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미움 산 사람이 있으신지요?
편전으로 돌아온 능양진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쩍 갈라질 듯 굳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꽃이 어찌 시들어!”
제자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그중 수제자가 잔뜩 겁에 질려서 입을 열었다.
“스, 스승님! 제가 조방궁을 떠나기 직전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꽃들은 멀쩡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 몇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맡고 있던 화분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제가 맡은 꽃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마차에 올랐던 것이다.
지온은 따로 가져온 화로수(花露水)로 벌을 몰아 내보내고는 화분에 있던 흙을 세세히 살폈다.
“능양 사숙, 여기 이것 좀 보시지요. 이건 누군가 뭔가를 뿌린 흔적이 아닙니까?”
지온의 말에 다가온 능양진인이 손으로 흙을 조금 집어 냄새를 맡았다. 흙에선 무언가 부패한 듯한 시큼한 냄새가 났다.
과연 누군가 화분에 약을 친 것이다!
제자들은 대경실색했다.
“스승님! 조방궁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절대 화분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만수절에 진상할 물건이라 저희 모두 무척 신경을 써서 확실합니다!”
“그럼 조방궁 밖에서 누군가 약을 쳤단 말인가요?”
지온이 묻자 제자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꽃에서 눈을 뗀 적이 있었나요?”
제자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쳤다.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떠올랐다.
지온이 미간을 좁혔다.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니 다른 이의 손이 닿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나 보군요.”
그러자 제자 중 하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시인했다.
“제, 제가 조금 전에 뒷간에 다녀왔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치더니 곧 달달 떨며 입을 열었다.
“저도…….”
“저는 뒷간은 가지 않았지만, 밖에서 악인(*樂人: 악사, 악공, 악생, 가동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만났습니다.”
‘그럼 황궁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네.’
지온이 능양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능양 사숙, 혹시 황궁에 미움 산 사람이 있으신지요?”
능양진인은 백방으로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없다! 궁에 들어와서는 경을 강의하는 일을 해서 다들 내게 친절한 사람들뿐이다. 궁녀나 내시들과도 척을 진 일이 없어!”
“아, 아니요, 스승님…….”
능양진인의 제자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미움 산 분이 한 분 있으시잖아요.”
능양진인이 제 제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지? 난 왜 기억이 안 나느냐?”
제자가 대답했다.
“궁녀나 내시에게 미움을 사시진 않았지만, 그들의 주인에게 사셨잖아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능양진인이 제 소매를 와락 말아 쥐었다.
‘그래! 그랬었지!’
자신이 어쩌다 이리 다시 일어날 기회를 노리며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던가! 시킨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궁의 불만을 사는 바람에 뒷배를 잃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다고?”
능양진인이 중얼거렸다.
“마마시라면 바로 날 징계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단 말이냐?”
지온이 능양진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사숙, 영수궁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능양진인은 지온을 흘끔 보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능양진인이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알겠다는 말이냐?”
지온이 빙긋 웃었다.
“만일 오늘 정말 일이 벌어졌다면 저희 모두 구금되었겠지요? 그렇게 되면 제 양어머니 되시는 대장공주마마께서 제가 곤란에 빠진 것을 그냥 보고 계셨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사숙까지 구명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때 누군가 나타나 사숙을 구해준다면 사숙은 그분께 목숨까지 바치지 않겠습니까?”
* * *
옥비는 대전 앞에서 조방궁 사람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과주를 한 모금 마셨다.
“기운이 없어 보이십니다, 옥비 언니(*후궁들끼리 사석에서 서로의 품계의 고저에 따라 언니, 동생으로 부르기도 했음).”
제 뒤에 앉은 미인(*美人: 후궁의 품계 중 하나) 하나가 옥비의 얼굴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옥비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말을……. 폐하의 생신이 얼마나 큰 길일인데 그리 말하는가, 고 동생.”
고 미인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금방 제가 잘못했다 말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옥비는 제 등 뒤에서 오가는 대화 소리를 들었다. 품계가 낮은 다른 후궁 중 하나가 고 미인에게 말했다.
“뭘 그리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총애도 다 잃었잖아요! 그래놓고 아직도 저리 뻣뻣하긴!”
“그렇게 말하지 마, 동생. 옥비 언니는 우리보다 품계가 높으시잖아. 당연히 예의를 갖춰야지.”
그러자 다른 미인이 차갑게 웃었다.
“언니, 옥비가 다시 총애를 회복할까 싶어 걱정되어 그러는 거죠? 그럴 리가 있겠어요? 폐하께서 벌써 한 달이 넘도록 거의 신경도 안 쓰고 계신데. 폐하께서도 질리신 거겠죠.”
고 미인은 짧게 웃었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다른 미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외양으로 봐도 궁에 더 잘난 이들이 몇 명인데요? 능력이 출중하다더니 그래봤자 서예나 쓰고 차나 좀 우리는 거잖아요? 이상하죠? 옥씨 가문의 소저가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데, 실제로 보니 겨우 저 수준이라니.”
옥비가 제 잔을 꾹 움켜쥔 순간, 옆에서 시중을 들던 추아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마마!”
추아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호되게 혼쭐을 내주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옥비가 그녀를 제지했다.
“마마!”
추아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마마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리잖아요, 정말 너무해요! 겨우 미인 주제에 저리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그러나 옥비는 덤덤했다.
“금벽이도 아직 회복하지 못했는데 너까지 문제가 생기면 어찌하느냐.”
추아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황후 쪽에서 불만스러운 듯 이쪽을 바라보자 옥비가 나지막이 말했다.
“표정을 수습하거라. 좋은 날이니 웃어야지.”
추아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야지. 잔을 채우거라.”
“네, 마마.”
담담한 표정의 옥비는 편안한 얼굴로 다른 이들이 웃으면 함께 웃었고 다른 이들이 손뼉을 치면 함께 손뼉을 쳤다.
황후에게는 선물을 진상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부지런히 이어졌다. 신비는 뒤로 빠져 있었고 류 첩여 주변은 북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웃음이 났다.
‘총애받지 못하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과연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사라지는 덧없는 것이었구나.’
그동안 겪어본 적 없던 온갖 문제가 전부 자신을 찾아오고 있었다.
‘이런 곳이 후궁이란 곳이구나!’
역시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
‘조금 전 그 일이 아쉽다…….’
진상품 진상이 끝나자 금방 연회가 시작되었다. 황실 종친들과 권세가 사람들, 문무백관들은 음주가무와 함께 연회를 즐겼다.
내시를 따라 대전 안으로 든 지온이 대장공주 곁에 앉자, 대장공주가 그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찌 된 게야?”
“능양사숙께서 실수를 하셨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그러며 지온은 대장공주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대장공주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이야기하는 게 곤란한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구먼.’
옆에 있던 수안군주(壽安郡主)가 그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모녀 사이가 어쩜 그리 좋은 것입니까?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리 가까이 붙어서는…….”
고개를 모로 틀며 수안군주를 바라본 대장공주가 웃었다.
“평생 자식 연이 박했던 본궁이라 홀로 고독하게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이리 착한 딸을 얻게 됐으니 아끼고 말고요.”
수안군주가 놀리듯이 웃었다.
“그리 살갑게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시니, 우리 장기가 다 제게 서운해합디다.”
“어머니!”
수안군주 옆에 앉아있던 서정후부의 셋째 아가씨, 장기가 제 어미를 불렀다. 그러자 수안군주가 호호,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내내 지온 소저를 찾지 않았느냐? 마침 이리 만났으니 어린 소저들끼리 가서 놀다 오세요.”
장기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방긋 웃으며 지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온 동생, 함께 앉자.”
서정후부의 셋째 아가씨인 장기는 칠월칠석에 지온을 피서(避暑) 명목으로 초대했던 소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탐색해보려던 것이었지만.’
지온은 그 후로 그녀와 딱히 관계를 쌓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부르는 건 과한 친한 척이 맞았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저리 살갑게 다가온 사람을 거절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지온은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어나서 예를 갖추고는 장기와 뒤쪽으로 옮겨갔다.
뒤쪽엔 전부 또래 소저들이 모여 있었다.
지온을 붙든 장기가 지온을 위아래로 연신 살피더니 칭찬을 늘어놓았다.
“세심하기도 하지. 옷이 정말 선녀 같잖아! 안 그래, 양칠 동생?”
그러자 장기와 친한 소저 몇이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아까 바람 불 때는 진짜 선녀 같았잖아! 지금 다시 보니 옷차림도 법도에 크게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온 언니, 옷은 어떻게 수선하신 거예요?”
“옷감도 특별한 것 같은데? 주(綢) 비단도 아니고, 금(錦) 비단도 아닌 것 같은데 어쩜 이렇게 부드럽고 가볍지? 어디서 사신 건가요?”
“여기 청색과 백색을 같이 수놓은 게 꼭 가슴에만 두르는 가사(袈裟) 만들 때 사용하는 방법 같지 않아요?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무척 특이하잖아요.”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도복 위에 놓는 수를 평범한 옷에 놨을 뿐이에요.”
그리고 지온은 옷의 어느 부분을 수선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며 옷감의 출처 역시 함께 알려주었다.
지온의 주변에 있는 다른 소저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돌아가면 바로 해봐야겠네요. 그래도 너무 초탈한 느낌이 있으니 옷 색은 바꿔야겠어요.”
“저는 사숙과 함께 와서 도문의 제자처럼 보여야 했지만, 평소에 입으시려면 다른 분들은 색을 좀 더 화려한 것으로 선택하시고 이곳에 있는 팔괘와 태극 모양을 빼면 될 거예요. 가슴에 두르는 가사도 색을 좀 더 밝게 하시고요.”
옷 이야기로 열을 올리던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벌써 다들 저 사람과 친하게 지내려 하는 건가요? 다들 벌써 완 언니는 다 잊어버렸냐고요!”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미간을 찌푸린 장기가 누가 한 소린지 알아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이 소저, 이 일이 완 소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완 소저는 지온이 처음 입궁했을 때 그녀를 비웃었다가 지온에게 호되게 역공을 당한 소저였다. 완 소저는 그 후로도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장기가 별장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지온을 밀어 물에 빠뜨렸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지온에게 또다시 당해,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옷이 찢기는 수모를 겪었다.
그 날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완씨 집안에서는 완 소저를 시집보냈다.
그 일을 언급하자 장기는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이 초대한 지온을 두고 완 소저가 못된 수작을 벌였다는 건, 자신까지 괴로운 일에 휘말리게 만든 게 아니던가!
‘자승자박을 한 게 다 드러났는데, 누구더러 잘못했다는 거야, 지금?!’
이 소저란 소녀가 길길이 화를 냈다.
“저 여자가 아니면 완 언니가 그렇게까지 비참해졌겠어요!”
장기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 경소소의 목소리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이 소저, 지금 완 소저가 억울하게 당했다고 말하는 건가? 내 기억으로 유민이가 그때 모두 앞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설명을 해준 것 같은데. 그 일들, 완 소저가 못된 마음을 먹고 온이 언니를 물로 떠밀었다가 생긴 일이었잖아? 완 소저를 그렇게 불쌍하게 생각하는 걸 보니, 설마 이 소저는 완 소저가 한 일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럼 앞으로 이 소저랑 같은 장소에 있긴 어려울 것 같아서.”
경소소의 비꼼이 폐부를 깊숙이 찔렀는지, 이 소저는 입술까지 떨며 분노했다.
하지만 그녀는 경소소에게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 경소소는 귀족 소녀들 사이에서 소달의 아들마저 때릴 수 있는 정의의 사도로 통했다.
‘그렇게 맞고 사람이 바보가 됐다던데 경소소는 아무 일도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