지.”

    루안이 흘긋 보니 역시나 유신지였다.

    “여긴 왜 왔지?”

    “네가 하러 온 걸 나도 하러 온 것이지.”

    두 사람은 큰 눈을 게슴츠레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치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참지 못한 유신지가 먼지 입을 뗐다.

    “진짜 서영왕세자가 한 짓 같나?”

    “아닌지 맞는지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

    루안의 건조한 대답에 유신지가 입을 삐죽였다.

    “됐고! 내 앞에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어?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으면 자네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 아닌가?”

    루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신지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서 내 눈을 속이려고……. 빨리 솔직하게 털어놔!”

    입을 닫고 침묵하던 루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제 길에서 그 둘의 다툼을 봤다.”

    “정 공자와 서영왕세자?”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왕세자가 과하게 취해 있더군.”

    유신지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파였다.

    “서영왕은 아들을 도성까지 데려와서 제대로 단속하지도 못하고 뭐 하는 거냐?”

    황족과 성이 다른 왕이면서 실권을 쥔 번왕이지 않은가? 괜히 다른 이들에게 흠이 잡힐 수 있단 걸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북양왕, 루혁만 봐도 알 수 있지.’

    도성에 든 첫날 루혁은 루안과 싸움을 벌였다. 형제끼리 서로 고집을 부리다가 벌어진 일이었지만, 바로 다음 날 황제에게 온갖 상소가 올라왔던 것이다.

    “서영왕이 상황파악을 못 하는 사람 같지는 않더군. 어제 세자를 서영왕부에 데려다 줬을 때는 본인이 직접 나와 감사 인사를 했었다.”

    루안의 말에 유신지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저렇게 취할 때까지 왜 가만 놔둔 거지?”

    “나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고 있을 때,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옆에 있던 건물에서 나왔다. 루안과 유신지는 따로 두 사람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설 상서 어른.”

    “이 대리시경 어른.”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은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등장에 놀랐다.

    “두 사람…….”

    루안은 형부상서의 전 부하였고, 유신지는 대리시경의 현 부하가 아니던가.

    유신지는 의아해하는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제 상사에게 입을 열었다.

    “대인, 실례가 아니라면 하관도 직접 상황을 보고 싶습니다.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대리시경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황 파악이 빨라. 평소 일 하는 것도 믿을만한데, 도와주겠다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줄도 알고…….’

    “그러지. 이따 날 따라오게. 검시를 하지.”

    “예, 어르신.”

    유신지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루안을 향해 눈썹을 추켜세웠다. 루안은 그 모습을 못 본 척하며 조용히 형부상서의 지시를 기다렸다.

    사실 이미 형부를 떠난 루안은 형부상서의 부하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형부상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루 통정을 크게 의지하고 있으시지. 어쩌면 폐하께서 알아보라고 보낸 것일지도 모르겠군.’

    “루 통정, 자네도 도와주러 온 것인가?”

    형부상서가 빙긋 웃으며 묻자 루안이 대답했다.

    “하관이 마침 어제 우연히 세자를 만났습니다. 대인께서 사건을 해결하시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오?”

    형부상서가 기분 좋게 수염을 쓸었다.

    “무엇을 알고 있는가?”

    루안이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하고 나자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은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일이 좀 이상하군.’

    서영왕세자가 이틀을 연속으로 취했다는 것만 생각하면 그는 분명 방탕한 자였다. 하지만 조금 전 술이 깼을 때 질문과 답변하는 것을 봐서는 사리가 밝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원한을 맺었다는 건 확실해진 것이로군.’

    만약 이대로 서영왕세자가 이 사건과 무관하단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그는 죄를 벗기 어려울 터였다.

    임창백이든, 서영왕이든, 형부상서와 대리시경과 특별히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던지라 두 대인은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시하는 오작(*仵作: 과거 검시관을 이름)과 관련된 다른 이들이 이마에 땀을 훔치며 도착했다.

    축제와도 같은 만수절이라 다들 휴가를 받았었는데, 갑작스러운 소집에 입궁하게 된 것이다.

    ‘첫 입궁을 하자마자 살인사건을 맡다니, 불길하구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