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40)화 (240/385)

240화. 이렇게 속이기 쉬워서야

북양태비는 후원에 있는 정자에 앉아 있었다.

시월도 이미 중반을 넘어선 터라 피었던 꽃들은 대부분 떨어지고, 느지막이 핀 국화만이 마지막 꽃잎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노부인과 한 부인이 오는 것을 본 북양태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북양태비는 예를 차리려는 두 사람을 만류했다.

“노부인, 그리 예를 차릴 것 없으니 어서 와 앉으시게.”

어색한 태도로 노부인이 자리에 앉았다. 서로 차를 한 잔씩 돌아가며 들이켰을 때, 북양태비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노부인도 예상했으리라 생각하네. 나는 부드럽게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돌리지 않고 말하겠네. 노부인이 이 혼사를 여러 가지로 우려하고 있다 들었는데 오늘 직접 자네 얼굴을 보고 내 묻겠네. 우리 루안이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가?”

‘이런 질문은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설마하니 당신 아들의 인품이 문제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머뭇거리던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태비마마, 용서하십시오. 공자께선 출중한 외모며 뛰어난 능력까지 갖추신 만나기 어려운 분이 맞습니다. 다만 아무리 고심을 하여도 양친을 잃은 온이에겐 과분한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북양태비가 웃었다.

“노부인은 참으로 겸손하구먼. 부모를 여읜 것이 어디 온이의 잘못이던가. 온이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선하네. 오히려 우리 아이가 온이에 비해 부족하지.”

북양태비가 제 외손녀를 이리 높게 봐줄 줄 몰랐던 노부인은 어리벙벙해지고 말았다.

노부인이 말이 없자 북양태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네가 우려하는 것은 따로 있지 않나? 나 역시 돌려 말하지 않겠네. 녀석이 가문에서 쫓겨난 일로 명성이 나쁜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내 바로 그 일 때문에 이리 도성까지 찾아온 것이야. 그 아이의 혼사를 챙기러 말이네. 노부인, 내 자네 집안에서 가장 부러운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노부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북양태비의 창연한 눈빛이 보였다.

“바로 화목이네. 우애 좋은 형제의 화목한 집안 말일세. 우리 아이들도 과거엔 그러했었지. 세상일이 알 수 없다지만,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보기엔 왕으로 봉해진 루씨 가문이 존경스럽고 영광스러워 보일 수도 있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도 과히 많다네.”

노부인은 북양태비의 말을 곱씹었다.

‘태비마마께선 지금 두 형제간의 불화에 숨겨진 내막이 있다고 돌려 말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아우가 되어 형님의 작위를 빼앗으려고 든 것은 여전히 그릇된 일이 아니던가?’

북양태비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루안 저 녀석은 어려서부터 이상한 구석이 있었어. 루씨 가문은 대대로 북양을 수호하는 가문으로서 여아조차 창검을 들고 말을 타는 집안이네. 그런데 저 녀석만 문(文)을 좋아해 가까이하기에 열 살 되던 해 아이를 무애해각에 보냈다네. 그런데 대뜸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게 아닌가? 무애해각에 학자로 남고 싶다는 게야. 무애해각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 아이인 정말 서생을 교육하는 학자가 되었을 것이네.”

이야기하는 북양태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노부인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서생을 교육하는 학자라니? 권력도 세도 없는 선생이 아닌가? 왕가의 공자가 그런 고독한 삶을 견딜 수 있다고?’

“무애해각이 사라지고 제 아비마저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됐네. 그리고 세습되는 왕위는 온갖 시비에 휘말리기 시작했지. 두 형제가 서로 싸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소인배들이 중간에서 계속 이간질을 해댔을 것이야. 제 아비가 세상을 떠날 때, 루안은 북양에 있지 않았네. 그 때문에 온갖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내쫓기듯 그리 가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네.”

북양태비의 시선이 노부인에게 머물렀다.

“노부인, 자네의 걱정을 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내 감히 보증하지. 루안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런 명분과 이익을 따지는 자리에 오게 된 것은, 그 아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네. 그러니, 자네가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는가?”

노부인은 입만 뻐끔거렸다.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태비마마, 대장공주마마와 지씨 가문의 대부인도 이미 동의한 일이 아닙니까? 소인에게까지 여쭙지 않으셔도 됩니다.”

북양태비가 미소를 지었다.

“온이는 부모 복이 박하지 않았는가. 자네들처럼 그 아이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이들을 어렵게 만났으니 내 어찌 자네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이 혼인도 완전해지지 않겠는가.”

* * *

한 편, 한 노야는 지익의 초청으로 비림에 있었다.

얼마간 함께 산책을 즐긴 후, 한 노야가 입을 열었다.

“사돈 아우, 할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제 마음을 들킨 지익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할 말은 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익이 이끄는 데로 따라간 곳엔 루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노야를 본 루안이 허리를 굽히며 예를 갖췄다.

한 노야의 미간이 구겨졌다. 막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 지익이 선수를 쳤다.

“사돈, 목숨이 오가는 재판에도 피의자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까?”

곧 형부(刑部)에서 일하게 될 한 노야가 입을 다물자 지익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말씀을 나누시지요. 저는 근처를 돌아보고 있겠습니다.”

지익이 떠난 자리에 루안이 들었다. 루안이 다시 인사했다.

“한현 노야를 뵙습니다.”

한 노야는 싸늘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받잡지 못하겠습니다. 루 대인께서 저보다 직급이 높으시니 하관이 예를 갖춰야 옳을 것입니다.”

한 노야는 말만 그리 했을 뿐, 진짜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루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은 집안일로 찾아뵌 것입니다. 이곳이 조정 일을 보는 자리도 아니니, 어린 제가 연장자께 예를 갖춰야지요.”

한 노야가 콧방귀를 팡 뀌었다.

‘혀 한번 잘 돌아가는구먼!’

그때 혀 잘 돌리는 어린 녀석이 갑자기 물었다.

“한 대인께선 지금 속으로 제 욕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흠칫 놀랐던 한 노야의 얼굴에 민망한 표정이 스쳤다.

‘흥, 출세가도를 달린다더니. 사람 속내 뚫어보는 데 아주 이골이 났구먼!’

“욕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충의 있으신 분 중에, 명성이 바닥을 치는 저를 욕하지 않으시는 분이 없지요.”

루안의 갑작스러운 말에 한 노야가 입을 다물었다.

“…….”

자신이 할 말을 먼저 다 해버리니, 더 뭐라 말을 한단 말인가?

두 사람은 한동안 비림을 걸었다. 그러다 루안이 글이 적힌 비석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대인, 대인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인께선 제 인품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디가 좋지 않은 것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루안은, 그러고 한 노야가 머리를 굴릴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말했다.

“사실 이 혼인은 설령 노야께서 반대하셔도 반드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지씨 가문과 대장공주마마께서 허락하신 터라 외가는 그저 금상에 첨화가 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혹 원치 않으셔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해도, 속된 말로 저는 어차피 명성이 바닥인 자가 아닙니까? 더 흠이 생겨봐야 기별도 안 올 것이란 말입니다.”

“…….”

침묵하고 있던 한 노야가 버럭 화를 토해냈다.

“선을 넘지 마시게!”

그러나 루안은 그저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선을 넘고, 넘지 않고는 노야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한 노야는 머리가 뻥 하고 터질 것 같았다.

“무슨 뜻인가? 지금 위협하는 것인가?”

한 노야는 씨근거리며 속으로 하고픈 말을 참아 눌렀다. 

‘새파란 것이 어찌 이런단 말인가? 생김새는 기차게 훌륭한데 행동은 그야말로 이런 무뢰한이 없지 않은가! 조정 고관이란 자가, 풍모 따윈 다 팔아먹었단 말이야?’

“…….”

루안이 대답하지 않자, 얼굴이 용암처럼 점점 더 붉게 번져가던 한 노야가 끝내 화산 터지듯 욕설을 터트렸다.

“불효하고 불의한 자 주제에 어디 감히 내 생질녀를 데려가려 해! 권력을 탐하고, 형님에게 불의했으며, 충성스러운 자들을 모함하여 해치는 알랑방귀 간신인 자네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아 마땅하네! 내게 온이와의 혼사를 허락받을 생각이었다면 꿈 깨게!”

한 노야가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한 노야가 말을 마치자 그는 한 노야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읊었다.

“권력을 탐하고, 형님에게 불의했으며, 충성스러운 자들을 모함하여 해치는 알랑방귀 간신. 한 대인께서는 저를 이리 생각하고 계셨군요.”

어차피 할 말 못 할 말 다 한지라 한 노야도 이젠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뭔가? 내가 한 말 중에 어디 틀린 게 있나? 자네 형님과 싸우고 집안에서 내쫓기지 않았나!”

루안이 대답했다.

“맞는 말이기도, 아니기도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한 노야가 의심스러운 표정 반, 가당찮단 표정 반으로 루안을 쳐다보았다.

‘내 버젓한 사실을 말한 것을……! 어디 반박하려고!’

루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형님과 왕위를 놓고 경쟁을 한 것은, 형님께서 북양왕이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노야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자네의 형님은 적장자였고, 세자로 봉해졌던 분이시네. 그러니 왕위를 당연히 이어받지!”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 적장자가 부친을 살해하는 죄를 저질렀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한 노야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충격을 받은 듯 흔들리는 시선으로 루안을 응시했다.

그러나 루안의 질문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알려주십시오, 한 대인. 그래도 제가 형님을 존경하는 아우의 탈을 뒤집어쓴 채로 있어야만 했습니까? 부친을 살해한 형님이, 돌아가신 부친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가만두고 봤어야 했단 말입니까? 그게 옳다는 것입니까? 정녕 권력을 탐하고자 했다면 형님과 한패가 되어 지체 높은 왕가의 공자로서 계속 지내면 될 일이었습니다. 굳이 제가 버림받은 개와 같은 신세로 천릿길을 왜 도망쳤겠습니까?”

차츰 충격에서 헤어 나온 한 노야가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 그런 말을 어찌 그리 함부로 하는가! 다른 이가 들을 것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루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제 걱정을 해주시는 것입니까? 마음 놓으시지요, 폐하께선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폐하께서 어찌 저를 조정에 들여놓으셨겠습니까?”

루안의 대답을 들은 한 노야는 곧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고심은 이어졌다.

북양왕의 왕위 계승에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

‘정말 뭐라 말하기 어렵군. 권력 때문에 부자(父子)가 반목하는 일이 적었던 것도 아니지.’

어찌 됐건 왕위였다. 이름뿐인 왕도 아니고, 봉지도 있고 심지어 군대까지 소유하여 실권을 갖춘 번왕이였다. 황제와 맞먹는 수준의 왕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도성에 들었을 때 루안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 당당한 왕가의 공자였던 이의 곁에 겨우 몇십 명뿐이었던 것이다. 들리는 말론 북양에서 막 탈출했을 때, 그들 모두 온몸에 피로 칠갑을 하고 있었다고 했었다.

과거엔 왕위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실패했기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한 노야는 아주 고소하다 생각했었다.

‘사실이라 생각하고 다시 따져보니 정말 너무 비참해 불쌍할 지경이로구먼.’

한 노야의 얼굴에 동정의 빛이 떠오르자 루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렇게 속이기 쉬워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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