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형제
점포 앞에 선 서아가 제 가슴을 퉁퉁 때리며 지온에게 물었다.
“아가씨. 저 사람들, 북양왕의 시위 아니에요?”
“응.”
지온이 대답했다.
“저기 표식을 보면, 북양왕부의 마차야.”
입을 삐죽인 서아가 자연스레 한등 편을 들었다.
“이제 막 도성에 들어와 놓고 벌써 일을 치다니, 어쩜 이래요?!”
그때 계산을 마친 유신지가 밖으로 나왔다.
“그럴 게 뭐가 있나? 형제도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판에 만나 싸우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그가 지온을 흘긋 쳐다보았다.
“매년 북양왕의 사람들이 도성에 올 때마다 서로 조금씩 일을 벌이긴 했습니다. 그저 올해는 우연히 이리 길에서 마주친 것뿐이지요. 앞으로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겁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더 많아요.”
지온이 웃었다.
“제가 관련된 일도 아닌데요, 뭐. 난리를 치면 치라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온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유신지가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습니다. 어차피 아직 혼인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툼이 생겨도 지온 소저까지 엮진 않을 거예요.”
유신지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모양인지 다른 말을 꺼냈다.
“올해 북양왕이 직접 폐하께 축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억에 그렇게 상주를 올렸던 것 같은데…….”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신지의 시선이 북양왕의 마차로 향했다.
“그렇다면, 저곳에 있겠군요.”
“돈 내놔! 돈 내와!”
한등은 제 수하의 종들과 함께 연신 돈 내놓으란 말을 구호처럼 외치고 있었다.
그때 마차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누가 감히 본 왕에게 돈을 내놓으라 하는 것인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성이었다. 그저 듣기엔 전혀 무섭지 않았으나 한등은 귀에 목소리가 들어간 순간 파르르 몸을 떨며 곧장 목소리를 낮췄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로 시종 몇 명이 달려갔다. 발받침대를 준비하고, 마차 막을 걷으며 분주히 움직인 시종들은 곧 사내 하나를 모셨다.
스물하고 일고여덟 됐을까. 황금색 이무기가 수놓인 예복인 망포(蟒袍)를 두르고 금관을 쓴 영준한 사내에게서는 패기가 줄줄 흘렀다.
모두가 소매를 말아 쥐며 속으로 함성을 지르고 있을 때, 타박타박 걸어온 사내가 옆으로 쓰러진 마차 기둥에 비스듬히 한 발을 걸치는 게 아닌가!
뒷골목 왈패처럼 삐딱하게 선 그가 한등을 보며 말했다.
“본 왕에게 돈 내놓으라 한 게 네놈이냐? 천한 노비.”
구경에 열을 올리고 있던 관리 둘은 흥분으로 서로의 소매를 말아 쥐었다.
“북양왕! 북양왕이 직접 나섰네!”
“하하하하! 이제부터가 진짜로구먼!”
북양왕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흥분도 못지않았다.
도성에서 발에 차이고도 남는 게 왕들이라지만, 그것이 북양왕이라면 달랐다. 평생 가도 얼굴 한 번 보는 일이 손에 꼽혔기 때문이었다.
‘북양왕이 저리 생겼었구먼?’
루 통정을 본 적이 있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루씨 가문의 외모는 거 말이 필요 없구먼.’
“전하.”
어느새 다가온 고홍은 대체 어디서 금방 꺼냈는지 모를 견과(堅果)를 그에게 건넸다.
북양왕인 루혁은 자연스레 손을 닦더니 견과를 받아 입에 넣었다. 콰직, 하는 소리를 내며 몇 번 견과를 씹던 그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왜 말이 없느냐? 본 왕에게 돈 내놓으라고 소리치던 게 네가 아니냐?”
북양왕의 모습에 유신지는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저자가 북양왕…… 형제가 참으로 다르군요.”
지온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씨 가문 형제의 성격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녀는 제 동생을 북양으로 데려가려고 루혁이 무애해각을 방문했을 때, 이미 그를 본 일이 있었다.
싸움판에 갑자기 등장하여 마차에 발을 올린 것도 모자라, 견과까지 까작까작 씹어대니 루혁은 더욱 왈패처럼 보였다.
그를 대면하고 선 한등은 기세에서 밀리는 게 역력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그는 마른 땅에 머리를 박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저희 공자님의 예물을 다 부쉈으니 배상하셔야 합니다!”
“얼씨구! 몇 년 도망 나가 살더니 너도 꽤 하게 됐구나?”
루혁이 삐딱하게 올렸던 다리를 치웠다. 견과를 까득 씹던 그는, 한등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본 왕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말해 봐라.”
가슴을 쭉 편 한등이 차갑게 말했다.
“공자님의 예물을 부쉈으니 배상해주십시오!”
“옳거니! 용기가 가상하구먼!”
연신 견과를 씹던 루혁이 제 손을 한등의 옷에 닦았다. 그리고 바로 선 그가 입을 열었다.
“한등, 네 출신이 어딘지 기억하느냐? 네 가문의 조상은 말이나 키우고 살던 말노비였다. 안서 사람에게 끌려가던 것을 본 왕의 증조부께서 구해 데려와 목숨을 붙여 놓았었지. 네 조부도, 아비도, 너도 다 이 루씨 가문이 비호해가며 먹이고 재웠고, 공부시켰으며 무공을 가르쳤다. 네가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너희에게 공적을 쌓을 기회를 줬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본 왕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그렇다면 넌 목숨으로 갚아야 할 빚이 있지 않겠느냐?”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루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 서로 그런 관계였던 게야?’
‘그렇다면 인신계약서가 없던 것도 주인이 은혜를 베푼 것이었구먼?’
‘주인의 은혜를 입은 게 분명하구먼!’
한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더욱 꼿꼿하게 목을 세웠다.
“북양왕께서 하신 말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저희가 은혜 입은 분은 북양왕가지, 전하 개인이 아닙니다! 큰 은혜를 입었기에 저희는 대를 이어 북양왕가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조부께선 조열왕의 말을 끌었고, 부친께선 선대왕의 뒤를 따르며 전장을 누비셨으며, 저 또한 어려서부터 넷째 공자님을 따랐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왕께서 아우를 해치려고 하셨을 때 저는 루씨 가문 혈족인 넷째 공자님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북양을 떠났습니다. 전하, 저는 제 행위의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 목숨으로 갚아 배상해야 할 빚이 있단 말씀에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한등의 소신 가득한 발언은 신랄했지만 타당한 근거가 있어서 힘이 넘쳤다.
주변을 둘러싼 구경꾼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런 내막이 있었던 게로구먼?’
‘그렇다면 형제 사이의 은원이 있는 것이지, 저자가 주인을 배신했다고는 못하겠네.’
‘잠깐,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긴데?’
‘아, 북양왕!? 거 루씨 가문 넷째 공자의 형님?!’
‘알고 보니 형제지간의 다툼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구먼!’
길거리에서 구경하던 구경꾼들은 그제야 이 상황을 파악했다. 누군가는 과거의 일을 알지 못하는 새로 온 구경꾼에게 설명까지 해주고 있었다.
피식, 비웃음을 흘린 루혁이 한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한등아, 넌 가주(家主)가 무슨 뜻인지는 아느냐? 가주는 가문의 일족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너는 루씨 가문에 은혜를 입었고, 현재 루씨 가문의 가주가 본 왕이지. 말 그대로 본 왕에게 빚이 있다, 그 말이다. 알겠느냐? 네가 보호한다던 그놈은 제 형의 왕작을 빼앗으려 했다가 이미 가문에서 쫓겨났다. 그러니 루씨 가문과는 한 톨만큼도 관계가 없는 녀석이지. 가주를 배반하고 배신자를 보호하다니, 넌 은혜를 이리 갚더냐?”
한등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
“전하,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먼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셨기 때문에 저희 공자께서 모든 것을 밝히셨던 게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지은 죄를 덮으려고 친아우를 해치려고 하셨습니다! 가문의 선조들께 죄송해야 할 사람은 전하십니다!”
“닥쳐라!”
더는 듣지 못하고 고홍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하지 마라! 네 주인이 못된 마음을 먹었던 것을, 하늘 아래 모르는 이가 없는데 네까짓 게 놀리는 세 치 혀에 그 죄가 씻기기라도 할 것 같으냐? 누굴 바보로 아느냐! 전하께서는 장자로서 어린 날에 세자에 봉해지셨다. 그런 분께서 굳이 그런 짓을 할 리가 무엇이냐? 오히려 그자가……!”
“내가 무엇이 어쨌다는 것이냐?”
어디선가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구경꾼들이 홍해처럼 갈라지자 그 사이로 붉은색 관복을 입은 청년이 제 수하들을 대동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루씨 가문 형제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함께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비슷한 생김새였으나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우인 루안은, 형에 비해 더 문사에 가까웠고 유약해 보였다. 병약해 보이는 하얗고 깨끗한 얼굴만 봐선 한 주먹이면 곧바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공자님!”
루안에게 달려가 뒤에 시립한 한등의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송구함이 떠올랐다.
“제가 무능하여 공자의 예물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루안의 대답은 평온했다.
“못된 개들에게 공격을 당한 게 네 탓은 아니지. 가봐라.”
“네.”
드디어 형제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문사처럼 나약해 보이기만 했던 루안이 제 형과 비슷한 키에, 기세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루안의 입가엔 웃음이 걸렸으나 눈빛만큼은 만년설처럼 차가웠다.
루혁이 픽 웃었다.
“가문에서 쫓겨난 사람에게 본 왕이 감히 듣지 못할 말을 듣는군.”
덤덤한 웃음을 짓는 루안이었다.
“감히 듣지 못하셔야지요. 저 역시 인사치레나 한 것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 이 녀석이…….”
루혁에게서 분노가 줄기줄기 흘렀다.
“네가 그리 기고만장을 떠는 걸 보니 도성이라고 내가 진짜 널 어쩌지 못할 것 같으냐?”
“당연하지요.”
루안의 표정 어디에서도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유는 이러했다.
“천자의 발치는 치외법권이 아닙니다. 형님이 북양에 있을 때처럼 손으로 하늘을 가리면 가려지고, 흑백이 뒤바뀌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되먹지 못한 성미는 여전하구나.”
차가운 말들이 루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죄를 뉘우칠 생각은 없고, 아직 건넛산 보고 꾸짖기나 하고 있다니.”
“틀렸습니다.”
“왜, 또 본 왕을 중상이라도 하려고?”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건넛산 보고 꾸짖은 적은 없어서 말입니다. 저는 형님을 보고 형님 욕을 했으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시지요.”
루혁의 안색이 일순 변했다.
탕면을 먹으며 구경하던 관리 둘은 어느새 붙어 앉아있었다.
“북양왕은 입씨름을 영 못하는구먼? 저저, 거 말 몇 마디에 벌써 저리 화를 내다니.”
“문이 다르고, 무가 다르지 않은가. 조당(朝堂)에서 재상들 입도 다 막아버리는 자가 루안인데, 북양왕 같은 무인이 오죽하겠나?”
“요상하지. 루씨 가문은 대를 이어온 무장 집안인데 어디서 저런 것이 나왔을까?”
“어쩌면 그것 때문에 북양왕의 눈 밖에 난 것일지도 모르지…….”
그 말에 옆에 앉았던 동료의 시선이 그에게 날아왔다.
“뭔가?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가?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영문 모를 시선에 어리둥절해하는 관리에게 동료가 말했다.
“자네도 끝났구먼, 넘어갔어. 자네가 방금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무슨 소린지, 답답해진 관리가 제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북양왕의 눈 밖에 난 것일지도 모르지.’
“루안에게 넘어갔구먼. 자네 지금 북양왕이 루안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루안을 괴롭혔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관리가 잠시 침묵에 휩싸이더니 탄식했다.
“이런 젠장맞을……. 루안 저자의 혓바닥을 내 당해낼 수가 없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