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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56)화 (256/385)
  • 256화. 익사

    이 소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코웃음을 날린 경소소가 잔을 들고 지온 옆에 가 앉았다.

    “장기 언니, 저 자리 옮기는 거 괜찮죠?”

    반대할 이유가 없는 장기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경소소가 제 가슴을 팡팡 치며 지온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언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누가 언니를 욕하면 내가 다 욕해줄게!”

    장기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누가 너한테 덤비겠니…….’

    이 소저도 그렇지, 현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완씨 가문은 이제 헛기침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신세였다.

    ‘딱 봐도 권세가 전과 같지 않은데 왜 계속 거기에 붙으려는 건지, 참…….’

    지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지온을 공격한 이 소저는 경소소에게 미운털만 잔뜩 박힌 채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소저들이 거기서 다른 문제를 일으킬 리가 없으니, 다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흥미가 있는 이들은 곁에서 한두 마디 거들었을 뿐이고 관심이 없는 소저들은 그저 저와 친한 자매들과 속살거리기 바빴다.

    재잘재잘, 즐거운 연회가 이어졌다.

    지온이 온 직후, 옥비는 이미 지온을 신경 쓰고 있었다.

    대장공주와 지온의 더없이 친근한 모습부터 장기와 즐겁게 대화를 하는 모습, 경소소가 그녀를 비호하는 것까지 지켜보던 옥비는 질투심을 느꼈다.

    지난번 조방궁에서 사실상 자신을 도운 지온 소저였지만, 옥비는 그녀를 떠올리면 사방전에서 유유자적 차를 우리던 지온 소저의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 자세, 그 표정…….’

    옥비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저 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잘 나가는 거지?’

    대장공주와 경씨 가문뿐 아니라 눈이 저 하늘 구름 끝에 달린 귀족 소녀들이 저리 쉽게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떤가?

    ‘옥종화가 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상념에 여념이 없던 그녀를 추아가 갑자기 툭 쳤다.

    “마마!”

    옥비가 고개를 들자 황후가 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황후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옥비, 요즘 자주 아프다더니 어디 좋지 않은 겐가? 몸이 좋지 않거든 일찍 돌아가 쉬는 게 좋겠네. 괜히 참고 있다가 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지.”

    옥비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신첩은 괜찮습니다. 여러 좋은 구경을 하다 보니 잠시 정신이 없었을 뿐입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네.”

    황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태후와 연회에 오른 구경거리를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

    * * *

    연회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잔도 세 번쯤 돌았겠다, 연회의 객들도 다소 풀어진 모습을 보였지만, 기분이 좋았던 황제는 딱히 사람들의 풀린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리를 바꾸어 앉거나, 저들끼리 모여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이들이 나왔고, 어떤 이들은 자리가 너무 멀다며 공연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서기도 했다.

    술이 다소 과했던 경소소는 답답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는지 옷을 갈아입겠다며 지온을 데려갔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난 경소소가 거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나 얼굴 좀 빨갛지 않아?”

    “이제 알았어?”

    지온이 대답했다.

    “그렇게 말렸는데 계속 술을 마셨잖아. 취하면 안 돼. 경 백모님께 혼나잖아.”

    “맛있는 걸 어떡해! 오늘 나온 과일주는 궁에서만 맛볼 수 있는 거란 말이야. 달고 입에 착착 감겨서 밖에서 마시는 시큼한 맛이 없어. 우리 집에도 매년 상으로 내려주시는데, 새 눈곱만큼이라 마셔봐야 감질만 나.”

    지온은 비뚤어진 그녀의 허리띠를 손보며 말했다.

    “그게 뭐 어렵다고.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과일주에 나는 시큼한 맛을 빼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다음에 조방궁에 올 때, 시큼하지 않은 과일주 담그는 법을 알려줄게. 그럼 앞으로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실 수 있을 거야.”

    “와!”

    경소소가 지온을 와락 껴안았다.

    “언니,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다 알아? 그거 비방 아니었어? 어디서 알게 된 건데?”

    지온이 빙긋 웃었다.

    “스승님을 따라 동서남북, 사방을 돌아다녔잖아. 어쩌다 알게 된 거지.”

    두 사람이 재잘재잘 떠들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아닌가? 그 사이에 비명까지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 생겼나?”

    경소소가 확인을 하듯이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설마 불이라도 난 건가?”

    “그건 아닐 거야.”

    지온이 말했다.

    “낮이라 초를 켜두지 않았을 테니, 불이 났을 가능성은 낮아.”

    금방 제 옷차림을 정돈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섰다. 경소소가 밖을 지키고 있던 궁인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 묻자 궁인이 대답했다.

    “소인은 살려달란 소리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누군가 물에 빠진 것 같습니다.”

    지온과 경소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두 사람의 눈 속엔 의혹의 빛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연회가 열린 곳 근처에는 사람이 빠질 만한 물이 없을 텐데?’

    소란이 점점 커지자 경소소는 제 인내심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지온을 잡아당겼다.

    “언니, 우리 가보자.”

    * * *

    두 사람이 소란스러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누군가를 들쳐 멘 시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뒤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시위 몇이 금관에 비단옷을 입은 소년을 제압해 끌고 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졌다는 사람을 본 지온은 몹시 놀랐다.

    “언니, 왜! 왜 그래?”

    경소소가 묻자 지온의 입이 열렸다.

    “저기, 저 사람 임창백의 막내 공자 아니야?”

    경소소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은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정 공자를 지켜보던 경소소가 물었다.

    “살아 있는 거지?”

    지온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아. 물에서 사람을 건져내면 바로 숨을 쉴 수 있도록 먹은 물을 토하게 구급조치를 했을 텐데 지금까지 눈도 못 뜨고 있는 걸 보면……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지온과 경소소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연회장 쪽에서 사람 몇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임창백의 가족들이었다.

    정 공자의 모습을 본 임창백 부인이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하자 어린 소저들이 그녀를 둘러싼 채 소리를 질렀다.

    임창백은 그대로 정 공자에게 달려들었다.

    “아들아! 일어나 보거라! 어서 일어나 봐!”

    그러나 정 공자가 미동조차 없자 임창백은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임창백의 입에서 비명 같은 처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들아! 눈을 떠 보거라! 눈을 떠 아비를 보거라! 어서! 어서!”

    곁에 있던 시위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대인…….”

    차라리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시위가 건넨 위로의 말에 임창백이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다.

    “안 죽었어! 내 아들은 죽지 않았다고! 감히 저주하지 말란 말이다!”

    시위가 도와달라며 임창백 가문의 대공자를 바라보자 대공자가 앞으로 다가와 제 아비를 부축하듯 붙들었다.

    “고정하십시오, 아버지! 일단 태의를 기다려 보는 게 좋겠습니다! 태의!”

    대공자의 말에 다행히 임창백은 진정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태의는 금방 도착했다. 정 공자의 맥을 잡아보고, 눈도 뒤집어 보던 태의가 가슴에 손을 올려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송구하오나 막내 공자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달리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었던 임창백에게는 기폭제와 같은 말이었다. 임창백이 펄쩍펄쩍 뛰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막내가 어딜 간단 말이냐! 제대로 본 것이냐? 제대로 봤어?!”

    “아버지!”

    임창백의 맏아들인 정씨 가문의 대공자가 죽을힘을 다해 그런 그를 붙잡았다.

    “고정하세요, 아버지! 고정하세요!”

    대공자가 임창백을 말리는 사이 서영왕이 도착했다. 그는 시위들의 손에 붙들린 소년을 보자마자 대번에 얼굴색이 달라졌다.

    “명(銘)아! 이제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너희들은 왜 이 아일 붙잡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시위가 차갑게 대답했다.

    “서영왕 전하, 저희가 정 공자께서 물에 빠지셨던 현장에서 서영왕세자 전하를 마주쳤는데 두 분의 신체에서 서로 다툰 흔적을 찾았습니다.”

    비록 확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있던 대다수는 시위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서영왕세자가 정 공자를 밀어 물에 빠뜨린 바람에, 정 공자가 익사한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럴 리 없다!”

    서영왕이 소리쳤을 때 임창백이 들입다 달려들었다.

    “서영왕! 우리 가문이 당신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어찌 아이들끼리의 다툼에 이렇게 악독한 수를 쓰십니까! 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방심한 서영왕은 잠시 임창백에게 붙들렸지만, 시위가 두 사람을 떼어놓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정 대인, 진정하시게! 우리 명이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닐세! 상황은 유감이나 우선 진정하고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떤가?”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임창백이 차갑게 웃었다.

    “말 한 번 편하게 하십니다! 본인 아들이 죽은 게 아니니 그렇겠지요! 어젯밤에 제 아들이 찾아와 서영왕세자와 다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별생각 하지 않고 들었는데 이런 사달이 나다니요! 겨우 그 정도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던 것입니까!”

    처절한 고함을 지르던 임창백은 황제가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달려가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폐하! 부디 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경소소는 간이 컸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을 본 일은 없었던지라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지, 지온 언니…….”

    “괜찮아.”

    지온이 그녀를 붙잡고는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어쩌다 사람이 죽었을까?”

    경소소가 답답한 듯 말했다.

    “폐하의 생신날이잖아! 연회에서 사람이 죽다니, 얼마나 불길해!?”

    “그렇지.”

    지온의 심각한 표정을 본 경소소가 물었다.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일이 너무 이상한 것 같아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이상하다고?”

    “응. 호숫가는 여기서 꽤 먼 곳에 있었어. 그런데 정 공자와 서영왕세자 두 사람이 모두 호숫가에 갔잖아? 그리고 그냥 봐도 서영왕세자는 취기가 올라 정신이 맑은 상태가 아니고 말이야.”

    지온의 말에 경소소가 말했다.

    “아까 들어보니까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던데, 호숫가에서 만나 풀려고 했던 거 아닐까?”

    지온이 경소소를 흘끔 바라보았다.

    “경험이 많아 보이네?”

    마른 웃음을 지어 보이던 경소소는 드디어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서영왕세자가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았는데, 실수로 정 공자를 호수로 민 것 아닐까?”

    “알 수 없지.”

    그 어떤 증거도 없으니 지온도 제대로 추측하기 어려웠다.

    “높으신 분들이 많으니 다들 어떻게 이야기하시는지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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