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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45)화 (245/385)
  • 245화. 자네, 온이와 혼인하게!

    두 번째 소녀는 피리였다.

    그러나 급하게 배운 게 틀림없었다. 그나마 앞에 연주했던 이는 연주에 막힘은 없었으나 이번엔 그마저도 툭툭 끊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음이 들쭉날쭉 고저를 오가는 통에 황제는 제 귀까지 막아야 했다.

    뒤이어 단상에 오른 이는 춤을 추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나풀나풀 춤을 추던 소녀의 옷이 찌익 찢어지고 말았다.

    황제는 웃음을 참느라 또다시 배를 쥐었다.

    그 후로 장기자랑은 서예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소녀들로 이어졌다. 앞선 규수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봐줄 만했다.

    소 부인의 펴질 줄 모르는 미간은 그녀의 불만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녀를 따라온 손 이모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소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손 이모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그녀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대장공주마마의 수양딸이에요. 조방궁에 있긴 해도 오늘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나 손 이모는 여전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염이 아내를 구하러 온 것이니 제대로 찾는 게 제일 중요하지!”

    소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모님, 대장공주마마가 있는 이상 우리는 저 아이 눈에 차지 않을 거예요.”

    손 이모가 입술을 삐죽였다.

    “난난, 너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니냐? 소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염이가 아직 완치된 게 아니라지만 그래도 중간 정도 되는 집안은 충분히 고를 정도가 되지 않아? 나도 저 소저가 누군지 알고 있다. 관료가문의 소저라지만, 가문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대장공주마마를 양어머니로 모셨다 뿐이지 그렇다고 저가 어디 귀한 집 소저라도 된다더냐? 황가에서 인정할 리가 없지.”

    그 말에 소 부인은 혹하고 말았다.

    손 이모의 말이 이어졌다.

    “그 정도 되는 가문이면 아무리 대장공주마마를 뒷배로 둔다 해도 왕후 가문엔 들어가지 못한다. 네 집안은 평범한 왕후 가문보다 위세가 훨씬 대단한데, 저 아이가 감히 오를 수나 있는 집안이겠느냐? 그러니까 가서 물어보거라. 혹시 모르지 않아?”

    소 부인은 손 이모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이모님 말이 맞지!’

    제 집안 노야는 금군을 손에 쥔 장군이지 않은가! 왕후들 역시 제 노야를 얼마나 공손하게 대하던가?

    ‘그런데 지씨 가문 출신에 부모까지 모두 잃은 아이가 감히 우리 집안을 무시해? 우리 염이가 아프지만 않았으면 너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봐!’ 

    소 부인은 자신감을 크게 얻어, 지온에게 말을 건넸다.

    “지온 소저, 자네의 재능이 출중하다 들었네. 우리가 즐길 복이 있을지 모르겠구먼.”

    지온과 함께 온 함옥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소 부인, 저희 사저께선 그저 가을 국화를 살피러 오셨을 뿐입니다.”

    소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충만 보여주면 되네. 모두의 눈과 귀를 넓혀주게.”

    상대가 예의 있게 나오는 것을 본 함옥이 지온을 보며 작게 물었다.

    “사저?”

    모두의 이목이 쏠린 것을 느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실력이라 소 부인께서 웃으실 것입니다.”

    “아닐세, 아니야. 편하게 하시게.”

    그러자 지온은 한쪽에 세워진 공후(*箜篌: 고대 악기 중 하나)를 사람을 시켜 가져오더니 곧 편하게 연주를 시작했다.

    둥둥, 음악이 울리자 순간 자리한 모두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독주(毒酒)에 귀가 멀 것 같았는데 단번에 귀가 맑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후의 음색은 가볍고 청량했다. 금보다 밝은 음색에 지온이 가볍고 단순한 선율을 가진 곡을 연주한 덕분에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 부인의 미소는 더욱 두드러졌다.

    ‘이거지! 저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집안 며느리의 모습이지!’

    저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경박하지 않고 우아한 자태를 보라!

    재주 자체가 아주 뛰어날 필요까진 없어도 저 정도로 숙련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난난, 어떠하냐? 내 보기에 가장 훌륭하구나.”

    손 이모의 속살거림에 소 부인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녀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장공주 쪽을 어찌해야 한담…….”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가 어찌 안단 말이냐? 언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염이를 생각해야지. 눈총 한 번 받는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않겠느냐?”

    제 아들을 위해서란 말에 소 부인은 결심이 섰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가서 말을 해야겠어요.”

    누각 위에 있던 황제가 루안에게 말을 건넸다.

    “비교하기 전엔 모르겠더니, 이리 보니 지온 소저가 제대로 된 명문가 숙녀인 것을 알겠구먼.”

    루안은 분위기를 맞추듯 그저 웃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루안의 모습에 황제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리 비교가 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걸 보니 역시 더 높은 수준의 집안과 맺어지길 바랐구먼.’

    황제의 시선이 다시 누각 아래로 향했을 때, 연회가 끝이 난 듯 소저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으음? 이렇게 끝난 건가? 어찌 된 게야? 소 부인이 누굴 골랐나?”

    옆에 있던 호은이 대답했다.

    “폐하, 소 부인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사옵니다. 아마 마음에 차는 소저가 없었던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더 구경할 게 없단 생각에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때, 눈썰미 좋은 어린 내시 소희가 소 부인이 향하는 곳을 포착하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래도 소 부인이 대장공주마마를 뵈러 가는 것 같사옵니다!”

    소 부인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한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향이…… 정말 그런가 보구먼.’

    까드득 해바라기 씨를 까먹던 황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설마 지온 소저가 마음에 든 것인가!”

    그 말에 돌연 미간을 구긴 루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난택산방으로 함께 가시겠사옵니까?”

    루안이 그리 말하자 황제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쉬운 게로구먼? 사실 지온 소저도 아주 괜찮은 규수야.”

    루안은 대꾸도 없이 황제를 데리고 난택산방으로 향했다.

    * * *

    난택산방 밖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소 부인과 대장공주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온의 칭찬을 한바탕 늘어놓은 소 부인은 역시나 말미에 지온 소저와 혼담이 오가는 집안이 있냐며 물었다. 그러자 대장공주는 대번에 얼굴을 굳히고 들을 것도 없이 혼담을 꺼내려던 소 부인을 퇴짜놨다.

    “이미 혼담이 오가고 있네. 소 부인 자네와 사돈이 될 기회는 없을 것 같구먼. 피곤하니 더 손님을 맞을 수 없겠어.”

    소 부인은 바로 난택산방에서 쫓겨났다.

    황제는 루안의 굳은 얼굴을 보며 그를 놀려댔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자네, 지온 소저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리 화를 낼 것이 무엇이야?”

    그러나 루안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 신은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사옵니다.”

    “음?”

    루안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폐하, 지난번 비적 사건을 기억해보시지요. 당시 굳이 나선 이가 누구였습니까? 소염이었습니다. 그러한 정황만 보아도 저들은 이미 지온 소저와의 혼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염이 지온 소저와 혼인하게 되면, 대장공주마마께서도 소씨 가문과 혼인으로 엮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미소가 떠올라있던 황제의 용안이 일순 굳었다.

    루안이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직접 보신 후사가 없는 대장공주께서는 수양딸을 크게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차후 폐하께서 일을 진행하실 때, 공주마마께서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한참 말이 없던 황제가 씹듯이 말을 뱉었다.

    “그런 것이었군.”

    황제는 자신이 대장공주를 크게 오해했다고 생각했다.

    ‘비적 사건은 형님께서 내 발목을 걸고넘어진 게로군!’

    이 혼사가 성사된다면 소씨 가문의 사돈이 된 고모님께선 분명 소씨 가문을 신경 써서 대할 게 틀림없었다.

    ‘그 말은 내 편이 아닌 저쪽에 서실 거란 말이지.’

    그러나 또 반대로 성사가 되지 않는다면 고모님의 분노가 제게까지 미칠 터였다. 그렇게 되면 고모님과 저 사이에 앙금이 생기지 않겠는가?

    ‘함정에 빠질 뻔한 것이야, 함정!’

    황제는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고모님 마음이 다소 풀리셨다고는 하나, 이대로 소씨 가문과의 혼약이 성사된다면…….’

    “루안!”

    황제가 돌연 루안을 불러세웠다.

    “자네 온이와 혼인하게!”

    루안이 흠칫 몸을 굳혔다.

    “폐하…….”

    “비록 그 아이의 집안이 부족하다곤 하나, 고모님께서 계시지 않은가? 자네를 섭섭하게 하시진 않을 것이네. 짐이 그 아이를 현군(*縣君: 천자가 황실 가문의 여인에게 내리는 봉작)에 봉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자네의 수준에 맞출 수 있을 것이야.”

    “으음…….”

    “소씨 가문에서 강하게 나왔다가 실패했으니 곧 다른 부드러운 방법으로 설득하려 들 걸세. 그 모습을 언제까지 봐야겠는가? 온이가 혼인해야만 내 안심이 되겠어. 마침 태비도 그 아이를 마음에 들어하니 잘 되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하오나…….”

    황제가 말을 이었다.

    “가진 재능을 생각하면 온이도 누구에게 뒤지는 아이가 아닐세! 짐의 후궁에도 그 아이보다 더 대단한 이가 없네. 자네가 정 안 되겠다면 어쩔 수 없이 짐이 그 아이를 데려가는 수밖에 없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루안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신도 따르겠습니다.”

    * * *

    황제를 배웅한 루안은 다시 난택산방으로 돌아왔다.

    덤덤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던 대장공주는 루안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물었다.

    “허락하던가?”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먼저 하라고 하셨습니다.”

    루안의 대답에 멈칫했던 대장공주가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못난 것!”

    대장공주의 그런 모습에 지온이 조심하라는 듯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대장공주의 기분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비록 내 아바마마께서는 태조만큼 영웅적인 기재는 아니셨어도 나라를 지킴에는 모자람이 없는 군주셨지. 그리고 오라버니께선 백성들을 아끼는 어진 분이셨네. 그래서 아바마마께서는 이십 년을 재위하시는 내내 백성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셨어. 그렇게 치리해온 대순의 강산이 끝내 저런 놈의 손아귀에 들어가다니…….”

    북양태비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선제께서 드물게 계셨던 어진 군주셨던 게야.”

    제 아비와 오라비가 떠오른 대장공주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인지상정? 가진 재능이 부족한 건 상관치 않아. 유약한 성격도 괜찮다, 이 말이다. 난 처음부터 그리 바라는 게 많지 않았어. 그러나 저 소심함을 좀 보거라. 저래서 어찌 황제의 자리에 앉아! 루안, 이 아이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때도 내 아무렇지 않았건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목불인견 수준일 줄이야!”

    “봉접!”

    북양태비가 대장공주의 아명을 부르며 주의를 주자, 대장공주가 고개를 흔들며 바람 빠진 듯 읊조렸다.

    “알았다. 내 그만하지.”

    이제 와 이런 말을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 대가 끊어지고 말았으니, 어차피 황위는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을…….

    ‘어쨌든 혼사는 무사히 진행할 수 있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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