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42)화 (242/385)
  • 242화. 폐하께 드릴 설명

    지온이 조방궁으로 돌아와 보니, 대장공주와 함께 북양태비와 루안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대장공주가 물었다.

    “한씨 가문은 이제 괜찮은 게야?”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제게 지참금까지 챙겨주시겠다 하시던걸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갈한 집안이다. 네게도 잘하니 앞으로 잘 챙겨주거라.”

    “네.”

    지온이 대답하자 이번엔 대장공주가 루안 모자(母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수절이 지나면 곧 연말인데, 준비는 다 된 것이야?”

    북양태비가 말했다.

    “금전이야 내 챙겨온 것이 적지 않아 무리가 없겠지만, 좋은 물건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찾아야 하는데, 하필 시일이 너무 촉박한 게 문제다. 제대로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말에 루안의 미간이 와락 좁아졌다.

    “어머니, 형님께 말도 하지 않으시고 가출까지 하셨으면서 금전까지 챙겨올 시간이 있으셨단 말입니까?”

    북양태비가 적지 않다고 말할 정도라면 거금일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은표로 바꾸는 것만 해도 적잖이 힘이 들었을 텐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만 봐도 사전에 모의가 있었던 게 확실하지 않은가? 대체 얼마나 오래 준비한 것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북양태비가 마른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네게 주려고 스무 해나 준비한 혼인 자금을 챙겨오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면서도 북양태비가 진한 아쉬움을 품은 채 말을 이었다.

    “왕부에 있는 사고(私庫)에 네가 혼인할 때를 기약해 챙겨둔 좋은 물건이 많은데, 지금은 가져올 수가 없으니…….”

    대장공주가 말을 받았다.

    “물건이야 구색만 맞추면 되지. 우리 온이도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아이가 아니다. 아니 그러냐?”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녀 같은 자신이 그런 물질적인 것에 집착할 리가 있겠는가? 어차피 손질 몇 번이면 돈이야 벌 수 있는 것을!

    “다른 게 또 있던가?”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루안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 드릴 설명을 생각해 놔야 할 것입니다.”

    * * *

    한등이 일터로 돌아가는 길에 물었다.

    “공자님, 바로 폐하를 찾아가 보고를 올리면 폐하께서 허락하실까요?”

    루안이 대답했다.

    “아마 반대하지 않으시겠지.”

    “그럼 바로 찾아가시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루안을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선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분이시다.”

    한등이 움찔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말인즉슨, 곧바로 찾아가 말씀을 드리면 황제가 불안을 느낄 수 있단 뜻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수많은 대가를 치르고서야 간신히 황제가 자신을 신임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루안이 일터에 도착하여 들어가자 고찬이 루안에게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대인, 금일 보실 장주(章奏)입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찬은 바로 물러나지 않고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우물쭈물했다.

    “뭐지? 또 할 말이 남았나?”

    머뭇거리던 고찬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일 휴가를 쓰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지?”

    “서… 선을 봅니다.”

    루안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 조금 늦게 들어온 한등이 그 소릴 듣고 득달같이 입을 열었다.

    “선? 서어언? 그 얼굴로 선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한등의 말에 고찬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내 외모가 어때서? 나도 갖출 것 갖춘 멀쩡한 젊은 사내란 말이다! 내가 선을 왜 못 본단 말이냐?”

    한등은 눈만 끔벅였다.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뱃속에 그득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멀쩡하다라…… 하긴 특별히 크거나 작지 않은 코도, 눈도 전부 제자리에 있긴 하니 멀쩡하긴 하지.’

    다만 얼굴 전체를 덮다시피 한 수염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눈만 부릅뜨면 애 하나 울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공자님이 형부에 있을 때 사건 처리에 고찬을 자주 대동했던 이유도 겁주기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갖출 것 갖춘 젊은 사내라…….’

    곰곰이 생각하니 한등이 올해 스물 예닐곱 된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은 이제 막 과거에 합격하는 나이에 벌써 육 품 관직에 오른 상태니 갖출 것 갖춘 젊은 사내란 말은 맞았다.

    하지만…….

    “서른 넘었던 거 아니셨습니까?”

    지나가다 고찬의 말을 들은 막료 하나가 물었다.

    고찬의 얼굴이 더욱 까맣게 죽었다. 목소리가 덩달아 버럭 커졌다.

    “내가 어딜 봐서 서른이 넘어 보인단 말이야!”

    ‘어딜 봐도 그런데…….’

    막료는 진심을 꿀떡 삼키고는 하하 웃었다.

    “고 대인께서 늘 수염을 기르고 계셔서 나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 젊으십니다!”

    그리고 막료는 재빨리 자리에서 내뺐다.

    낄낄 웃은 한등이 은근하게 돌려 말했다.

    “수염이라도 밀고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안 그러면 상대가 자식을 돌볼 후처라도 찾는 줄 알 수도 있단 말입니다.”

    고찬의 주먹이 파르르 울었으나 루안은 그의 말을 긍정했다.

    “수염을 미는 게 좋겠군. 지난번 부아에서 최근 민정을 보고하러 왔을 때 자네를 보자마자 심문하려는 줄 알고 착각해 내 다리를 붙들고 울지 않았나? 나도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

    고찬은 제 상관이 무심결에 꽂은 비수가 가슴에 박혀 하마터면 울분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풀 죽은 얼굴의 고찬이 수염을 밀기 위해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떠나려던 그때, 루안이 문득 떠올랐는지 물었다.

    “소 공자의 혼사는 어찌 됐지?”

    고찬의 걸음이 멈췄다.

    “소달의 아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지온 소저를 납치해 데려가려던 계획이 실패하고는 한동안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루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 찾아 혼사를 다시 거론하도록 소씨 가문에 바람을 넣지.”

    고찬이 움찔했다.

    “대인, 왜…….”

    “바람을 제대로 넣게. 웬만하면 도성 전체가 알도록 크게. 백성들이 소씨 가문이 제 아들의 부인을 고르고 있단 것을 모두 알 수 있도록.”

    그제야 고찬은 깨달았다. 마치 비를 간택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라는 의미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한등의 눈에 관졸이 겨드랑이 사이에 회색 종이 몇 장을 끼고 지나가는 것이 들어왔다. 한등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공자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루안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책장 앞으로 이동한 한등이 책을 뒤적이다 회색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루안이 종이를 보았다.

    “민보(民報)?”

    “네. 요즘 이 민보(民報)가 얼마나 유행인지 모릅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소식을 담아 발행하는데, 어느 집안 형제가 재산을 가지고 싸우다 벌금을 물었다더라, 혼례에 두 집안 싸움이 나 찢어졌다더라 하는 소식부터 어느 점포가 할인하는지, 어느 음식집에서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났다더라 하는 소식이 그득해 백성들 사이에 크게 환영받고 있습니다. 공자님, 소 공자의 그 소식을 여기에 올리기만 하면 도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거라 이 말입니다.”

    루안이 민보(民報)를 뒤적이다 아래 찍힌 서책방의 표식을 발견했다. 

    “이건…….”

    “지온 소저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운영하는 그 서책방입니다.”

    한등의 눈이 휘었다.

    “말만 전하시면 된다~ 이 말입죠.”

    * * *

    소 부인은 한동안 가문의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지난번 강왕세자의 지시로 소염에게 짝을 지워주려고 일을 벌였다. 그런데 강왕비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면서 소달은 강왕세자에게 호되게 욕을 먹고 말았다.

    억울하게 욕을 들었다고 생각한 소달은 집으로 돌아와 그 원망을 모두 제 부인에게 풀었다.

    소 부인은 소 부인대로 화가 났다.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처음부터 지온 그 아이를 며느리 삼고 싶지도 않았는데, 위에서 시켜 억지로 한 일이 아니었던가? 제 아들이 머리를 다쳐 모자라져 좋은 신붓감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거기다 그 지온이란 소저가 다방면에 출중하니 억지로 동의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획이 실패한 것을 다 자신의 탓이라 몰다니,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뭐하나 참견한 것도 없이 그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바뀔 줄 자신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강왕부에서 제때 입을 막아 사람들은 이런 사정까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추문에는 휘말리지 않게 된 것이다.

    소 부인이 침상 머리에 기대어 심심함을 참고 있을 때, 시녀가 찾아왔다. 손 이모가 방문했단 소식이었다.

    손 이모는 소 부인의 친정 쪽 친척이었다.

    소 부인의 친정은 부유한 상인 집안으로, 돈만 많을 뿐 어디 가서 체면을 차릴 수 있을 만한 집안은 전혀 아니었다.

    손 이모의 부군 댁은 몰락해 더욱 볼품이 없었다. 그나마 평범한 백성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 종종 찾아와 돈이나 가져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소 부인은 친정 집안의 친척들을 좋아했다.

    친정 집안사람들이 입안의 혀처럼 굴며 듣기 좋은 말만 해주니, 듣다 보면 마음이 다 풀렸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온 손 이모는 소 부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과장된 표정과 함께 침상 앞으로 다가왔다.

    “난난아! 이게 무슨 일이야? 어디가 아픈 것이냐? 심하진 않고? 얼굴 창백한 것 좀 보거라. 이모의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소 부인은 기운 없이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모님. 저는 괜찮아요, 조금 피곤한 것뿐이에요.”

    손 이모는 얼른 그녀의 손을 붙들고 살갑게 말했다.

    “이모가 몸을 잘 챙기라고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 가문이 워낙 크지 않으냐?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총관들에게 맡기거라. 통령 부인이 어찌 그런 것까지 다 하려고 해?”

    소 부인이 한탄했다.

    “그리하고 싶어도 일이 워낙 많으니 다른 사람 손에 맡기면 안심이 안 되는 것을 어쩌겠어요? 후, 사실 우리 염이에게 부인을 찾아주고 집안일도 넘기려고 했거든요. 그렇게 편하게 살려 했더니, 하필…….”

    손 이모가 물었다.

    “염이의 혼사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냐? 네 부군의 관직이 그리 높으니 딸을 밀어 넣으려는 집안도 많겠지. 네 눈이 너무 높은 게야. 천천히 고르면 된다.”

    소 부인은 소염의 혼사를 떠올리자 더욱 슬퍼졌다.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부족하면 노야의 눈에 안 차고, 좋은 집안은 좋은 집안대로 사람을 골라대니. 우리 염이 병이 아직 완전히 좋아지지 않아 도리어 다른 집안에서 피한다니까요.”

    그러자 손 이모가 기다렸단 듯 말했다.

    “그거야 사람을 잘못 찾고 있으니 그런 게지.”

    소 부인이 멈칫했다.

    “무슨 말이세요?”

    “그리 찾아다니면, 몇이나 찾아볼 수 있겠느냐? 눈 높은 집안이라고 어디 다 훌륭하긴 하고? 눈은 높지 않으면서 수준은 맞출 수 있는 집안을 찾아야지.”

    소 부인이 벙벙하게 물었다.

    “그런 집안을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죠?”

    손 이모가 웃음을 지었다.

    “소문만 내면 되는 게 아니겠느냐? 그럼 다른 집안에서 너를 찾아올 테니, 네가 직접 찾아다닐 필요도 없을 게다. 그리 찾아오면 너도 천천히 고를 수 있고 말이다. 집안은 너무 보지 말고. 어쨌든 인품이 더 중하지 않아? 그리 찾은 며느리면 네 말에 얼마나 잘 따르겠느냐?”

    소 부인은 손 이모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집안은 이제 노야도 가리지 않으시지.’

    아들이 이리됐는데 어쩌겠는가? 그래도 가문의 후사를 잇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손자가 태어나 손자를 제대로 교육하면 소씨 가문도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소 부인은 말이 나오자마자 곧장 매파 몇을 불러서 소문을 퍼트렸다.

    그녀가 부른 매파는 어찌나 능력이 출중한지, 그 소식을 곧장 민보에 올렸고 도성에 소씨 가문에서 며느릿감을 찾는단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