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47)화 (247/385)
  • 247화. 북양왕

    한등의 입에서 차디찬 비웃음이 새었다.

    “마부 노릇이 뭐 어때서? 길이나 막는 개들보다야 훨 낫지!”

    시위 대장의 얼굴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그가 분노한 목소리를 토해내며 한등을 손가락질했다.

    “지금 누구더러 개라는 것이냐!”

    “대답한 사람이 아니면? 여기에 우리 말고 누가 있나?”

    시위 수장이 차갑게 웃었다.

    “입만 살아서는……. 망한 집안의 개로 사는 기분은 삼삼하신가?”

    한등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아픈 곳을 찔렀다고 확신한 수장의 얼굴에 미미한 쾌감이 번졌다.

    “눈에 힘주긴 뭘 그리 힘을 주나? 아무리 홉떠봐라, 그런다고 네놈이 배신자가 아닌 게 되겠느냐? 네놈이나, 양심 판 더러운 네놈의 주인이나!”

    “지금 누굴 보고 양심 판 더러운 놈이라 했느냐?”

    한등의 눈빛은 숫제 얼음장이었다.

    “누군지 몰라 묻느냐?”

    시위 수장의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른 척하지 말아라! 네 주인은 부친의 영정 앞에서 형과 반목한 자가 아니더냐! 은혜와 의를 잊고도 수치를 모르는 자!”

    철썩! 이에 한등이 채찍을 휘둘렀다.

    시위 대장은 뒤로 훌쩍 물러서더니 무서워하는 시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치려는 겐가? 아이고 무서워라! 때려 보시게! 때려 보라니까? 배신자에게 그런 담력이 있는지 내 한 번 봐야겠군!”

    한등이 차게 대답했다.

    “길이나 막는 못난 개들에게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 부족하다!”

    “그럼…….”

    시위 대장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한등이 먼저 움직였다. 말 궁둥이에 채찍을 후려갈기자 말이 고통에 찬 소리를 내며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경실색한 시위 대장이 번개처럼 옆으로 몸을 던져 간신히 말을 피했다. 심장을 쓸어내린 시위 대장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말로 위협하다니! 여봐라! 저 마차를 부숴라!”

    북양왕가의 시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마차를 에워싸더니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한등은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세우고 일어나 그들을 바로 밀어서 차냈다.

    “여긴 도성이다! 위협은 너희들이 하고 있지!”

    “도성이면 뭐 어쩌라고? 도성이라고 네가 배신자가 아니냐? 흥! 주인을 배신한 놈은, 때려 죽여야 마땅하지!”

    그렇게 양측에 불이 붙었다.

    북양왕가의 시위가 우르르 쏟아지자 한등이 거느린 종들도 맞서 싸울 것처럼 튀어나와 자세를 잡았다.

    순식간에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자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저들끼리 속삭였다.

    “이러다 싸움이 나겠구먼! 가서 순검사(巡檢司) 사람을 불러오게!”

    그 소릴 들은 시위가 머뭇대더니 대장에게 물었다.

    “대장, 어쩝니까?”

    순검사에 주눅들 가문은 아니었지만, 만수절을 하수(賀壽)하기 위해 도성에 들자마자 싸움을 일으켰다가는 북양왕 전하께서도 수습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변을 슥 한 번 둘러본 시위 대장이 말했다.

    “우리가 싸운다고 누가 그러느냐? 저 비열한 노비 놈이 우리 재물을 훔쳐 여기서 물 쓰듯 하고 있잖느냐? 가서 다 부숴라!”

    “네!”

    마차에 담긴 물건을 향해 시위들이 달려들자, 한등의 애가 바짝 타기 시작했다.

    “누가 네놈들의 재물을 훔쳤다더냐! 거짓말하지 말아라!”

    시위 대장이 차갑게 웃었다.

    “북양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갔더냐? 그게 우리 북양의 재물이 아니고 뭐냔 말이냐? 너조차 먹이고 키운 게 우리다!”

    “퉷!”

    한등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우리 공자님의 예물을,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부순단 말이냐!”

    “예물?”

    시위 대장의 눈이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오! 혼례를 한단 말이냐? 불효하고 불의한 인간이 부인을 맞는다고? 어디 쥐꼬리만한 봉록에 이리 많은 예물이 가당키나 하고? 이래도 우리 왕가의 돈이 아니란 말이냐! 가문에서 쫓겨난 주제에 무슨 염치로 북양왕가의 재산을 쓴단 말이냐! 부숴라! 모두 부숴!”

    물건을 사러 온 참이었던지라 데려온 수하도 몇 명 없던 한등이 북양왕가 시위의 적수가 될 리 없었다. 다기가 깨져나가고 옷감이 버려져 찢어졌다. 귀한 건과일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한등은 벌건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등의 노기가 폭발했다.

    “고홍! 이 쓰레기 새끼야!”

    * * *

    양고기 탕을 먹고 나오던 지온의 눈앞에 난장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로 한가운데서 벌어진 난장에 길 가던 사람들 모두가 옆으로 피하기 바빴다. 북양왕가의 마차는 떡하니 길 복판에 서 있었고, 마차 몇 대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바닥엔 온갖 상자와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무슨 일이지?”

    그때 서아의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손끝은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가씨, 한등이에요!”

    지온의 시선이 돌아가고,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한등이 있었다. 주먹다짐을 하는 한등의 얼굴은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관졸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멈춰라! 순검사에서 나왔으니, 다들 멈춰라!”

    순검의 품계가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정을 대표하는 이들이었다.

    그의 명령에 양쪽 모두 휘두르던 손과 발을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만수절이 코앞인데 여기서 이리 패싸움을 벌이다니, 폐하를 번거롭게 만들 셈이오!”

    순검사의 대장이 냉정한 얼굴로 고함을 쳤다.

    감히 받잡을 수 없는 죄인지라, 한등이든 시위 대장인 고홍이든 서로 팽하니 고개를 돌렸다.

    순검 대장이 미간을 구겼다.

    “말 하시오, 누가 이 난리를 벌인 것이오?”

    그러자 둘 다 서로를 가리키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저자요!”

    한등이 먼저 선수를 치듯 입을 열었다.

    “나리, 저는 주인의 명으로 물건을 사러 나왔을 뿐인데, 이리 어처구니없이 길에서 미친개를 만난 겁니다. 저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주인 나리의 물건을 다 부쉈어요! 이것 좀 보십시오, 길에 저리 다 흩어졌지 않습니까? 난동은 저들이 부린 것입니다!”

    순검 대장의 시선이 땅바닥을 온통 구르고 있는 상자들과 물건들로 향했다. 물건들은 다 부서지고 망가져 제 모양을 모두 잃어버린 참이었다. 값비싼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비단도 모두 상한 채 나뒹구는 것이, 손실이 얼마나 될지 알 수도 없었다.

    사고를 친 이들의 복색을 보니 왕후의 시위 같았다. 품계로만 보면 순검 대장인 자신보다 더 높겠지만, 그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도성 밖에서 온 왕후들은 도성에 들어오면 그렇게 고분고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이 커지면 황제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었기에 품계가 낮은 순검 대장에게도 책잡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었다.

    순검 대장의 시선이 이번엔 한등에게로 향했다. 도성에 사는 사람이 분명한 모습에, 순검 대장은 그의 편의를 봐주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검 대장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렇다면 저네가 난동을 부린 것이로군?”

    순검 대장이 시위 대장 고홍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는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소. 저놈은…….”

    “개인적인 원한이 있으면 이런 대로에서 싸움을 벌여도 된단 말인가? 거기에 물건까지 다 부숴놓다니, 대체 도성이 어떤 곳이라 생각하는 것이야!”

    “그렇지요!”

    한등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여기 도성이, 어디 시골에서 마냥 함부로 나댈 수 있는 곳이랍니까? 나리, 저자가 부순 물건들은 저희 공자의 예물이었습니다. 이 일로 공자님의 혼사를 망칠 수도 있으니 반드시 물어줘야 합니다!”

    바닥을 구르는 물건들을 보노라니 제 가슴이 다 아플 정도였기에 순검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은 목숨으로 갚고, 돈은 돈으로 갚아야지. 자네 쪽에서 부순 물건이니 배상하고 가시게.”

    고홍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그가 당장에 분노를 토했다.

    “지금 한 쪽 편만 드는 거 아니시오? 제대로 된 사정도 묻지 않고 우리더러 배상하라니! 저놈은 본래 우리 집안에서 도망친 노비요! 죽여도 무방한 놈인데 왜 우리가 배상을 해야 한단 말이오?”

    순검이 흠칫했다.

    ‘도망친 노비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한등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나리, 저놈의 헛소리는 듣지 마십시오. 저는 멀쩡한 양민일 뿐, 노비 명부에 적(籍)도 없습니다. 저희 공자께선 이미 오래전에 저들과 선을 긋고 나오셨습니다. 제가 저희 공자님을 모시는 일이, 저놈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순식간에 복잡해진 상황에 순검 대장은 둘이 무슨 사이인지 퍼뜩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금방 상황을 정리했다.

    ‘노비 명부에 적이 없다니, 그럼 도망친 노비는 아니로군. 그렇다면 법적으로 보호할 대상이로구나.’

    순검 대장이 고홍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도망친 노비라면 노비 문서가 있겠지?”

    고홍은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등의 이름이 적힌 노비 문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등은 이전엔 품계를 가진 북양왕부의 시위였다. 평범한 백성에겐 관리로 취급되는 이들인데 인신 계약서 같은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모두 대를 이어 북양왕을 모시던 이들이었다. 그게 가문의 노비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노비 문서가 없나?”

    순검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무고를 한 것인가?”

    고홍이 해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오. 저자는 분명 우리 가문에서 키운 노비가 맞소…….”

    “그럼 노비 문서를 내놓아라!”

    순검이 고홍의 말을 끊었다.

    “부아(府衙)에서 가문의 노비가 맞는지 가릴 때도 인신계약서를 확인한다. 그저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맞습니다!”

    한등은 맞장구를 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리께서 제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지요, 아무렴! 난 물건만 사고 가려고 했다! 내가 어디 너희에게 시비라도 걸었더냐? 시비도 네가 걸고, 물건도 네가 다 부쉈는데 배상을 안 하려고 해?”

    고홍이 반박하려던 찰나, 한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발뺌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길에서 너희가 먼저 시비를 거는 것을 봤는데!”

    그 말에 순검사의 일원 하나가 주변을 둘러싼 인파를 향해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인가?”

    그러자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담이 큰 자는 소리까지 쳤다.

    “맞습니다! 저 마부는 한쪽에 서 있었는데, 저들이 갑자기 달려들더니 때리고 부쉈습니다!”

    증인도 물증도 확실해지자, 순검 대장이 고홍에게 물었다.

    “더 할 말 있나?”

    “…….”

    고홍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거들랑 배상하라!”

    순검이 말했다.

    “어서 부순 물건값을 배상하라. 우린 또 다른 곳을 순찰해야 해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어!”

    “들었느냐? 들었느냐? 돈 내놔!”

    한등이 기세가 등등해 소리치자 고홍은 분노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에 한등이 고홍을 놀려댔다.

    “왜, 순검 나리께서 계신데도 또 싸우려고? 나리, 보셨지요? 제때 오지 않으셨으면 물건만 부숴놓는 게 아니라 사람도 같이 다 때려 부숴놨을 것입니다!”

    만수절을 코앞에 둔 시기라 누군가 일을 칠까 가장 경계하던 때였다. 순검 대장의 눈빛이 덩달아 험악해졌다.

    “돈 내놔! 돈! 돈!”

    한등이 수하 종들과 함께 소리치기 시작했다.

    “돈 내놔! 돈 내놔!”

    북양왕을 곁에서 모시는 시위인 고홍이 어디 가서 이런 취급을 받아봤겠는가? 열이 오를 대로 오른 고홍의 얼굴이 붉다 못해 까맣게 변했다.

    탕면을 먹으며 구경꾼 노릇을 하던 관리 둘은 급기야 탕면도 포기한 채 싸움 구경에 깊이 빠져들었다.

    “첫 번째 싸움은 북양왕이 졌구먼. 쯧쯧쯧, 전투력이 이것 밖에 안 돼서야.”

    “어디 북양왕 탓이겠나? 조정에서도 가리지 못하는 문제를 여기서 어찌 가리겠나? 그렇다고 다 보는 데서 제 주인 가문의 치부를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함께 있던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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