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44)화 (244/385)
  • 244화. 군방연(群芳宴)

    지온을 떠올린 황제의 첫 번째 소감은 두 사람의 외양이 퍽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둘이 함께 서면 눈이 호강하듯 즐거울 터였다. 그리고 루안을 향한 동정심도 떠올랐다. 지온 소저가 비록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신분은 루안에 비해 조금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루안의 신분이라면 사실 더 높은 신분의 규수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그 일 때문에, 이리 몰락한 배경의 고아가 된 규수를 만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혼사가 이루어지면 루안이 대장공주의 사위가 된다는 것이로군?’

    비록 자기 배 아파 낳은 딸은 아니었지만, 고모님이 제 수양딸에게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며 아끼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리되면 루안을 더욱 가까이하시겠구먼?’

    황제는 입맛이 썼다.

    본래 자신을 도와주던 고모님과 지금은 소원해진 참이 아니던가.

    그동안 자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던 루안에게 대장공주라는 처가가 생긴다는 것은 앞으로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두 집안이 혼인으로 묶이면 짐과의 관계는 한층 멀어지는 게 아닌가?’

    황제는 그런 속내를 감추고 다른 말을 했다.

    “지온, 그 아이 역시 인재니 자네와 아주 잘 어울릴 게야.”

    그런데 루안의 표정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그 모습에 황제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왜 표정이 그런가? 싫은가? 전에 만났을 때 그래도 잘 지내는 것으로 보였는데?”

    “지온 소저는 당연히 훌륭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루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있던 유씨 가문과의 혼약이 있지 않았습니까? 둘째 공자와 혼약이 있다가 나중에 파기했던 소저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저와 혼담이 오가게 된 것인지…….”

    ‘역시 지온 소저의 가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게로구먼!’

    황제는 깨달았다. 유씨 가문의 둘째조차 탐착지 않게 생각하여 파혼당한 소저가 이제 자신과 혼담이 오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무애해각에 있을 당시, 루안 같은 인재가 있었던가! 태자를 제외하면 그가 최고였다.

    ‘나조차 루안보다 못한 수준이었지.’

    황제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독였다. 동정이 담긴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전과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고모님의 수양딸이 되었으니 신분으로 보면 그리 자네보다 떨어지는 것도 아닐게야.”

    * * *

    황제와 루안이 난택산방에 들었다.

    대장공주는 북양태비와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무척 즐거워 보였다.

    황제가 온 것을 본 두 사람은 몹시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켜 예를 갖췄다.

    대장공주가 말했다.

    “폐하, 어쩐 일이십니까? 찾아와 보고를 올린 이도 없어 실례를 했습니다.”

    황제가 방긋 웃었다.

    “짐이 보고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여유가 있어 고모님과 식사라도 한 끼 할까 하여 이리 찾아왔습니다. 이 조카와 밥 한 끼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장공주 역시 마주 웃었다.

    “폐하를 감히 누가 배고프게 하겠습니까? 잘 됐어요, 오늘 소고기가 있어 온이가 삶아 먹자고 하였습니다. 오신 김에 맛을 보세요!”

    마치 격조했던 적이 없었다는 듯, 서로를 대하는 ‘고모와 조카’였다.

    이윽고 돌아온 지온은 황제가 자리에 있는 것을 보자 역시 몹시 놀랐다.

    “폐하께서 납신 것을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소녀, 식사를 초라하게 준비한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 마음 쓸 것 없다. 고모님께서 드시는 것을 짐도 먹을 것이야.”

    그러며 황제는 대장공주와 서로 시선을 맞추고 웃음 지었다.

    그 모습에 지온도 다른 말 없이 평소처럼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자리는 주인과 손님들 모두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대장공주와 황제가 서로에게 음식을 올려주며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북양태비는 둘 사이에서 간혹 한 마디씩 던져 분위기를 맞췄다.

    식사자리가 끝나고 북양태비는 소화를 시키겠다는 핑계로 물러났다.

    그렇게 남은 대장공주와 황제, 두 사람은 찻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폐하, 무슨 심려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대장공주가 묻자 황제의 시선이 그녀의 어딘가를 배회했다.

    “고모님, 짐에게 화가 나시지 않으셨습니까?”

    대장공주가 되물었다.

    “화가 나다니요?”

    “지난번 온이가 납치당한 일 말입니다…….”

    대장공주가 덤덤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하신 일도 아닌데, 제가 왜요?”

    그녀의 반응을 본 황제는 내심 생각했다.

    ‘역시 내게도 화가 나셨군.’

    그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짐이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탓에 온이가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고모님께 미리 찾아와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정무가 너무 바빠 이제야 시간을 냈습니다.”

    황제의 대답에 대장공주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말투에도 진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강왕부가 폐하만 같았으면 이리 복잡다단한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제게 그리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는 황제십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사과하시다니요? 더욱이 신하의 죄를 폐하가 짊어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닫았던 대장공주가 다시 말했다.

    “폐하께선 이 고모의 친조카시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강왕부와는 몇 다리 멀지요. 이리 가깝고 먼 사이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 가족끼리 괜히 곁방 사람들 때문에 서로 사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과 꼭 맞는 소리에 황제가 편안히 숨을 뱉어냈다. 곧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짐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모후(母后)를 제외하면 고모님만이 제 유일한 가족이시지요.”

    대장공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상냥하게 물었다.

    “듣자하니 요즘 후궁이 평안하지 않다던데, 폐하께선 괜찮으신 겝니까?”

    그 일이 언급되자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고모님께서도 들으셨습니까? 평안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소란이 조금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크게 번지지만 않으면 됐습니다. 황후에게 좀 더 잘 챙기라 이르시면 됩니다.”

    황제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좀 더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대장공주가 오수(午睡)를 즐길 시각이 되어서야 얘기를 마쳤다. 밖으로 나온 황제는 회랑에 루안이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던 그때였다. 지온이 다른 한쪽에서 나오는 게 황제의 눈에 보였다.

    그녀가 나온 곳과 루안과 황제가 있는 곳의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었던지라 지온은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했다.

    마침 지온은 선고로 보이는 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황제의 귀가 쫑긋 섰다.

    “…난지원에 사람이 너무 많던데, 조방궁에 남은 가을 국화 대부분이 거기 피어있잖아요. 분명 꽃이 많이 상할 거예요.”

    지온이 대답했다.

    “상하면 상하는 대로 어쩔 수 없지요. 능양사숙께서 내어주시겠다 약속하신 일인데 이제 와 물릴 수도 없고…….”

    선고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능양사숙은 정말 무슨 생각으로 거길 빌려주신 것인지 모르겠어요. 소씨 가문이 며느리를 고르는 게 우리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지온이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참으세요. 능양사숙께서도 조방궁을 생각하셔서 하신 일이겠죠. 귀한 분께서 하는 부탁은 거절하기도 어렵거든요.”

    “국화를 다 상하게 만들어서 향을 만들 가을 국화가 모자랄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가만히 고민하던 지온이 대답했다.

    “우리가 가서 지켜보고 있는 게 좋겠어요.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면 그래도 좀 더 나을 테니까요.”

    선고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 같이 가요, 사저!”

    두 사람이 멀어지자 황제가 루안에게 물었다.

    “우리도 가야겠지?”

    루안이 대답했다.

    “가시지요, 폐하.”

    * * *

    일각 후, 조방궁 선고의 안내로 조용히 난지원에 도착한 황제는 빈객들이 잠시 쉴 수 있게 마련된 작은 누각으로 들어섰다.

    소희가 해바라기 씨와 땅콩을 올리며 황제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마음으로 누각에 자리를 잡은 황제는, 차와 다식(茶食)을 즐기며 시끌벅적한 난지원을 지켜보았다.

    난지원에는 소 부인이 꽤 고생하여 준비했을 법한 제대로 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난지원에는 다리가 짧고 상판이 긴 탁자 수십 개가 놓여 있었는데, 탁자 위엔 과일이 올라간 접시와 간식, 그리고 술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신분을 알 수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꽃 같은 소녀들이 탁자 주변에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던 황제는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혹여나 아래에서 소리를 들었을까 싶어 얼른 제 입을 막았다.

    그도 사실 이런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황실의 종친은 이런 연회를 빌어 혼담을 알아보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보았던 군방연에, 죽어라 음식을 먹어대는 소저는 없었다.

    “하하하하! 삼일 밤낮을 굶기라도 한 것인가? 저리 먹고 배가 부르면 제대로 재주를 뽐내지도 못할 텐데, 그건 걱정이 안 되는 게야? 하하하……!”

    루안 역시 작게 웃음을 지었다.

    “소 부인이 가문에 선을 두지 않았으니 이곳에 있는 많은 소저가 작은 가문에서 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리 제대로 만든 간식들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더구나 벌써 10월이었으니 과일은 보기 힘들 때였다.

    “아이고야! 어딜, 어딜 긁는 게야?”

    한 소저가 엉덩이를 벅벅 긁는 모습을 포착한 황제는 거의 배를 붙들고 바닥을 구를 지경이었다.

    ‘촌구석 졸부의 며느리 찾기도 아니고! 소 부인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로구먼!’

    그렇게 난지원을 살핀 황제의 눈에 서서히 가까워지는 지온이 보였다. 황제는 선녀를 본 것 같았다.

    ‘역시 평소에 뭘 보느냐가 이렇게 중한 것이로군.’

    후궁에 있는 미인들에 익숙했던 황제는 전에 지온을 보았을 때도 그저 예쁘다고만 생각했을 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소 부인이 준비한 군방연에 몰린 규수들을 보고 나니, 지온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소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 부인은 처음엔 모인 규수들이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했으나 지온이 오자마자 바로 다른 이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지온을 두고 강왕부가 뭐 저런 아이를 며느리로 맞으라는 것인지 불평했던 그녀였지만, 지금 지온을 보고 나니 아주 좋은 권유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외모며, 자태하며…….’

    아무리 뭐라 해도 지온 역시 관료 집안 출신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녀의 조부는 심지어 재상까지 지냈었다. 전통 있는 가문의 규수인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다.

    소 부인은 속이 쓰렸다.

    ‘아깝다, 아까워!’

    자신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 해도 대장공주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흥이 폭삭 식은 소 부인이 입을 열었다.

    “꽃들이 만발했으니, 가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 재주를 뽐내 볼 소저가 계신가?”

    서로 시선을 맞부딪힌 소저들 중 몇이 경쟁적으로 임했다.

    “제가 보이겠습니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고요!”

    “그게 뭐 어쨌다고요?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먼저지!”

    싸우기까지 하다니……. 루안과 황제는 웃느라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끝내 얼굴이 꺼멓게 죽은 소 부인이 먼저 말한 규수를 가리켰다.

    그 소저는 금을 연주했는데, 그 곡은 무척 유명한 고산유수(高山流水)였다. 전주를 연주하는 것을 듣던 황제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 짧은 시간에 이미 몇 번이나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들을수록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소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녀의 집안은 장사치 집안으로 문턱이 높은 집은 아니었지만, 고관댁으로 시집을 가기 위해 어려서부터 금기서화를 배워 실력이 부족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첫 번째 소저가 연주하는 곡을 억지로 듣던 그녀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연주가 힘든 것 같으니 그만 쉬는 게 좋겠구먼. 가서 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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