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50)화 (250/385)
  • 250화. 새벽, 창을 타고 넘는 이

    루안은 차가운 눈으로 제 형님을 흘끔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찔리는 것이 있으니 먼저 선수 치듯이 저를 발고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물건이 부서졌는지 직접 확인해주시옵소서, 폐하. 폐하께서도 신이 다음 달에 혼례를 올리는 것을 아실 것이옵니다. 하여 오늘 제 수하에게 예물을 사오라 시켰사온데, 돌아오는 중에 돌연 길을 막는 자가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마차 세 대에 담긴 예물이 모두 부서져 허공으로 사라졌사옵니다. 거리에서 그 모습을 본 이들이 많으니 하문하시면 금방 진실을 아실 것이옵니다.”

    루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혁이 당장 입을 열었다.

    “본 왕은 지금 진상품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무슨 예물을 걸고넘어지는 것이냐! 네가 진상품을 때려 부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느냐!”

    그리고 다시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린 루혁이 말을 이었다.

    “폐하! 저자가 신의 마차를 부순 것을 본 이들도 많사옵니다. 하문하시면 금방 하실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황제는 어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네들이 길에서 주먹다짐을 하여 서로의 물건을 부쉈다는 게로군. 맞는가?”

    “그렇습니다.”

    “아니옵니다.”

    벌어진 입 두 곳에서 동시에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한 이는 루안이었고, 아니라 한 이는 루혁이었다.

    서로 다른 대답을 한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황제의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대체 그런 것인가, 아닌 것인가? 북양왕, 아니라면 자네는 물건을 부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옵니다.”

    루혁이 대답했다.

    “제 시위들이 하찮은 물건 몇 개를 부수긴 했사옵니다. 하오나 그것은 저자의 것이 아닙니다!”

    황제는 또다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 대금을 치르지 않은 것인가?”

    루안의 미간이 바짝 좁아졌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다, 폐하. 신의 예물은 금과 은으로 대금을 치르고 산 것이옵니다.”

    “북양왕?”

    루혁의 입이 열렸다.

    “폐하, 저자의 돈은 제 돈이 아니옵니까?”

    루혁이 루안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북양을 떠날 때 금전을 가져가지 않았다고는 못하겠지! 이미 루씨 가문도 아니게 되었으면, 응당 가져간 금전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 마차의 그 물건도 모두 본 왕의 돈으로 산 게 아니냔 말이다!”

    “…….”

    황제와 원 재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북양왕, 거 너무 치사한 거 아니오?’

    그리 북양을 떠난 루안이 가문의 사업체들을 가져왔을 리가 없다. 챙겨봐야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나 몇 개 챙겼을 텐데, 그것까지 이리 물고 늘어지다니?

    ‘입고 나온 옷까지 돈으로 계산해서 받으려고?’

    “북양왕, 루 통정은 봉록을 받네.”

    “봉록을 받으면 더욱이 제 돈을 써서는 아니 되지 않사옵니까!”

    황제가 좋게 돌려 말했으나 루혁은 기세가 등등해 소리쳤다.

    루안의 냉소가 이어졌다.

    “형님, 3년 전 형님께서 도성에 사람을 보내 저를 발고했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루혁이 경계하며 루안을 보았다.

    “그때의 이야길 왜 꺼내느냐? 또다시 본 왕을 모함하려고?”

    “당시 어전에서 명명백백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가문에서 내보내고 다시는 서로에게 관심을 끄고 얽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달리 말해 그때 이미 전부 이야기가 끝났다 이 말입니다. 문서로 남긴 증거도 있는데, 이제 와 무슨 계산을 한다 이러십니까?”

    “끄응…….”

    “그런 일이 있었지.”

    황제가 맞장구를 쳤다.

    루혁이 반박하지 못하자 루안이 공세를 이어가려고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북양왕께서 직접 신의 예물을 부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폐하, 돈은 돈으로 갚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영명한 판결을 내려주시옵소서!”

    루혁은 제 주장이 먹히지 않을 것 같자 곧장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네놈도 본 왕의 물건을 부수지 않았느냐! 폐하, 저자가 부순 것은 폐하께 올릴 진상품이었사옵니다! 이는 군주에 대한 기만이니 더욱 엄벌에 처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루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진상품을 부쉈다니요? 북양왕 전하, 없는 말씀은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래봤자 옷 상자 몇 개 엎었고, 봉해져 있던 진상품은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며 루안이 원 재상을 향해 말했다.

    “재상,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하관의 말이 틀립니까?”

    “그것이…….”

    원 재상은 북양왕을 흘끔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확실히 흩어진 것은 옷상자뿐이었네.”

    “옷 몇 상자는 돈이 아니라더냐! 네놈의 물건들도 겨우 천 쪼가리가 아니었느냐!”

    루혁이 다시 한번 황제를 향해 강하게 주청했다.

    “폐하! 저자의 물건을 물어주겠사옵니다! 그러나 저자 역시 신의 물건을 물어주어야 할 것이옵니다!”

    황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 루안이 선수를 쳐 대답했다.

    “좋습니다. 분명 본인 입으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옷값을 물어주고, 북양왕께서는 제 예물 값을 물어주기로……!”

    루안이 너무 빨리 허락하는 바람에 순간 반응하지 못했던 루혁이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마주 소리쳤다.

    “물어주면 될 게 아니냐!”

    그러다 그는 원 재상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서야 뭔가 잘못됐단 것을 깨닫고 수습하듯 말했다.

    “값을 부풀릴 생각은 하지 말거라!”

    루안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예물을 산 하인은 모두 예물 목록에 따라 이를 구입했습니다. 제가 없는 것을 사오라 하겠습니까?”

    “예, 예물 목록……?”

    “그렇습니다.”

    루안이 소매 안에서 여유롭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천천히 읽어보시지요, 전하. 잃어버리시면 제게 또 있으니 말씀하시고요.”

    목록을 훑어본 루혁이 당장에 소리를 질렀다.

    “네놈! 본 왕을 함정에 빠뜨렸구나!”

    그러나 루안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어디 그런 말씀을……. 설마 제가 왕께서 제 예물을 때려 부술 것을 예상하고 예물 목록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전하를 함정에 빠뜨렸다고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제가 고의로 수작을 부렸다고 우기십니까?”

    “네, 네놈……!”

    “아, 전하의 의복들을 물어드려야 하니 망가진 옷이 몇 벌인지 검사하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루안은 곧장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폐하께서 백망(百忙)하신 가운데 신이 별 것 아닌 일로 폐하의 마음을 어지럽혀 송구하옵니다. 신과 북양왕 사이의 일은 마무리가 되었으니, 더는 귀찮게 하지 않고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드디어 퇴청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원 재상 역시 바로 입을 열었다.

    “신도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홀로 남은 북양왕이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루안! 본 왕을 속이다니, 부끄럽지도 않으냐!”

    북양왕은 도성에 든 첫날 이렇게 엄청난 금액의 빚을 지게 되고 말았다.

    * * *

    북양왕의 위풍도 당당한 마차 행렬은 북양태비의 방문 이후 과반이 넘게 루안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날 밤, 북양태비는 방실방실 웃으며 자물쇠를 열고 안에 든 보물들을 쓰다듬었다.

    “진짜 네 녀석의 혼인자금을 털어오다니, 역시 큰애가 마음 씀씀이가 크고 세심하지…….”

    북양태비는 잠도 마다하고 함에 든 보물을 일일이 챙겼다.

    “이게 보이느냐? 서역에서 온 상인이 있었다. 보석을 파는 보따리상(商)이었는데, 가지고 있던 보석들이 첫눈에 보기에도 두 번 보기 어려운 좋은 물건이었다.”

    북양태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파란색과 붉은색 보석을 보고 네 아비가, 너희 형제가 부인을 맞을 때 주려고 큰돈을 들여 산 게야. 네 형은 혼인할 때 이미 썼으니 이번엔 너로구나.”

    북양태비가 손에 들고 있던 비둘기 알 크기만 한 보석을 다시 조심스레 함으로 가져다 놓았다.

    “이 진주도 네 아비가 부탁해 남해에서 공수해온 것이다. 네가 무애해각에서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할 때였지. 네 혼사를 두고 그이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아느냐? 어떤 규수가 그곳에서 선생 노릇을 하는 널 따라갈까 싶었으니 말이다. 고민 끝에 우리는 옥형 선생의 손녀인 옥 소저가 가장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의를 보이고 싶어 예물 준비에도 심혈을 기울인 게야.”

    북양태비의 목소리가 담담히 이어졌다.

    “아쉽게도 혼인 이야기는 꺼내기도 전에 무애해각이 해구들에게 공격을 받아 옥씨 가문 조손도 그리 떠났구나…….”

    곁에서 북양태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안이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북양태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진주가 남해에서 왔다고 했다.”

    “아니요. 그러니까 두 분께서 옥 소저와 저를 맺어주려 했단 말씀입니까?”

    “그래!”

    북양태비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아이와 잘 어울리지 않았느냐?”

    “그랬지요. 하지만 당시 태자 전하와 공인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황가의 사람이 될 여인을 뺏는 것인데, 그리되면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셨을 게 아닙니까?”

    북양태비가 피식 웃고는 루안을 쿡 찔렀다.

    “외골수 같은 놈아,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있었다면 옥 소저는 바로 시집을 갔겠지. 혼인하기로 했는데 그리 오래 끌 이유가 있었겠느냐? 척 봐도 안 될 일이었다.”

    서책을 말아 쥔 루안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리된 것이었나. 내가 눈이 가려져 알지 못했던 게야.’

    “옥형 선생이 바로 거절하지 않은 것도 제 손녀의 혼사를 걱정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때 옥 소저가 벌써 열여덟이었으니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 선제께서 좋아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너무 나간 생각이야. 선제께선 그리 치사한 분이 아니셨다. 더구나 네가 옥 소저와 혼인을 하더라도 무애해각에 계속 남아 학생을 가르친다는 건 황가에 좋은 소식이 아니냐? 선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어.”

    잠시 멍해 있던 루안은 그녀가 말한 방향으로 한 번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이 무애해각에 남는 일은 인질로 남는 것과 같았다. 북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정에도 들어가지도 않으며 큰 명성을 가진 옥씨 가문에 남아 오직 인재만 길러내고자 하니, 황제로선 당연히 좋아할 일인 것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보니, 루안은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자신은 왜 기회가 없을 것이라 그리 확신했던가.

    북양태비가 그를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옥 소저를 좋아했었지?”

    루안은 서책을 말아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긍정을 표한 것이다.

    북양태비가 한숨을 쉬었다.

    “슬프게도 너희 둘이 인연이 없던 게지. 그래도 이젠 네게 온이가 있지 않느냐? 눈에 있는 이를 소중히 아끼거라.”

    루안은 웃었다.

    당연히 그리할 것이고, 또 할 것이었다.

    다른 누구를 좋아한 적도 없었다. 그에겐 오직 그녀 하나뿐, 변한 적이 없었던 것을…….

    그때, 창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였는데, 곧이어 거친 욕설이 넘어왔다.

    “이게 다 뭐냐! 일부러 이런 것이지, 요놈아!”

    무겁던 모든 상념이 욕설과 함께 흩어졌다.

    창을 연 북양태비는 그림자를 보고는 한껏 비웃었다.

    “창문도 못 넘다니. 혁아, 너무 부족한 게 아니냐?”

    루안이 일어나 문을 열며 말을 이었다.

    “멀쩡한 문이 있는데 창문은 왜 넘어?”

    북양왕, 루혁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연신 손을 닦았다.

    “창문 정도는 넘어줘야 기분이 나지 않겠느냐! 문으로 들어오면 어디 몰래 오는 맛이 나더냐?”

    그러더니 곧 제 손 냄새를 맡곤 믿을 수 없단 표정이 되었다.

    “기름? 루안, 진심이냐? 창문에 기름을 발라놔?”

    루안은 표정 없이 대답했다.

    “그러게. 형님의 사람들이 워낙 창 넘는 걸 좋아해서 말이지.”

    “내 사람들? 또 누가 왔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금방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야우를 말하는 것이냐? 그 자식, 여기서 어떻게 지내고 있더냐? 괜히 사고치고 다니는 건 아니지?”

    “그냥저냥.”

    헛소리를 좀 하고, 이상한 생각을 좀 하는 걸 제외하면 확실히 그냥저냥 잘 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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