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53)화 (253/385)
  • 253화. 황궁으로

    만수절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지온은 소세를 한 뒤에 옷을 갈아입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되어 난택산방으로 향했다.

    지온을 본 대장공주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되니 뭐든 잘 어울리는구나.”

    능양진인과 함께 가게 된 지온은 일부러 도가에서 입는 도복과 무척 비슷한 옷을 입었다. 머리에 관만 없다 뿐, 대충 보기엔 다른 선고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옷차림에도 그녀의 미색은 여전히 눈길을 끌었으니 예쁜 게 죄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지온이 미소로 화답했다.

    “어머니, 저는 능양사숙과 같은 마차로 움직이면 되겠지요? 기도가 끝나면 다시 어머니를 찾아뵙겠습니다.”

    대장공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거라.”

    준비를 끝낸 행렬이 조방궁 밖으로 이어졌다.

    이미 조방궁 입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능양진인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대장공주마마를 뵙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온을 향해서도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사질.”

    지온 역시 웃으며 예를 갖췄다.

    “능양사숙. 오늘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능양진인이 그 무슨 말이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게 웬 말인가. 폐를 끼칠 데가 어딨다고…….” 

    마차에 오를 때까지 능양진인은 조심하기 바빴다.

    ‘저것이 왜 내게 이렇게 예를 갖추는 것이지? 다른 뜻이 있나?’

    그러나 지온은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마차에 머리를 기댄 채 쉬기 바빴다.

    * * *

    이윽고 마차가 황궁 앞에 다다랐다.

    대장공주 덕분에 그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능양진인이 할 일은 무척 간단했다. 만수절 연회가 시작하기 전에 조방궁에서 갖은 정성으로 키운 꽃을 올리고 길한 축사 몇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온은 그 옆을 따르기만 하면 됐다.

    마차가 멈추자 지온과 능양진인을 비롯한 조방궁에서 온 일행들이 내렸다. 내시가 그들을 편전으로 안내했다.

    자리가 자리다 보니 능양진인은 연회 중심에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지온도 덩달아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대접하는 어린 내시는 누구의 부탁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무척 친절했다.

    그는 손난로를 가져다주고, 계속 뜨거운 차를 내주고, 먹을 수 있는 다식까지 특별히 챙겨주었다.

    지온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연회에서 사람 응대할 일도 없으니 마음이 평온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온이 가만히 앉아있으니 밖에서 궁녀 하나가 찾아왔다.

    그녀는 슬쩍 안을 둘러보다가 지온이 이곳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웃으며 물었다.

    “혹 조방궁의 선고님 되시는지요?”

    지온이 일어나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속가 제자일 뿐이라 그런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아…….”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의 마마님께서 점을 보고 싶어 하셔서요.”

    능양진인은 자신이 점괘를 봐줄 수 있다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지만 궁녀가 한 발 더 빨랐다.

    “혹 소저께서 자리를 옮겨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능양진인은 도로 엉덩이를 붙이며 입을 삐죽였다.

    ‘어느 마마가 이렇게 보는 눈이 없는 게야? 나야말로 제대로 된 정통 진인이란 말이다!’

    지온이 웃으며 궁녀에게 대답했다.

    “삼생(三生)의 영광이지요.”

    * * *

    편전을 나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주변에 인적이 끊기자 궁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온 소저십니까?”

    “그렇습니다.”

    지온의 대답에 궁녀가 안도하며 웃었다.

    “저는 향설이라 합니다. 류 첩여 마마를 시중드는 궁녀지요.”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향설을 알고 있었다. 류명주가 궁인들의 마음을 사게끔 뿌린 돈도, 지온이 루안에게 부탁하여 궁으로 보내줬던 돈이었다.

    향설의 배경은 루안이 조사했었는데, 크게 의심되는 점이 없던 궁녀였다.

    향설이 지온을 데리고 긴긴 골목을 지난 끝에 두 사람은 아름다운 정원에 도착했다.

    회랑 아래서 지온을 기다리던 궁인이 향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인사했다.

    “향설 언니.”

    고개를 끄덕인 향설이 보고를 올리려고 할 때, 건물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향설이가 돌아왔느냐? 어서 들어오거라!”

    “네, 마마.”

    지온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향설이 말했다.

    “마마께서 찾으시던 선고를 모셔왔습니다. 이분께서 조방궁의 속가제자이십니다.”

    류명주는 거울 앞에서 단장하던 중이었다.

    짧은 한 달 사이, 그녀는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목구비는 예전의 그 이목구비였으나, 과거 그 이목구비 안에 녹아있던 조심스러움과 소심함은 사라지고 화려하고 고귀한 분위기가 넘쳤던 것이다.

    그녀는 오늘 무척 아름다웠다.

    거울 속에 나타난 지온과 눈을 마주친 그녀는 진심이 어린 미소를 보였다.

    “알겠네, 다들 나가봐.”

    “네, 마마.”

    궁인들이 모두 방에서 나갔다. 다른 궁인들 모두에게 일을 시켜 사람들을 전부 내보낸 향설이 홀로 문 앞을 지켰다.

    류명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온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지온 소저.”

    그 모습에 지온이 화들짝 놀라 얼른 그녀를 붙들었다.

    “마마, 이젠 옛날과 다릅니다. 신녀는 감히 마마의 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류명주의 대답은 달랐다.

    “인사를 올려야 하는 게 당연하지요. 지온 소저의 계획이 아니었으면 제게 이런 날이 있었겠습니까?”

    류명주가 그리 말하니 지온도 어쩔 수 없었다.

    “마마의 감사를 소중히 받겠습니다. 허나 오늘의 이것으로 끝내주세요. 다음엔 그저 마마이신 것입니다.”

    류명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지온에게 큰 도움을 받았었다.

    지온은 그녀가 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돈까지 보내주어 궁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는가.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올릴 기회가 어렵게 왔으니, 지온에게 소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은혜를 베풀어놓고도 은공을 자처하지 않는 사람은 관계를 맺기가 무척 좋았다.

    “마마, 궁에서 잘 지내고 계십니까?”

    지온이 묻자 류명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아주 좋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던가? 장락지의 화방에 오르던 이가 아니었던가! 류명주는 사람들이 부르면 부르는 대로 찾아가 노래로 마음에 여유를 찾아주던 사람이었다. 간혹 예의 모르는 이를 만나기라도 하면 고생하게 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비록 앞에서 뒤에서 온갖 구설이 나는 곳이 궁이라지만, 적어도 겉으론 무척 체면 있어 보이지 않는가.

    “황후마마께서 다소 냉담하긴 하시네만 그래도 괴롭히지는 않으시네. 신비마마께선 겉으론 성정이 좋아 보이시네만, 쉽게 곁을 내주는 분이 아니시네. 그래도 우리와 같은 눈으로 볼 수는 없겠지. 그리고 옥비마마께선…….”

    류명주가 잠시 머뭇거렸다.

    “요즘 내내 와병 중이셔서 출타가 거의 없으시네. 다만 옥비마마의 궁녀가 폐하 앞에서 몇 번이나 울며 읍소하는 바람에 어제는 벌까지 받았다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 다른 분들은 마마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실 것입니다.”

    류명주가 빙긋 웃었다.

    “세 분 마마님을 제외하면 내가 가장 높지 않은가. 예를 갖추지 않는 이들이 있긴 하나 그래도 내가 해결할 수 있네.”

    “폐하께선 어떠신지요? 마마께 잘 해주십니까?”

    “잘 해주시긴 잘 해주시네.”

    마침표 뒤로 류명주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러다 지온의 손을 붙잡은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지온 소저, 내 솔직하게 말하겠네. 내 보기에 폐하의 마음은 내게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렇습니까?”

    류명주의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입궁한 이후, 폐하께선 영수궁에 딱 한 번 들르셨네. 그리고 밤을 보내지도 않으셨네만, 내 보기에 폐하께선 아직 옥비마마를 마음에 두고 계신 듯하네.”

    여인의 직감이었다.

    제 마음 전부를 한 사람에게 쏟고 있는 여인은 상대의 희로애락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그것이 실낱같은 감정일지라도 모두 느끼고야 마는 것이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사내의 심사를 더듬는 것을 배우며 자란 류명주는 제 직감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 나는 두렵네.”

    류명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폐하께서 지금 나를 예뻐하시며 총애하는 이유는 다른 여인에게 마음이 매여 있으시기 때문일세. 어느 날 폐하의 그 매인 마음이 풀어지면, 다시 폐하께서 그 여인에게 돌아가지 않으시겠나?”

    지온이 부드럽게 그녀를 다독였다.

    “마마, 폐하께서 마마를 좋아하시는 것과 총애는 본래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제왕으로서, 폐하는 한 여인만을 품을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폐하가 계속 마마를 좋아하게 만드신다면, 폐하는 마마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마, 마마 자신을 좀 더 믿으세요.”

    지온의 충고를 곰곰이 곱씹던 류명주가 곧이어 밝게 미소를 지었다.

    “자네 말이 맞네. 내가 바보 같은 고민을 했어! 폐하께서는 나와 옥비마마 사이에서 선택하실 필요가 없으시네. 다들 황후마마와 신비마마께서 폐하께 총애받지 못한다고 떠들지만, 그분들도 여전히 폐하의 그늘을 나눠 가지지 않는가. 폐하께서 계속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폐하는 계속 날 찾아주실 것이야. 더 좋아하실수록 나를 찾아주시는 횟수도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겠지.”

    장락지에서 기녀로 살 때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자신을 찾던 사내 중에 처가 없던 이가 얼마나 됐던가? 처가 있는 것이, 즐기는데 문제가 됐던 적이 있던가? 그들의 마음만 즐겁게 만들어주면 집안에 얼마나 많은 처첩이 있건, 올 사람들은 모두 왔다.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연회가 곧 시작합니다. 정전으로 드셔야 하실 시간입니다.”

    밖에서 향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한숨을 폭 내쉰 류명주가 지온을 향해 미소를 보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오거라.”

    줄줄이 안으로 들어온 궁인들이 정전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류명주가 말했다.

    “향설아, 지온 소저를 모셔다 주거라.”

    “네, 마마.”

    성장(盛裝)을 한 류명주가 밖에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올랐다.

    지온은 멀어지는 그녀를 고개 숙여 배웅하고는 향설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향설 낭자, 가시지요.”

    * * *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던 두 사람은 중간에 옥비가 탄 가마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한쪽으로 비켜서서, 성장(盛裝)한 옥비가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옥비의 가마가 멀어지자 지온이 말했다.

    “옥비마마께서 전과 달라지신 것 같네요.”

    향설이 맞장구를 쳤다.

    “네, 그렇지요.”

    지온이 웃었다.

    ‘역시 통했네.’

    과거의 옥비는 화장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옥종화와 판박이였다. 그러나 조금 전에 본 옥비는 옥종화의 흔적만 남겨두었을 뿐, 본래의 그녀와 같았다.

    * * *

    지온이 편전으로 돌아오자 능양진인이 연신 그녀를 흘끔거렸지만, 지온은 태연자약하게 제 차만 홀짝이기 바빴다.

    능양진인이 웃음을 억지로 짜내며 입을 열었다.

    “사질, 궁에선 환복하는 것이 어려우니 차는 조금만 마시게.”

    지온이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숙.”

    그리고 진짜 제 찻잔을 내려놓았다.

    능양진인은 생각보다 좋은 지온의 태도에 슬쩍 운을 뗐다.

    “사질을 부르신 마마가 누구신지 모르겠구먼?”

    지온이 그녀를 흘끔 쳐다보자 능양진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냥 물어본 게야!”

    능양진인은 정말 겁이 났다.

    자신은 뒤를 봐줄 사람이 없는 지금, 저 아이는 대장공주가 제 심장처럼 아끼는 아이가 되지 않았는가?

    ‘일단은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좋겠지!’

    곧이어 만수절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 시작을 알리는 사의(*司儀: 사회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음악이 울리고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전 안에서부터 밖까지 탁자가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자리한 문무백관과 왕후백작의 권세가, 외국에서 온 사신들과 내명부의 부인들이 동시에 황제의 생신을 축하했다.

    곧이어 경하드린다는 축언과 함께 선물이 이어졌다.

    온갖 길한 물건들부터 귀한 보석과 특이한 동물까지, 쉽게 보기 어려운 진귀한 것들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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