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로부터 며칠 동안 한 노야는 계속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자, 그는 다시 의심이 일었다.
‘한제 그 아이가 생각이 너무 깊었던 게 아닌가? 아니면 어찌 이리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게야?’
뭐가 뭔지 어수선하던 그때, 한씨 가문은 지온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천도제도 지내고 기도도 올리려 한다며, 외삼촌 댁에서도 와주셨으면 한다는 말이었다.
이를 한씨 가문이 거절할 리 없었다. 한씨 가문 사람들은 시간 맞춰 짐을 챙겨 조방궁으로 향했다.
* * *
법단은 오송원에 차려져, 그들을 맞으러 나온 정씨가 한씨 가문 사람들을 이끌고 근처 소각(小閣)으로 향했다.
소각(小閣)에 도착하여 다른 생각에 잠겨 차를 마시던 한 노야는, 문득 밖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한 무리의 남녀일행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사실 남녀일행이라 했지만, 사내는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여인들이었다.
가장 앞서 들어온 이는 중년의 여인 두 사람이었는데, 하나는 도복을 입은 선고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척 고급스러운 치장을 한 여인이었다.
한 노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복을 입은 선고가 누구인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정씨 역시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공손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대장공주마마, 태비마마를 뵙습니다.”
한 노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평소 연을 맺고 지내는 이들이라고 해봐야 대다수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뿐, 이리 귀한 신분을 가진 이들을 만나는 일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랐다.
한 노야가 예를 갖추기 위해 제 가족들과 나서자 대장공주가 만류하며 미소를 지었다.
“본궁은 이미 출가한 사람이야. 예의도 간단하게만 하면 되니 어서들 일어나시게.”
그리곤 지온을 불렀다.
“온아, 네 외조모님을 일으켜 드려라.”
“네, 어머니.”
지온이 대답하고는 노부인을 부축해 일어났다.
“오늘은 집안일을 보러 온 것이니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네. 다들 앉으시게.”
대장공주가 그리 말하자 모두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한씨 가문 사람들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공주마마와 연배가 비슷한 귀부인께선 아마 북양태비시겠지? 그렇다면 태비마마 옆에 선 저 젊은이가 바로…….’
노부인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젊은이는 외모만 훌륭한 게 아니라 그 자태마저 훌륭했다.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뿐이건만, 마치 높은 산에 휘영청 뜬 밝은 달처럼 시선을 사로잡아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사내였던 것이다.
‘설마 저 젊은이가……?’
과연, 북양태비가 그에게 하는 소리가 쏙 하고 박혔다.
“루안, 어서 어른들께 인사를 올려야지?”
곧이어 북양태비에게 대답하는 루안의 목소리가 노부인의 귀에 들리더니 젊은이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들에게 예를 갖췄다.
“루안이 노부인, 한 노야 그리고 한 부인을 뵙습니다.”
노부인은 흐릿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셋째 손자를 바라보게 됐다.
‘바로 이 자가 루안이로구먼. 어쩐지 한제 녀석이 그날 돌아온 후로 다시는 혼사 이야길 꺼내지 않더라니.’
제 손자도 외모면 외모, 학업이면 학업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아이이긴 했다. 여주에 있을 적엔 얼마나 많은 집안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가? 그 때문에 그녀는 제 손주가 마음을 쓰기만 한다면 지온과 혼인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적수가 하필이면…….’
혼사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제 손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는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이 인간계를 벗어난 존재를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대장공주와 북양태비가 행차한 자리에 루안까지 끼어있으니, 한씨 가문 사람들도 그들이 이리 걸음을 한 목적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노부인의 수심이 깊어졌다.
루안 본인을 보고 난 노부인은 누가 봐도 한씨 가문이 경쟁력이 없단 생각에 혼사는 꺼내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제 외손녀가 저 사내와 혼인하지 않기를 바랐다.
‘겉가죽이 아무리 잘나도 인품이 안 되는 것을 뭣에다 쓴단 말인가?’
그러나 대장공주와 북양태비가 하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은 이미 이야기가 된 게 분명했다. 거기다 지씨 가문 역시 정씨가 그들을 이곳에 모셨으니 어떤 상황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제 가문에서 루안과의 혼사를 원치 않는다고 해봐야 저 두 분을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그랬다간 앞으로 연을 끊고 살아야 할 터였다.
심사가 복잡한 와중에 노부인은 제 큰며느리가 자신의 손등을 툭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한 부인이 저들을 향해 웃으며 해명하듯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께서 청력이 약하십니다.”
그리곤 노부인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공주마마께옵서 어머니의 건강을 물으셨어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노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공주마마께서 이리 관심 가져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저는 아주 정정합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대장공주는 여주의 풍토와 그들의 사람됨이나, 자녀들의 학업 등 여러 가지를 물으면서도 혼인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어, 한씨 가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이리 거창하게 불러다 놨으면서 왜 본론은 꺼내지 않는 게야?’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칼날을 머리 위에 달아 놓은 것 같았는데, 그 칼날이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때 대장공주의 다른 질문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자네 가문의 아이들은 다들 학업에 종사하고 있겠구먼? 이번에 도성에 돌아왔으니 집으로 선생을 청할 생각이신가? 아니면 서원을 갈 겐가?”
한 부인이 대답했다.
“저희 노야께서 서원에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하였습니다. 동창들과 서로 경쟁하다 보면 더욱 높은 곳까지 정진할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구먼. 자네들 생각하는 곳이 있는가? 본궁이 알고 있는 서원 몇 곳이 있다네. 내가 자네들을 소개해 줄 수 있을 것이야.”
그 말에 한씨 가문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대장공주가 직접 나서다니, 일이 너무 커지는 게 아닌가!
노부인은 더욱 놀랐다.
나이가 지긋한 그녀는 과거 대장공주가 어떤 풍모를 지니고 있었는지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었다. 영종황제와 선제가 아직 자리하고 있었을 때를 떠올리면 당시 대장공주는 거침없이 사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과 지금처럼 부드럽게 대화를 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의 눈길 한 번 받는 것조차 은혜를 입고 상을 받는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노부인은 아무리 지온이 그녀의 수양딸이 되었어도 진짜 가족 같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찾아올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대장공주가 평소 친우가 찾아온 듯 자신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아무래도 자신의 외손녀를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는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렇게 잠시 한담이 이어지고 있던 차에 능양진인이 사람을 보내 제의 시작을 알려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위풍도 당당하게 법단이 설치된 곳으로 이동하여 지씨 가문의 차남가와 삼남가 사람들과 만났다.
“사돈 형님을 뵙습니다.”
지익이 꽤 살갑게 한 노야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성에 돌아오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 노야가 진중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랬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처 찾아가 보지 못했구먼.”
지익이 손을 내저었다.
“저희가 찾아가 뵈어야지요!”
근황과 안부를 물은 지익이 말미에 덧붙였다.
“저희 집안 아들 녀석이 얼마 전 지온이의 외사촌 오라버니를 보고 돌아와서는 한참 칭찬을 하였습니다. 앞으로 자주 같이 만나 어울리라 해주십시오.”
‘아무렴, 칭찬이고말고.’
당시 집으로 돌아온 지장은 이렇게 말했었다.
“한씨 가문의 셋째 공자가 사람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 지온이를 아주 잘 챙기더라고요. 다만 조금 맹한 구석이 있는 게 그리 똑똑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지익이 워낙 친근하게 나오자 한 노야의 마음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자네 집안의 공자야말로 용이고 봉황이지! 듣자니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거인이 되었다 들었네. 어디 우리 집안의 부족한 녀석들과 비교가 되겠는가?”
지익의 헤벌쭉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겸양은 또 잊지 않았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 학문은 아직 제대로 갖추질 못했습니다. 녀석의 선생께서도 붙을 리가 없다면 내년에도 과거를 보지 말라 하신 것을요.”
한제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한 노야는 웃음이 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스물에 회시(會試)에 드는 것도 이미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집안 것들은 아직 거인도 없다네.”
집안 아이들 학업에 관한 이야기로 두 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한담은 도성 서원 중 어느 서원이 좋다더라, 어떤 명사가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강현 선생이 지장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떠올린 한 노야는 부지불식간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 역시 진사(進士) 출신이었기에 친한 동창들을 통하면 좋은 선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강현과 같은 이름 높은 명사를 모시는 것은 연줄이 없으면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우리 온이 덕분입니다.”
지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온이가 연결해 주지 않았다면 지장 녀석이 여 대인과 어찌 알게 되었겠습니까? 여 대인과 연이 없었다면 강현 선생을 모시는 것도 언감생심이었을 것입니다.”
한 노야가 흠칫 놀라며 제 귀를 의심했다.
“온이?”
“네!”
지익은 당연하지 않냐는 태도였다.
“우리 온이가 사내가 아닌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사내였다면 가문에 영광을 가져다주고도 남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들을수록 아연해 지는 말이었다.
‘지씨 가문 삼남가 노야가 우리 온이를 이리 크게 생각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제 가문의 권세를 탐하고자 하는 것도 없는 일이렷다? 생각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 * *
정오 즈음.
제(祭)가 끝나자 대장공주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노부인, 피곤하진 않으신가? 내 거처에서 잠시 쉬다 가면 어떠시겠나?”
대장공주가 귀빈으로 모시겠다는데 노부인이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황급히 대답했다.
“생각해주시어 참으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여인들 전부가 난택산방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은 노부인은 곁채에서 잠시 쉬었다. 그녀가 깨어날 때가 되자 궁녀가 찾아왔다.
“노부인, 태비마마께서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자고 청하셨습니다.”
순간 노부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녀는 화장과 옷차림을 정돈한 후, 큰며느리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