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51)화 (251/385)
  • 251화. 과거는 과거로

    루혁은 손이 기름으로 미끈거리는 게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빨리 손 씻을 것 좀 줘봐.”

    루안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곧 한등이 물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한등은 들어오자마자 루혁에게 볼을 꼬집혔다.

    “네 이놈, 오늘 나더러 뭐라 했느냐?”

    한등의 얼굴은 곧 기름 범벅이 되었다. 거기에 상처 부위까지 건드리자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픕니다, 아픕니다! 전하께서 직접 아무렇게나 욕해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그리 말했다고 진짜 그리 거리낌 없이 욕을 해? 눈치가 좀 있어야지!”

    루혁은 비누로 손을 한참이나 씻어낸 후에야 기름을 모두 지울 수 있었다.

    “어휴! 이번에 오는 길이 얼마나 고됐는지 아느냐? 가져오는 물건이 넘쳐서 가다가 서기를 반복하는 중에 비적까지 만났다! 몇 년이나 지났다고 비적이 다 출몰하는지……. 이 와중에 어머님은 대체 어쩌시려고 몰래 도망을 치신 겝니까! 아무 일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번에 제가 아주 큰 일을 치를 뻔했습니다. 말이 나와 말입니다만, 어머니, 연세도 지긋하신 분이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가출이라니, 대체……!”

    루혁의 수다스러움에 두통을 느낀 북양태비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잘랐다.

    “잔소리가 이리 늘어지니 내가 몰래 탈출할 수밖에! 네게 말을 하고 갔으면 잔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할지 알 수도 없어. 네 아비가 그러는 건 내 받아들였다만, 남편을 보내니 아들이 이어받아 난리를 치는구나! 조용히 지낼 수는 없는 게야?”

    루혁은 질 수 없었다.

    “제가 뭐 아무 일도 없는데 잔소리를 합니까? 어머니께서 워낙 황당한 일을 벌이시잖아요! 연세도 지긋하시니 집에서 놀고 드시면서 편하게 지내시면 될 텐데, 서역에서 염소 똥만 한 움직임만 보여도 꼬리 불붙은 황소처럼 말을 타고 전선으로 가버리시니 문제 아닙니까!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제가 아버님 얼굴을 어찌 뵙겠어요!”

    “세상 떠난 사람 얼굴을 보긴 뭘 보느냐! 다른 집 꼬부랑 할머니들이나 연극 보고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지, 난 나가서 싸우는 게 좋단 말이다! 안 되느냐?”

    북양태비가 루혁을 한껏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네 녀석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 어미는 전장에서 적들을 척살했어! 너보다 경험이 많단 말이다!”

    모자 두 사람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통에 두통이 온 루안이 팍 인상을 썼다.

    “그만하세요! 싸우러 오신 거면 두 분, 이만 돌아가십시오!”

    단숨에 태세를 전환한 북양태비가 어린애를 꼬여내는 어른처럼 웃음을 지었다.

    “싸우기는……! 안 싸운다! 전부 네 형이 오자마자 말로 사람을 찔러대 그런 것이지, 아니었으면 누가 저딴 녀석과 싸우겠느냐?”

    루혁은 기분이 언짢았다.

    “어머니, 루안에겐 이렇게 다정하시면서 저는 왜 이리 대하시는 것입니까? 설마 저는 어디서 주워 온 아입니까?”

    북양태비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래! 주워왔다!”

    “흥!”

    루혁이 털썩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더니 준비된 차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모를까 봐요, 어머니? 루안 저 녀석의 성정이 아버지를 닮아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입으론 남편이 죽으니 조용하고 좋다면서, 어머니는 남편이 생전에 남겼던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루혁의 눈이 축축하게 젖었다.

    멀쩡히 잘살던 가족이 엉뚱한 야심을 품은 놈들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다.

    ‘루안이야 그래도 도성이 멀다지만 얼굴을 볼 수는 있지…….’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가? 가장 건장하고 당당하실 나이에 전장 위도 아니고, 제 사람이 쓴 암기에 목숨을 잃었다.

    만약 숙부들께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 일으키지 않았다면, 루씨 가문뿐만이 아니라 북양 전체에 암운이 드리웠을 터였다.

    최근 들어 북양의 다른 민족들이 자주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놈들에게 틈을 보인다면 무슨 상황이 펼쳐지겠는가?

    북양이 놈들을 붙들어 두지 못하면 황성 턱 밑까지 단김에 치고 들어갈 터였다.

    루혁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언젠가 반드시 이 원한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 * *

    북양태비는 보물을 정리하며 북양의 상황에 관해 물었다.

    “전부 좋습니다. 헌이, 그 녀석이 또 선생 두 분을 내쫓은 걸 제외하면 다른 큰일은 없습니다.”

    북양태비가 루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나와 같이 다닐 땐 그렇게 착하기만 하던 아이가 왜 네 녀석 밑으로 가니 그리 말썽을 부리는 것이냐? 네가 아이를 잘 보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니야?”

    “어머니와 같이 다니는데 굳이 말썽을 부릴 까닭이 있겠습니까? 나무를 타지 않나, 수업을 빠지고 싸움을 하질 않나……. 전부 어머니께서 헌이와 함께 계셨을 때 헌이가 벌인 일이 아닙니까! 어머니와 있으면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데 혼자 더 무슨 일을 벌이겠어요!”

    “수업을 빠지다니! 싸움이라니! 나는 제대로 헌이의 스승에게 허락을 받고 헌이가 수업을 쉬게 했느니라! 애 코에 바람 한 번 넣어 준 것뿐이야! 헌이가 싸움을 했던 것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게 되어 그런 것이었고 말이다.”

    “허허…….”

    루혁은 입술만 바르르 떨었다.

    어머니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익숙한 일이었다. 할미는 손주에게 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입씨름을 해가며 보물 정리를 끝낸 북양태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챙겨야 할 것은 대부분 다 챙겼구나. 혼례를 제대로 올릴 수 있겠어.”

    루혁은 제 어미와 루안에게 번갈아 눈을 흘기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양태비가 허리를 뒤로 죽 늘렸다.

    “피곤하구먼. 먼저 가서 잘 테니 너희 둘도 대충 이야기하고 들어가거라.”

    북양태비가 루혁을 보았다.

    “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고.”

    루혁이 물었다.

    “같이 왕부로 돌아가시지 않고요?”

    북양태비가 손을 저었다.

    “도성에 있는 왕부는 평소에 사람이 살지 않던 곳이라 쓸쓸해. 어차피 너도 왕부에 오래 있을 게 아니니, 나까지 번거롭게 옮길 필요 없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루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북양태비가 왕부로 돌아가지 않으면 남들 눈에는 북양태비가 루안의 편에 서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그리되면 형제 사이에 있던 반목에 관하여 다른 말이 나올 것이다.

    전대 북양왕이 급작스레 변을 당하면서 북양의 상황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루안에게 왕작을 빼앗으려 했다는 죄를 모두 씌울 수밖에 없었지만, 루혁이 자리를 잡은 지금은 그 짐을 루혁이 받아 질 때였다.

    볼일을 끝낸 북양태비는 쉬러 돌아갔다.

    루안이 도성의 형세에 대해 입을 열려던 찰나, 루혁이 먼저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진짜 혼인을 한다고? 진짜? 네놈이 좋아하는 소저가 있었단 말이야?”

    루안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그거 물으려고 이 새벽에 찾아왔어?”

    “궁금하잖아! 네 나이가 지금 몇이냐! 벌써 스물하고도 셋인데 여인이라곤 곁에 둔 역사가 없잖아! 누가 널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라 했을 것이다.”

    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엥? 어디가?”

    “형과 시답잖은 이야기할 시간 없어. 내일 또 조당에 들어야 해. 잔다.”

    “가지 마!”

    루혁이 그를 붙잡았다.

    “농담 한번 한 걸 가지고……. 네가 옥 소저를 좋아한 걸 모르는 사람이 있었냐? 평생 옥 소저의 그림자에서 못 나올 줄 알았더니, 세상에…….”

    쾅!

    세게 문을 닫은 루안이 제 형을 돌아보며 물었다.

    “형, 지금 뭐라고 했어?”

    루혁이 눈을 끔벅이며 대답했다.

    “네가 옥 소저를 좋아했다고…… 아니냐?”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루혁이 소리 내어 꺄르르 웃었다.

    “내가 네 형이다, 이놈아! 무애해각에 갔을 때 보자마자 알겠던데! 남아서 애들을 가르치긴 무슨, 그것도 옥 소저 때문이었잖아! 아버지께 옥씨 가문에 혼담을 넣자고 한 것도 난데…….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그놈들이 먼저 손을 쓰는 바람에 옥씨 가문의 조손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루안의 표정이 달라진 것을 본 루혁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간이 꽤 흘렀잖아, 너도 그만 그 기억에서 빠져나올 때가 됐지. 이제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잖아. 연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로 보내줘.”

    하마터면 루안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

    자신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놓쳐버린 것인가! 만약 자신이 좀 더 빨리 입을 뗐더라면 그녀와 함께했을 터였다. 그랬다면 해구들이 몰려온 그 밤에도 그는 그녀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홀로 외롭게 바다에서 죽게 만들지도 않았을 텐데…….’

    “루안, 뭐하냐?”

    “아니야.”

    루안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녀가 있으니, 정말 늦지 않았다고.

    * * *

    새벽, 잠을 자던 지온은 돌연 잠에서 깨어났다.

    홀로 자는 게 익숙한 지온은 시녀들이 돌아가며 밤을 지키더라도 시녀들을 제 방 밖의 다른 곳에서 자도록 했다. 그래서 방에는 자신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창밖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주변을 더듬었다.

    창밖에 진짜 뭔가 있었던 것인지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창문 빗장이 덜컹하고 움직였다. 곧이어 삐걱하며 창문이 밀려 올라갔다.

    “아!”

    지온은 제 근처에 있던 등잔대를 들고 강하게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휘두른 등잔대를 상대가 손으로 잡아채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려던 입도 상대의 반대편 손에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 바람에 등잔의 불씨만 꺼트려 방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지온이 당황한 그때, 그녀의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요. 무서워 마시오.”

    긴장이 풀린 그녀는 온몸의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루안이 창을 넘어 완전히 지온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밖에서 서아의 음성이 들렸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지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일 보려고 일어난 거야.”

    평소와 다름없는 지온의 목소리에 서아도 알겠다며 대답하고는 다시 제 침상에 누워 잠에 빠졌다.

    밖이 조용해지자 목소리를 낮춘 지온이 물었다.

    “어떻게 왔어요?”

    ‘이 새벽에 도둑도 아니고…….’

    창을 확실히 닫은 루안이 제 손으로 그녀의 팔뚝을 비볐다.

    “당신을 보러왔소. 추우니 다시 들어갑시다.”

    지온도 두말없이 침상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루안이 침상 위에 앉는 게 아닌가?

    “당신…….”

    지온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사람이 아닌데…….’

    지온이 자신이 옥종화란 비밀을 밝히고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지 세 달쯤 되었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먼저 다가오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던 것이다.

    ‘오늘 왜 이래? 갑자기 뭐라도 느꼈나?’

    루안은 한마디 말도 없이 신과 겉옷을 벗고는 그녀가 덮은 이불 속으로 들어와 지온을 뒤에서 껴안았다.

    루안은 그렇게 그녀를 품에 껴안고만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긴 지온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당신, 왜 그래요?”

    시월 말이었다.

    날씨는 이미 꽤 추워져, 밖에서 들어온 루안의 몸에서는 시월 말의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저를 힘주어 안은 그의 숨결은 귀를 데울 만큼 뜨거웠다.

    “아무 일 없소.”

    루안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저 내가 운이 좋은 것 같아서…….”

    지온의 머릿속은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루안은 더는 설명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온을 제 편으로 돌린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제 입에 머금었다.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던 지온은 루안이 오늘따라 열정이 넘친다 생각하며 그저 수동적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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