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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41)화 (241/385)
  • 241화. 직접 눈으로 본 것

    한참을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던 한 노야가 물었다.

    “자네, 그 말이 사실인가?”

    루안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가?”

    루안이 대답했다.

    “한 대인,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해 제가 천릿길을 달려 도성에 들어 그의 죄를 고발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러나 제가 가진 증거가 없었던 것도 그렇고, 그가 먼저 선수를 쳐 제가 불효하고 불의하단 소문을 사방에 퍼트렸습니다. 그런 상황에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기억을 더듬으니 한 노야는, 정말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한 노야의 의심은 이미 반쯤 씻겨 나가 루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훨씬 따듯해졌다.

    “아무리 그랬다 해도, 자네가 그네들과 똑같이 행동할 건 뭔가.”

    한 노야가 말했다.

    “자네가 형부에서 한 일들을 생각해보게. 그때 일로 생긴 추문이 아직 들리지 않는가?”

    루안이 물었다.

    “어떤 추문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금씨 가문의 그 사건을 자네가 맡지 않았나? 교 장군의 내통 사건도 그렇고 주 시랑의 뇌물수수 사건도 있네. 자네가 아무리 위로 올라가고 싶었어도 다른 이를 해하는 것으로 윗전에 잘 보이면 안 됐던 것이네!”

    그러나 루안의 대답은 한 노야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에 관한 일들은 제가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대인께서 곧 형부에 가시게 될 테니, 직접 사건 문서를 찾아보시지요. 그러면 제가 그들을 모함한 게 아닌 것을 아실 겁니다.”

    멈칫한 한 노야가 믿을 수 없단 듯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 말은 그들의 죄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인가?”

    “죄명만으로 보자면 해명의 구석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마음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청백한 이들이었다면 저 역시 그 사건들을 확실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허면…….”

    제 할 말을 마친 루안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허리를 굽히며 긴 읍을 올렸다.

    “다른 질문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니…….”

    휙 돌아 멀어지는 루안을 바라보는 한 노야는 혼란스러웠다.

    ‘마음에 죄책감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구는 것을 보니, 진짜 그 말이 사실인 게야?’

    루안이 막 비림을 나가려던 그때, 한 노야는 얼른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그가 당장 루안을 불러 세웠다.

    “기다리시게!”

    루안이 자리에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형부에 자리가 난 것 말일세. 자네가 도운 것인가?”

    루안이 빙긋 웃었다.

    “상서(尙書) 어른께 말 한마디 건넸을 뿐입니다. 억지 천거라 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 그들의 눈에 든 것은 한 대인께서 충분한 경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바르고 곧은 성품을 가지셨으니 그 직에 잘 맞으십니다.”

    두 손을 모아 공수한 루안은 곧바로 비림을 벗어났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한 노야가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묻지 않았으면 내게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게 아닌가? 그런 일을 해놓고 어찌 생색도 내지 않은 건가…….”

    도움을 주고도 떠벌리지 않는 모습이 기이해 보였으나…… 보기 좋았다.

    * * *

    한 노야가 돌아왔을 때, 마침 노부인도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정씨는 지온과 함께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섰다. 떠나는 길에 노소를 불문하고 마주치는 선고마다 지온을 향해 꼬박꼬박 사저라 불러가며 무척이나 공손히 예를 갖췄다.

    조방궁 입구에 도착했을 때, 지위가 높은 도복 차림의 진인이 다가와 빙긋 웃으며 지온에게 말을 건넸다.

    “오송원에서 제를 모두 끝낸 것인가? 사질이 고생이 많았구먼.”

    지온 역시 웃으며 마주 대답했다.

    “능절(凌絶) 사숙, 경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시는 길입니까? 오늘 강의는 잘되셨는지요?”

    “그저 그랬네. 아 참, 선무후(宣武侯) 부인이 사질의 안면향(安眠香)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셔서 그러는데 혹 사질이 여유가 있거든 얼마라도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을요. 필요하시면 함옥 사저에게 말씀만 해주시지요.”

    능절진인이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고마워, 사질.”

    한씨 가문 사람들은 그저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만 도록도록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사질을 대하는 태도란 말인가? 두 사람의 신분이 바뀐 게 아니고?’

    ‘집안에서 쫓겨나 조방궁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던 그 불쌍한 아이는 어디 갔냔 말이야?’

    능절진인이 떠나고 지씨 가문의 차남가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먼저 가보마!”

    위씨가 잔뜩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거든 바로 사람을 보내 알려주거라.”

    지온이 몸을 낮추며 인사했다.

    “둘째 숙부, 숙모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당연한 것이지!”

    연신 손사래를 치며 지온의 눈치를 보던 위씨는 딱히 다른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곤 그제야 안심하며 돌아갔다.

    “…….”

    한씨 가문은 이제 더 놀랄 기운도 없었다.

    삼남가와의 인사는 그나마 상식적이었다. 다만 삼남가와 지온의 관계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친밀해 보였다.

    한 노야는 비림에서 있었던 루안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자신을 데려간 이가 삼노야 지익이었으니 그것만 보아도 서로 믿음이 돈독하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들었던 그 소문이 전부 틀렸던 모양이로구나.’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헛소문을 냈단 말인가! 그 때문에 자신들만 웃긴 광대놀음을 하게 되지 않았는가!

    * * *

    마차에 오른 노부인이 장막을 걷으며 정씨에게 말했다.

    “오늘 고생이 많았다, 그만 들어가 보아라. 온아, 시간이 나면 외갓집에도 자주 놀러 오거라.”

    그러겠다고 대답한 지온은 멀어지는 한씨 가문의 마차를 고개 숙여 배웅했다.

    “이 일도 대충 해결이 된 것 같지?”

    정씨가 묻자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돌아가 여쭤보시면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 * *

    그날 밤, 한 노야는 노부인의 방에 들렀다.

    “어머니, 온이의 혼사말입니다…….”

    그가 뭐라 설득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뜻밖에 노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허락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한 노야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네? 반대하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노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북양태비마마께서 내게 직접 해명을 하셨다. 어미가 고민하다 보니 그래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더 중히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더구나.”

    “어머니…….”

    “그들이 우리 온이에게 어찌하는지 너도 보지 않았느냐? 중간에 오해가 많았던 게지. 역시 다른 사람 말만 들어서는 진실을 알 수 없는 법이야.”

    한 노야가 물었다.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시게 되신 것입니까? 북양태비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확실하게 사정을 말씀하시진 않고 그저 루안 그 아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주더구나.”

    노부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듣다 보니 북양왕위를 계승 받는 과정에 설명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던 것 같더구나.”

    한 노야는 루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게 뭔가 있는 게 아니고 뭐겠는가!’

    노부인이 체에 있는 잠두를 까며 조용히 말했다.

    “현아, 나는 어미라 어미의 마음을 잘 안다. 북양태비께선 분명 루안 그 아이가 너무 안쓰러워 위험을 무릅쓰고 도성까지 온 게야. 제 어미가 그 정도로 마음을 쓸 정도라면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

    “잘 생각해 보거라. 루안, 그 아이만큼 뛰어난 인재가 명성마저 좋았다면 어디 지온에게까지 기회가 왔겠느냐? 아마 집안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것이야. 더구나 오늘 우리가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느냐? 공주마마도, 지씨 가문도 모두 온이에게 그리 잘하는데 루안, 그 아이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감히 허락하였겠느냐?”

    거기까지 들은 한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락하도록 하지요.”

    그가 제 어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어머니를 찾아온 것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미 두 집안 사이에 말도 다 오갔는데, 저희가 반대를 해봐야 혼사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를 이리 정중하게 초대한 것도 그렇고, 직접 만나 솔직하게 말을 전해준 것도 그렇고 이런 진심 어린 대우도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노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 역시 루안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좀 하였습니다. 왕위를 놓고 제 형과 다툰 일에 대해 들었는데, 아무래도 저희가 오해를 한 것이 확실한 듯합니다.”

    한 노야는 들었던 이야기를 노부인에게 전했다. 그제야 노부인은 북양태비의 말이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런 곡절이 있었으니 태비마마께서도 말씀을 제대로 하지 못하셨던 게지. 정말 외부인인 우리가 함부로 시비를 논하기 어렵겠구나.”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잠시 말을 머뭇거리던 한 노야가 다소 부끄러운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형부의 낭중 자리 말입니다. 그것도 정말 그가 도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말도 꺼내지 않다가 제가 물으니 그제야 인정을 하였습니다. 어머니, 도움을 주고도 대가조차 바라지 않는 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요?”

    * * *

    며칠 후.

    한씨 가문은 정씨를 불러 혼약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노부인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보석을 가지고 나왔다. 은루(*銀樓: 금은방)에 맡겨 지온에게 머리 장식을 해주겠단 생각이었다.

    정씨와 함께 방문한 지온은 노부인으로부터 제 몸의 모친이 시집가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 어미가 시집을 갈 때만 해도 말이다, 가문의 가산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 지참금도 면치레만 간신히 해서 보냈다. 그래서 이 외할미는 손녀가 시집을 가게 되면 그때 부족했던 것까지 다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었지.”

    노부인이 지온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온이가 언제 이리 커서 시집을 가게 됐누. 네 어미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구나.”

    노부인이 눈가를 찍어내며 지레 한 부인을 막았다.

    “슬퍼 우는 게 아니니 말릴 것 없다. 기뻐 우는 게야!”

    다들 웃음을 짓자 한씨 가문 이부인 역시 함께 미소를 지었다. 다만 미소가 아주 자연스럽지는 못했다.

    지씨 가문이 몰락하여 지온이 어디 가서 대우도 못 받는 처지라 알고 있었을 때만 해도 그녀를 며느리로 들여봐야 제 아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던 그녀였다. 그래서 혼인에 무척 부정적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조방궁을 다녀와 대장공주가 지온을 얼마나 아끼는지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난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온은 아무도 원치 않는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누구든 탐을 내는 꿀 절인 향긋한 밀전인 것이다.

    제 아들이 지온을 신부로 들였더라면 대장공주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겼을 테니, 앞으로 청운을 타는 것도 반은 이미 성공한 셈이 아니었겠는가?

    ‘아쉽구나, 아쉬워. 저 향긋한 밀전을 얻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됐네.’

    루안이라는 자는 나이도 젊은 사람이 벌써 높은 관직에 앉아 있었다. 앞으로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이부인은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이렇게 혼인으로 묶이게 되었으니 앞으로 좋은 연줄을 하나 얻은 게 아니겠나?

    그녀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치열하게 싸우는 터라 이부인의 표정이 삐뚜름하게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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