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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52)화 (252/385)
  • 252화. 얼마든지

    가느다란 불빛조차 없는 방안에서 보이는 것은 흐릿한 서로의 인영뿐이었다. 틈 없이 붙은 두 사람의 호흡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이불 속에서 다른 손 하나가 제 존재를 알리듯이 지온의 허리를 타고 미끄러지듯 지온의 옷속으로 들어갔다.

    “음…….”

    루안의 입술을 문 지온의 몸은 미미했지만 팽팽하게 굳었다.

    그 후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녀의 머릿속이 온통 엉망으로 흐트러져 알지 못했다. 루안이 몸을 일으키며 침상을 휘감은 휘장을 걷어 신선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게 할 때까지 그랬다.

    이윽고 다소 머리가 맑아진 그녀가 루안의 옷깃을 잡으며 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당신, 왜 그래요?”

    침상으로 돌아와 누운 루안이 다시 그녀를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놓쳤소.”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건가요?”

    잠시 말이 없던 루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어머니와 형님께서, 사실 당신의 조부께 혼담을 넣을 생각이셨다고 말씀하셨소. 만약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함께하고 있었을 것이요.”

    “정말요?!”

    지온이 잠깐 침묵하더니 루안을 꼭 붙들었다.

    “혼담을 넣지 않았어도 우린 함께했을 거예요. 당신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거든요.”

    옥종화였을 때는 말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눈을 떴고,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엔 기회가 온 것이다.

    ‘우린 어떻게든 함께했을 거야. 우린 그럴 운명이니까.’

    * * *

    루안은 이미 떠나고 없는 다음 날 아침.

    서아가 지온의 소세(梳洗)와 단장 시중을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지온의 침상을 정리하던 서아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간밤에 잘 못 주무셨어요? 침상이 왜 이렇게 엉망이죠?”

    지온은 순간 민망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새벽에 깨고 그 후로 잠을 못 잤어.”

    “아, 그래서 이게 이렇게 말려있었군요. 옷도 다 구겨지고…….”

    “…….”

    서아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밤에 차를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니에요? 앞으론 주무시기 전엔 좀 적게 드시는 게 좋겠어요.”

    응, 하고 대답한 지온은 말을 돌렸다.

    “내일 입궁해야 하는데 양어머니께서 하시는 일이 아직 많이 남았잖아. 일찍 가서 도와드리자.”

    서아가 네, 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서아의 입이 완전히 닫혔다.

    * * *

    지온이 난택산방에 도착했을 때, 매고고는 이미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일이 만수절이라 제대로 선물을 챙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장공주 역시 그동안과는 달리 사람들과의 왕래를 시작한 터라, 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빠질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챙겨야 할 사람은 지온이었다.

    “온이 옷은 무엇을 입혀야 하겠나? 아직 그 아이의 스승을 추모하는 기간인지라 본래 이런 연회엔 참석을 안 하는 게 좋겠지만 내 자주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지난번 황실의 종친들끼리 열었던 그 연회는 친척들에게 얼굴을 보이고 서로 인사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번 연회는 황제의 생신연이었으니 반드시 참여해야만 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매고고가 미소를 지었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아가씨께 다른 신분이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멈칫했던 대장공주가 돌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 그렇지! 온이가 사방전의 전주(殿主)이니 능양과 함께 기도하러 갈 수 있겠구먼!”

    출가한 사람은 이미 속세와의 연을 끊었다고 본다. 지온이 제 스승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 조방궁에 있는 것도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지, 규율로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지온이 사방전의 전주 신분으로 입궁해 기도를 올린다 해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온아, 가서 흉내는 내줘야 할 테니 어느 정도 고생은 해야 할 게야.”

    대장공주의 말에 지온이 방긋 웃었다.

    “이리 바쁘실 때도 저를 이만큼 챙겨주시는 어머니가 계신데 고생이랄 게 뭐가 있겠어요? 오히려 그리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합니다.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고요.”

    지온이 이번에 입궁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류명주를 보기 위함이었다.

    만약 지온이 관료 집안의 아가씨답게 규율에 얽매여 있어야 한다면, 오히려 더 불편할 것이었다.

    그러나 노파심이 든 새어머니 정 씨는 연신 지온에게 당부했다.

    “궁에서 옥신각신 벌어지는 일을 듣더라도 절대 나서서 시비를 가리려 들지 말게나. 괜한 일에 엮일 수도 있으니 해야 할 일만 다 끝내면 얼른 대장공주마마만 쫓아다니시게.”

    지온이 대답했다.

    “네, 어머니. 최대한 그런 사람들을 피해 다니겠습니다.”

    * * *

    지온은 하루를 꼬박 쓰고서야 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온이 난택산방에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군가 길에 서서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겨울이 된 계절에 은행잎은 전부 낙엽이 되어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뒷짐을 지고 선 루안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서아가 눈치 좋게 말했다.

    “아가씨, 저는 먼저 가서 저녁 준비가 끝났는지 알아볼게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루안을 바라보며 다가갔다.

    “내일 입궁하시오?”

    그가 물었다.

    “네, 능양 사숙과 같이 기도하러 가기로 했어요.”

    루안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는데 지온이 살펴보니 옥패였다.

    “나 주는 거예요?”

    “그렇소.”

    루안이 말했다.

    “허리에 달고 있으시오. 혹시 문제를 만나면 누군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오.”

    지온은 그것의 정체를 눈치챘다.

    “신분패 같은 것이로군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있으면 궁 안에 있는 내 사람들이 당신을 챙겨줄 것이오.”

    지온이 옥패를 손에 꼭 쥐었다.

    빙긋 웃은 그녀가 물었다.

    “이런 것을 내게 줬다가 내가 사고라도 치면 어쩌려고요?”

    루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든지 내가 수습하겠소.”

    천 마디, 만 마디의 다른 말과도 바꾸지 않을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지온의 미소가 화려하게 피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루안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했다. 따뜻한 시선을 보내던 루안은 머릿속으로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지난, 그 오랜 시간 자신이 바란 것이 무엇이던가. 그녀가 이리 미소 짓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슬그머니 올라간 루안의 손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화들짝 놀란 지온이 주변에 보는 이가 없는지 살피려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의 볼이 루안의 손에 꾹 잡혔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녀는 뒤로 물러서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작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지온은 간밤의 일을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다.

    ‘여긴 밖이란 말이야! 함부로 행동하면 어떡해!’

    그러나 루안은 한 걸음 내디뎌 지온에게 더 가깝게 붙었다. 지온의 몸에서 나는 풀잎향기가 그의 코끝에 닿을 때까지…….

    “어머니께서 날을 잡으셨소.”

    루안의 입이 열렸다.

    “다음 달 초, 엿새에 정혼을 하고 내년 2월에 혼례를 올리기로 했소.”

    지온이 깜짝 놀랐다.

    “그렇게 빨리요?”

    루안이 빙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내겐 너무 늦은 날인데…….”

    앞으로 석 달이나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지온이 그를 흘겨보았다.

    “너무 이르면 어머니께서 준비하실 시간이 없을 거예요.”

    루안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어머니께서 준비시킨 물건들을 큰형님께서 전부 가져오셨으니 혼례는 체면 상하는 일 없이 제대로 치를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의 혼례복도 걱정할 것 없소. 내가 이미 침모(*針母: 남의 바느질을 도맡는 여인)에게 말을 해두었으니, 그녀들이 조금 바삐 움직이면 될 것이오.”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고 정해진 마당에 지온이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그때, 두 사람의 귀에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루안이 시무룩하게 지온에게서 손을 뗐다.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겠소.”

    지온이 그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네, 가보세요.”

    그녀는 멀어지는 루안의 모습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 * *

    루안이 조방궁에서 나오자 한등이 물었다.

    “관아로 가십니까, 공자님?”

    “응.”

    곧바로 마차에 오른 루안은 눈을 감았다.

    덜컹대며 길을 가던 마차가 돌연 멈춰 서자, 루안이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한등이 마차에서 뛰어내려서는 그에게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서영왕세자께서 시비가 걸려 길까지 나왔습니다.”

    루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영왕과 북양왕은 현 정권에 남은 유일한 이성왕(*異姓王: 성이 다른 왕)이었다. 하지만 두 가문은 서남과 북방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크게 왕래가 없었다.

    이번 만수절엔 북양왕만 온 것이 아니었다. 서양왕 역시 세자까지 데리고 도성에 올라왔다.

    그러나 서영왕은 루혁과 찾아온 목적이 달랐다. 그는 자금을 받기 위해 도성에 온 것이었다.

    서남 지역은 여러 다른 민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라 충돌이 잦아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더구나 험한 산지에 물길도 좋지 않은 곳이라 제 영토를 다스리는 것에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래서 서영왕은 군비 증원을 요구하는 장주(章奏)를 자주 올렸었는데, 어디 조정이란 곳이 돈 쓰는 것에 부지런한 곳이던가? 그래서 서영왕은 이번엔 황제를 대면하여 군비 증강을 요구할 작정으로 만수절을 맞아 도성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루안은 며칠 전 조당에서 서영왕 부자를 보았었다.

    ‘그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어쩌다 시비가 걸린 거지?”

    “그것이… 기녀를 놓고 싸우게 된 것 같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루안이 다시 물었다.

    “그와 시비가 붙은 게 누구지?”

    “임창백의 자제입니다.”

    멈칫했던 루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임창백의 자제라면 지온을 골탕 먹이려던 화옥 때문에 억울하게 사건에 연루되었던 그자가 아닌가?

    ‘여색을 밝히는 방탕한 그자와 서영왕세자가 어쩌다 시비가 붙은 것이지? 가문의 체면이 떨어질 것은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한등, 가서 도와주고 이리로 모셔 오거라.”

    “네, 공자님.”

    마차 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과연, 누군가 서영왕세자의 신분을 입에 올린 모양이었다.

    그 찰나 한등이 등장했는지 구경꾼을 쫓아내는 한등의 목소리가 루안의 귀에 들렸다. 곧이어 마차가 기우뚱함과 동시에, 한등이 서영왕세자를 루안이 탄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루안은 손에 든 문서로 얼굴을 가린 채로 취기 오른 소년을 향해 물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세자께선 어찌 돌아가시지 않으십니까?”

    한참이나 루안을 노려보던 서영왕세자가 물었다.

    “누구지?”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루안이 한등에게 물었다.

    “서영왕의 사람이 있나?”

    “시종 둘이 있습니다만,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는 걸 보니 쓸모가 없는 이들입니다.”

    고민하던 루안이 대답했다.

    “먼저 세자부터 모셔다드리도록 하지.”

    * * *

    서영왕도 도성에 왕부를 가지고 있었다.

    루안의 마차가 밖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자니, 서영왕이 총총 밖으로 나왔다.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서영왕세자를 본 서영왕의 얼굴색이 변했다. 곧이어 그는 하인에게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마차 가까이 온 서영왕이 루안을 향해 공수했다.

    “불민한 아들을 데려와 줘서 고맙소.”

    루안은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도성은 말도 많고 일도 많은 곳입니다. 내일이 만수절이니 서영왕께서는 세자 관리에 좀 더 힘을 써주십시오.”

    상당히 공손하지 못한 태도였으나, 서영왕은 그것을 트집 잡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예를 갖춰 루안의 말에 대답했다.

    제 할 말을 마친 루안이 한등에게 이만 가자고 말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고개 숙여 배웅하던 서영왕은, 마차가 떠나자 시위를 향해 이를 갈 듯이 물었다.

    “어떤 놈이 세자를 꼬드겨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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