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49)화 (249/385)
  • 249화. 길 한복판에서 벌어진 싸움

    조정 일을 보는 문관마저 당해내지 못하는 ‘혓바닥’이었으니, 북양왕과 같은 무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관리 둘의 동정 어린 시선이 루혁에게로 향했다. 머리 뚜껑이 열린 루혁은 당장이라고 칼을 뽑아 머리라도 썰 것처럼 발을 구르고 있었다.

    시위들이 죽어라 그를 말렸다.

    “전하, 칼을 뽑으시면 안 됩니다! 만수절이 코앞입니다! 칼부림은 길하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절대 저자의 수작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일부러 전하의 화를 돋워 폐하 앞에서 수습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입니다!”

    분노한 눈을 희번덕이며 루안을 바라보는 루혁은 당장이라도 루안에게 달려들어 칼부림을 벌이고 싶은 듯 몸을 꿈틀거렸다.

    “감히 본 왕의 명예에 침을 튀기다니! 내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때였다. 아차 하는 사이 시위들이 루혁을 놓쳐 그만 루혁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상황이 급박해졌다. 시위들을 노려보는 루혁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것들아! 사람 잡는 것도 못 한단 말이야!’

    말리는 손이 사라진 마당에 자신더러 어떻게 계속 연기를 하란 말인가!

    시위들은 그저 억울했다.

    ‘힘이 장사이신 분인 걸 어쩌란 말이야!’

    죽어라 붙들고 늘어졌는데도 그걸 뚫어버린 것을, 자신들에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래도 한등이 눈치가 빨라 기민하게 대처했다. 얼른 앞으로 달려나가 루혁을 뒤로 밀어버린 것이다.

    한등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가 감히 공자님을 건든단 말입니까!”

    그리고 순검 대장을 바라보며 한등이 다시 말했다.

    “나리, 보셨습니까? 저들이 때려죽이네, 마네 해도 저희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그것이…….”

    순검 대장이 말을 더듬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조금 전엔 상대가 북양왕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던가! 더구나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지 자신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북양왕은 다른 왕후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는 실권을 가진 번왕으로, 수하들 모두 전쟁에서 죽음으로 벼려진 장수들이었던 것이다.

    ‘진짜 열이라도 받으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단 말이다!’

    황제 이름을 팔아도 들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일을 치고 그대로 북양으로 돌아가면 더 어쩌겠는가?

    그러나 루안은 더욱 밉보여선 안 되는 자였다.

    ‘신분도 신분이고 황제 폐하의 신임을 얼마나 받고 있는데!’

    자신 같은 순검 대장 따윈 눈빛 한 번이면 찍어 누를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싸움이 다 끝나고 나타날 것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라.”

    루안이 순검 대장을 향해 눈짓했다.

    “멀리 가 있다가 조금 이따 오게.”

    순검 대장은 이게 웬 호재인가 싶어 당장 제 수하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가 봐도 한바탕 할 기세이지 않은가! 파리 목숨 같은 순검 나부랭이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순검 대장이 사라지자 루안의 시선이 바닥에 가득 뒹굴고 있는 부서진 예물로 향했다.

    “한 마디만 묻겠습니다. 이것들을 누가 부순 겁니까?”

    한등이 득달같이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놈들입니다!”

    루안이 다시 물었다.

    “이게 어떤 물건인지 말했나?”

    “말했습니다.”

    한등의 대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공자님의 예물이라 말했지만 그래도 다 부쉈습니다.”

    “알겠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는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뒤바꿔 이 아우를 가문에서 쫓아내어 종친들을 모두 잃게 만드시더니, 이젠 혼사에 훼방을 놔 대까지 끊으려 드시는군요. 형님께서 저를 이리 융숭하게 대접해주시니,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퉷!”

    루혁이 루안에게 욕을 뱉었다.

    “입만 살아 할 줄 아는 건 본 왕을 모욕하는 것뿐인 놈이! 너 같은 놈이 혼인을 해? 가당키나 하느냐? 넌 평생을 고독하게 살다가 후사 없이 죽어야 할 놈이다!”

    다시 안전하게 시위들의 손에 붙들린 루혁이 루안을 눈길로 태울 듯이 눈을 부라렸다.

    “날 치고 싶은 것이냐? 오거라! 너 따위에 본 왕이 겁이라도 먹을 것 같으냐?!”

    뒷짐 진 루안의 목소리가 얼음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형님처럼 주먹다짐밖에 못하는 줄 아십니까? 아시겠지만, 저는 언제나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았지요. 형님께서 제 예물을 못 쓰게 만들었느니, 제가 형님의 것을 못 쓰게 만들어도 탓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루안이 소리쳤다.

    “여봐라! 저들의 마차에 있는 물건을 부숴라!”

    “네!”

    루안의 뒤에 시립했던 수하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더니 늑대와 호랑이 같은 기세를 흩뿌리며 북양왕의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몹시 놀란 루혁이 고함을 질렀다.

    “폐하께 올릴 진상품에 감히 손을 대겠다는 것이냐!”

    루안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괜히 겁주실 것 없습니다. 폐하께 올릴 진상품은 모두 봉해두시지 않았습니까. 이리 많이 챙겨온 물건 중에 폐하께 올린 진상품이 몇이나 된다고요. 형님께서 편히 쓰려 챙겨온 것들이 더 많을 텐데…….”

    그리고 루안은 다시 명령했다.

    “부숴라!”

    “네!”

    난리의 규모가 구경꾼들이 자리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구경꾼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몸을 숨겼다. 그 바람에 순식간이 주변이 휑해졌다.

    욕하는 이들과 물건을 부수는 이들 사이로 누군가는 서로 주먹질을 하며 붙어서 싸웠다.

    점포에서 나오던 유민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누가 길 한복판에서 저렇게 싸워?!”

    그런 유민을 싹 무시한 유신지가 지온에게 물었다.

    “북양태비께 연락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말고 저희는 이만 가요.”

    “아가씨!”

    지온이 가려는 듯 보이자 서아가 다급히 그녀의 소매를 붙들었다.

    “저렇게 크게 다툼이 났는데 모른 척하시려고요? 그러다 루 대인께서 다치시면 어쩌려고요?”

    “그럴 리 없어.”

    지온이 대답했다.

    “북양왕이 바보도 아니고, 사람을 치면 상황이 더 심각해지는 걸 모를 리 없지.”

    유신지도 구시렁거리며 동의했다.

    “거 참, 걱정도 안 되시나 봐요.”

    말은 이리 하면서도 유씨 남매는 지온이 마차를 탈 때까지 배웅했다.

    지온이 떠나고, 유민은 여전히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유신지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설마 끼어들려는 건 아니지?”

    유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제야 안심한 유민이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가자. 저렇게 싸우고 있으니 곧 더 혼란스러워질 거야. 어쩌면 누가 폐하께 이 사실을 발고할 지도 모르지. 우리도 웬만하면 휘말리지 않는 게 좋잖아.”

    이때, 유신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뭐라고 했느냐, 방금?”

    유민이 어리둥절해 되물었다.

    “웬만하면 휘말리지 않는 게 좋다고. 왜?”

    “아니, 그 말 전에 말이다.”

    “발고……?”

    고개를 주억인 유신지가 생각에 잠겼다.

    “발고야 반드시 하겠지. 그런데 발고하고 나서는?”

    “오라버니, 왜 그래?”

    유민이 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유신지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서……. 그만 가자.”

    두 남매는 마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난리판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유신지의 의혹은 더욱 크기를 키워갔다.

    루씨 가문의 분쟁은 양측 모두 말이 달라 어차피 결론이 날 수가 없었다.

    ‘북양왕이 성질 급한 건 그렇다 치고, 루안 저 녀석까지 왜 저러지? 폐하께 고해 바쳐 북양왕을 엿 먹이려고 저러는 것인가?’

    하지만 황제가 북양왕을 건드릴 리 없었다.

    ‘해봐야 간지럽지도 않은 벌이나 내리시겠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루안이 그리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유신지는 머리 가득 물음표를 채운 채로 점점 더 싸움판에서 멀어졌다.

    * * *

    형제가 난동을 부린 일은 역시 황제의 앞에까지 올라갔다.

    북양왕부에는 들르지도 않은 루혁은, 마차를 끌고 곧장 정양문으로 달려가 알현을 청했다.

    조정 관아가 밀집한 정양문 밖에서 그런 소동이 벌어졌으니, 관리들이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런데도 루혁은 거침없이 시위에게 명했다.

    “누가 물어보든 다 말해라! 모두에게 알리고 대신들 앞에서 잘잘못을 가려야지!”

    그의 명에 시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십시오! 루씨 가문의 불효자가 전엔 왕작을 탐내더니, 이젠 제 형님이 도성에 가지고 들어온 물건들을 다 부쉈습니다! 폐하께 올릴 만수절 진상품이었는데 이리 다 부쉈으니, 이것이야말로 폐하께 불경을 저지른 게 아니겠습니까!”

    모르는 이가 보면 정양문 밖이 도떼기시장이라도 되는 줄 알만한 소란이었다.

    마침 당직이었던 지라 막 퇴청하고 돌아가려던 원 재상은, 미처 궁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만 루혁에게 잡히고 말았다.

    “원 재상? 원 재상이로구먼! 마침 잘 왔네, 자네가 본 왕의 증인이 되어주어야겠어. 이걸 좀 보시게, 폐하의 만수절에 올릴 진상품이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놀란 가슴을 추스른 원 재상의 시선이 멀거니 마차를 향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슨 꼴은, 겨우 마차 한두 대 부서지고 옷 상자 몇 개 쏟아진 게 다로구먼.’

    북양왕부의 시위가 몇 명이나 되던가? 더구나 그들은 하나 같이 전장을 겪은 이들인데, 그런 자들이 어디 진짜 당할 리가 있겠는가?

    원 재상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다른 한쪽에서 루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마차를 대동했는데, 북양왕부의 마차에 비하면 비참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모양마저 갖추지 못할 만큼 부서진 게 거의 조각나다시피 했던 것이다.

    “실례하네.”

    루안이 정양문을 지키는 금군에게 말했다.

    “통정사 루안이 폐하께 알현을 청하네.”

    * * *

    정신을 차려보니 원 재상은 루씨 가문 형제의 손에 이끌려 같이 입궁해 있었다.

    ‘퇴청했는데……! 제발 날 놔주면 안 되는 것이냐, 이놈들아!’

    곧 손주가 태어날 때라 집안 전체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루혁은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반드시 증인이 되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증인은 무슨 놈의 증인? 내가 뭘 본 것도 없구먼!’

    골치가 아픈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봐야 할 공무도 산더미인데 어째서 이런 일까지 처리해야 하는 겐지…….’

    황제는 루씨 가문 형제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어나시게.”

    “감사합니다, 폐하!”

    북양왕, 루혁이 일어나더니 곧바로 고자질을 시작했다.

    “폐하, 북양에서 출발한 신은 천신만고 끝에 폐하께 올릴 진상품을 도성까지 무사히 운반하였사옵니다. 하온데 오는 길엔 무탈하였사오나, 도성에서 신이 공격을 받았사옵니다! 폐하, 반드시 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셔야 하옵니다!”

    말없이 잠시 루혁을 쳐다보던 황제가 물었다.

    “어딜 공격당한 것인가?”

    루혁이 제 몸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여기, 여기, 그리고 이곳이옵니다!”

    거의 온몸을 손가락으로 휩쓴 그가 제 가슴을 움켜쥐더니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아파 죽겠구먼! 사람 잡네!”

    루혁을 흘끔 본 원 재상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옷도 아주 멀쩡하구먼, 맞긴 어딜 맞았다고? 루안 저 병약한 인간이 어디 때려서 이길 수나 있겠나!’

    “물론,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니옵니다. 가죽이 두껍고 질긴 신이 몇 대 맞는다고 문제가 될 리가 있겠사옵니까?”

    황제와 원 재상 둘 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 연기가 과했다고 생각한 루혁이 금방 태도를 달리해 방법을 바꾸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폐하께 올릴 진상품을 저자가 부쉈다는 것이겠지요! 폐하, 그 물건들은 제가 폐하의 만수절 진상품으로 올릴 것들이었사옵니다! 감히 진상품도 다 때려 부수다니, 폐하께 불경하기가 이를 데가 없지 않사옵니까! 반드시 엄히 처벌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황제가 시선을 돌렸다.

    “그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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