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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54)화 (254/385)
  • 254화. 조방궁의 선물 진상

    한 바퀴 돌고 나자 드디어 조방궁 차례가 되었다.

    능양진인이 웃음을 머금었다.

    “사질, 가세.”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앞선 두 사람의 뒤를 붉은색 비단으로 포장한 화분을 든 열 명이 넘는 제자가 따랐다. 그들은 줄지어 정전으로 향했다.

    정전 앞에 선 제자들이 화분을 내려놓자, 능양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생신을 경하드리옵니다! 조방궁에서 열두 달의 화령(花令)을 준비하였사옵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회랑 아래 앉은 작은 나라의 사절은 화령(花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절이 옆에 있던 내시에게 어색한 대순말로 물었다.

    “열두 달의 화령은 무엇입니까?”

    미소를 머금은 내시가 대답했다.

    “본국에는 꽃으로 달을 나타내는 전통이 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모든 달을 대표하는 꽃이 있지요. 일월은 매화가 향을 품고, 이월은 살구꽃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삼월은 도화가 흐드러지며, 사월은 목단이 홀로 화려하지요. 이것이 열두 달의 화령입니다. 모든 달을 대표하는 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절이 놀라 물었다.

    “그럼 저 여인들이, 제각기 다른 계절에 피는 열두 가지 꽃을 진상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시가 내심 우쭐대며 말을 이었다.

    “조방궁은 강양공주께서 지으신 궁관입니다. 지금은 여양대장공주께서 관리하고 계시지요. 조방궁은 화신(花神)마마를 모시고 계십니다. 화초라면, 조방궁에서 길러내지 못하는 종이 없습니다.”

    내시의 말을 들은 각국의 사절이 다들 놀랐다.

    ‘제국이 대단하구나, 꽃 피는 계절도 아닌데 꽃을 피우다니.’

    사의(司儀)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허락하노라!”

    능양진인과 지온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무릎을 꿇고 화분을 포장한 붉은 비단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 내렸다.

    붉은 포장이 풀어진 순간, 함께 축하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이들 모두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본래 미소를 띠고 있던 능양진인의 얼굴이 꽃을 본 순간 얼음이 된 듯 굳었다.

    의아해하는 사절의 목소리가 울렸다.

    “꽃이 왜 다 떨어졌습니까?”

    열두 개의 화분에 피어있던 꽃들 중 반 이상이 이미 떨어져 있었다.

    능양진인은 당황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게야?!’

    아침에 온실에서 꽃을 내올 때 자신이 검사했을 때만 해도 멀쩡하게 피어있던 꽃이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두 시진 밖에 안 되는데, 어쩌다 꽃이 다 시들었단 말인가!

    ‘이럴 수가 없는데?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이처럼 많은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폐하께 다 시들어버린 꽃을 진상하다니, 불경을 저지른 게 아닌가!

    ‘조방궁 전체가 화를 입을 것이야!’

    생각을 거듭할수록 능양진인의 머릿속은 더욱 꼬이기만 하여 도무지 해결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지금 용서를 빌면 너무 늦은 것인가?’

    난데없는 상황을 지켜보던 대장공주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가 못된 수를 쓴 겐가?’

    능양진인은 지체 높은 이들을 앞에선 언제나 행동을 조심스레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조방궁에서 나섰을 땐 분명 멀쩡한 꽃이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궁에서 누군가 손을 쓴 게야?’

    그러나 지금은 원인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 사태를 원만하게 넘어갈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대장공주가 운을 어떻게 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

    돌연 들려온 음성이 있어 보니 지온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담담한 얼굴로 전(殿) 앞에 선 지온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폐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올해 폐하께 올릴 진상품은 시간이 조금 필요하옵니다.”

    그러자 곧이어 전 안에서 사의(司儀)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진상할 수 있도록 해보라.”

    이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였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절들도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실수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지온이 웃으며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혔다.

    “그리하겠사옵니다.”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능양진인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찌하려는 것이냐?”

    지온이 침착하게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시든 꽃들을 이리 가져오세요.”

    “네.”

    시들어 떨어진 꽃송이가 지온 앞에 모였다. 지온은 거침없이 꽃잎을 뜯어내더니 손에 올려 두 손을 비볐다.

    능양진인이 옅게 퍼지는 꽃향기를 맡으며 의혹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꽃잎을 충분히 비빈 지온이 꽃잎을 다시 제자들에게 건넸다.

    “화분에 뿌리세요.”

    “네.”

    꽃잎은 화분으로 떨어졌고 지온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뭘 기다리는 게야?’

    차츰 흐르는 시간에 누군가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뭘 기다리는 것인가? 이러다 만수절 연회의 길시(吉時)를 놓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먼.”

    그 말에 다들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다들 여기서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뒤에 진상품을 올릴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소리치는 음성이 들렸다.

    “저길 보시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서 우글우글, 무언가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회랑 아래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저게 뭐지?”

    “벌! 꿀벌 같습니다!”

    “정말 많습니다!”

    벌떼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던 지온의 심장이 그제야 편히 뛰기 시작했다.

    벌을 보기엔 이미 너무 추운 날씨였지만, 그녀는 황궁의 온실에서 벌을 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벌을 불러들일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벌떼는 화분을 향해 날아가더니 꽃턱잎에 앉았다.

    “폐하.”

    지온이 대전을 향해 선 채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신 후로 여러 불온한 말들이 있었사옵니다. 선제께서는 재위하시던 스무 해 동안 높은 인덕과 백성을 아끼는 애민의 마음으로 사해에 그 이름이 높으셨사옵니다. 그리고 슬하에 두신 태자께서도 덕(德)과 재(才)를 모두 갖추셨고, 품행이 고결하시었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을 때까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실 분이 폐하가 될 것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지요…….”

    지온의 발언에 대전 안팎이 뒤집혀 술렁였다.

    문무백관과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왕후 귀족들이 놀라 지온을 쳐다보았다.

    ‘조방궁이 미쳤나?’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게 된 연유를, 뒤에서 몰래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저리 면전에 대놓고 말하다니?’

    ‘저 말이 황위가 본래 폐하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폐하의 따귀를 친 것과 뭐가 다르냔 말이다!’

    다시 모두의 시선이 대장공주에게로 돌아갔다.

    ‘설마 이 모든 게 대장공주마마의 안배인가?

    ‘일부러 폐하를 곤란하게 하려고?’

    ‘굳이?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더구나 공주마마도 이미 모든 권력에서 멀어졌는데 폐하와 척을 져봐야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용상에 앉은 황제는 미간을 좁힌 채 대장공주를 보았다.

    그러나 대장공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한 모습도, 그렇다고 비웃는 표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우리 온이가 저리 말을 꺼냈어도, 난 저 아이가 이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 생각하며 대장공주는 과주까지 마시는 여유를 보였다.

    “대인!”

    루안은 회랑에 자리가 배치되어 앉아있었다. 루안 옆에 있던 고찬은 지온의 말에 대경실색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어서 지온 소저를 말리셔야지요! 이러다 폐하께서 진노하기라도 하시면…….”

    “끝까지 들어라.”

    루안이 덤덤히 그의 말을 끊자 고찬은 입을 뻐끔거리긴 했지만 뒷말을 꿀꺽 삼켰다.

    ‘대인께선 지온 소저를 맹목적으로 믿으시는구나.’

    “……그러나 세상사란 이 꽃처럼 덧없는 것이옵니다. 해 뜰 땐 화려하게 피었던 것이, 정오를 지나니 이리 시든 것처럼 말이옵니다. 선대 태자께서 그리 세상을 떠나심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고, 선제 폐하께서 붕어하심에 천하가 통곡하였사옵니다. 하오나 비통의 시간 끝에 남겨진 이 거대한 제국은 누군가 계속 이끌어 가야 했사옵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옵고, 그러했기 때문에 천명(天命)이옵니다.”

    지온이 옆으로 비키며 그녀 뒤에 있던 열두 종 꽃을 다시 내보였다.

    “꽃은 졌으나, 새로운 꽃턱잎이 남아있사옵니다. 떨어진 꽃은 한때 제가 소유했던 춘광(春光)을 앗아갔다며 남은 꽃턱잎을 원망하지 않사옵니다. 꽃잎은 흙으로 들어가 생의 기운을 가진 봄의 흙이 되어 이 꽃턱잎을 자라게 하고 또 키울 것이옵니다. 벌을 불러들여 새롭게 틔울 꽃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대(代)에서 대(代)로 이어지는 계승이옵니다. 꽃은 떨어졌을지 모르오나, 계승은 영원히 단절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황제의 마음은 마구 흔들렸다.

    ‘짐의 정통성을 위해 비유를 드는 겐가? 듣기는 좋다만, 다른 이들의 귀에도 그리 들릴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황제는 대장공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폐하, 본궁이 조방궁에 잠거(潛居)했던 지난 3년간, 밖에서 우매한 소릴 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제 폐하와 선대 태자께서 그리 떠나고 본궁 역시 비통함에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온이가 말했듯, 세상사는 덧없는 것이에요. 이미 떨어진 꽃을 어찌하겠습니까? 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라버니께서는 평생을 정무와 애민에 힘쓰셨습니다. 황제로서 심혈을 다하였지요. 그리 사셨던 오라버니께서 임종 전에 이 천하를 폐하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니 본궁은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앞으로 폐하의 뒷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본궁과도 척을 지게 될 것입니다!”

    대장공주는 마지막에 힘주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전 안팎에 앉은 모든 이들을 훑고 지나갔다.

    황제는 그제야 이해했다.

    논리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발언한 이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지온이 말했을 땐 다들 주워섬기듯 들을 뿐이었지만, 발화자가 대장공주라면 무게가 달라졌다.

    ‘고모님께선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일을 벌이셨구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 누가 그를 놓고 뒷말을 하겠는가? 제대로 세워진 황제가 아니라서, 그가 고모님을 조방궁으로 몰아냈다고 누가 떠들 수 있겠느냔 말이다!

    황제는 감격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슴마저 벅차올랐다. 제 술잔을 채운 황제가 대장공주를 향해 술잔을 들었다.

    “조카의 정통성을 위해 나선 고모님의 마음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짐은 선제의 유지를 계승하여 이 나라 대순을 불멸토록 이을 것입니다!”

    대장공주가 화답하듯 잔을 들었다. 그녀가 공손한 태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만수무강하시어 대순의 보좌를 영원불멸 이어가소서!”

    그러자 황실 종친들과 왕족들, 훈귀 귀족들과 문무백관 모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었다.

    “만수무강하시어 대순의 보좌를 영원불멸 이어가소서!”

    그 모습을 보던 사절들은 때를 놓칠세라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축하를 이었다.

    대전 안팎에 자리잡고 있던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의 손에 들린 잔이 단번에 비워졌다.

    황제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쉰 지온이 재빨리 제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화분을 가지고 물러나란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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