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38)화 (238/385)
  • 238화. 해결

    한 노야에게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한씨 가문은, 지온의 일을 잠시 멈춰둘 수밖에 없었다.

    오래 도성을 떠난 여파로 한씨 가문이 쌓아두었던 인맥이 확실히 도움이 되긴 어려웠다. 오랜 지인들 대다수가 도성에 없었고, 친척들과의 끈끈한 마음 역시 많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동분서주했으나 여전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 한 노야는 어렵사리 오랜 친우와 연락이 닿아 그와 식사를 했다. 술도 어느 정도 마셨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 노야는 제 사정을 친우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친우가 입을 열었다.

    “자네 나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요 몇 년은 나도 어떻게 지내온 것인지도 모르겠네. 그런 쪽으로 연줄이 있었으면 당장 나부터 이런 쥐꼬리만 한 주사(主事)에 머물러 있겠는가?”

    한 노야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저 말이나 꺼내 본 것이네. 연줄이 없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술이나 마시세!”

    그러자 친우가 취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슬쩍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야 연줄이 없다지만, 자네는 있지 않은가?”

    한 노야가 멈칫했다. 친우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지씨 가문과 사돈이지 않은가?”

    한 노야가 대답했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내 동생은 벌써 세상을 떠났네. 더구나 지씨 가문의 둘째와 삼노야는 제 앞가림이나 신경 써야 하는 수준이지 않은가!”

    “누가 그들이라던가?”

    친우가 손을 내저었다.

    “자네 매부는 세상을 떠났지만, 생질녀가 있지 않은가! 자네 생질녀는 대장공주마마의 수양딸이 아닌가? 그 아이만 자네를 돕겠다고 나서면 지금 이게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한 노야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어린 여아가 부모의 보살핌도 없이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제 겨우 대장공주마마의 마음을 얻었는데, 내가 찾아갔다가 괜히 대장공주마마의 심기라도 어지럽히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나 친우는 거침이 없었다.

    “자네, 자네의 생질녀를 아주 우습게 봤구먼! 내 알려줌세. 공주마마께서 자네의 그 생질녀를 위해 강왕비와 척까지 졌다네. 얼마나 아끼시는지 친딸에게도 그렇게 못할 정도란 말일세!”

    말이 퍼지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하긴 했지만, 강왕비가 지온을 해치려 했던 일은 그래도 알음알음 알려진 사건이었다. 더구나 최근 도성을 뒤엎었던 비적 사건까지 겹치면서 사람들은 그 안에 알려지지 않은 음모가 있단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말일세, 내 최근 풍문 하나를 들었는데…….”

    친우가 풍문에 흠뻑 심취한 듯 말을 이었다.

    “북양태비가 도성에 온 일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내 들은 바로는 자네 생질녀와 집안에서 쫓겨난 넷째 공자를 위해 온 것이라더구먼! 요즘 북양태비와 대장공주께서 발에 불이 나도록 자주 만나시는 게 혼사 때문이란 말이 있네. 한데, 공주마마께선 따로 후사를 보시지 않지 않았나? 그러니 그 혼사가 바로 자네 생질녀의 혼사라는 것이지!”

    한 노야는 친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것도 모르고 친우는 여전히 흥분한 채 말 잇기 바빴다.

    “북양왕가의 넷째 공자인 루안도 말일세, 요즘 아주 잘나가네. 폐하께서 얼마나 그의 체면을 챙겨주시는지 몰라. 그러니 자네를 위해 연줄을 붙여주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네. 연줄을 대는 게 뭔가? 자네를 직접 꽂는 것도 별일 아니다~ 그 말이네!”

    “그만하게.”

    더는 가만히 듣고 있기 어려웠던 한 노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자네, 그동안 나와 그리 잘 지내놓고 어찌 내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우리 지온이와 루안 그자와의 혼사가 될지 안 될지는 차치하고라도, 루안 그자가 불효하고, 불의한 인간인 것을 뻔히 알면서 내 어찌 그자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겠나?”

    그러나 한 노야의 성미를 모르지 않았던 친우는 특별히 화가 난 기색도 없이 그저 노파심에 충고를 이어갔다.

    “자네 왜 이리 벽창호 같은가? 사람이든 일이든, 조정에 어디 그리 단순한 게 있던가? 나도 본래 자네처럼 생각했었네. 그가 제 형의 왕작을 빼앗으려다 실패하여 도망쳤다고, 나도 그리 생각했단 말일세. 그런데 북양태비가 도성에 든 것도 모자라 어전까지 나와 그를 위해 어사와 한 판 붙기까지 했네. 내 보기에 그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말고 다른 뭔가가 있는 게 확실하네.”

    한 노야는 흠칫 놀랐다. 북양태비가 도성에 온 것까진 알았지만, 그녀가 어사와 한 판 했다는 사실까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 노야는 친우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내 이리저리 풍파에 시달리면서 깨달은 게 있다네. 남들이 좋다 한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쁘다 하는 것도 꼭 나쁜 것이 아니더구먼. 그리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루안 그자가 그동안 딱히 부덕한 일을 한 적이 없었네.”

    친우의 감탄해 마지않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가 형부에 있을 적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을 해결했었나? 명성이 지금처럼 나빠진 것도 윗전의 명을 따르느라 몇 사람을 날려서 그리됐던 것인데, 기실 그 일도 그가 하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 손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그리됐을 일이었단 말일세. 이 바닥 들어온 이들 중에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리 원칙대로 하고 싶어도 어떤 일엔 눈을 감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 노야는 잠자코 묵묵히 듣고 있었다.

    * * *

    술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 노야가 연신 한숨을 쉬어대자, 그의 부인이 그를 위로했다.

    “노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이제 막 도성으로 돌아온 참이니 천천히 하세요.”

    한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친우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진짜로 지온에게 찾아가 부탁을 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한 노야는 정보를 얻기 위해 이부(吏部)에 찾아갔다.

    “자네 또 왔는가!”

    이부의 문간방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어떤 이는 출근 도장을 찍듯이 매일 같이 찾아오곤 했는데, 원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면 이곳 문간방에 주야장천 앉아 차만 마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내리 차를 마시다 보면 친해지게 되는 것이었다.

    한 노야는 종일 기다릴 각오를 다지며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내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들과 한담을 나누는 것보다 즐거운 일을 찾기 어려워 또 이리 걸음을 한 게 아니겠는가!”

    그러자 무거운 마음들을 숨기며 둘러앉은 이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도 한 노야처럼 연줄이 없어 매일 같이 이곳으로 출근하듯 찾아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한 노야가 종일 기다릴 각오를 다지며 다구(茶具)를 준비할 때였다. 관졸 하나가 문간방으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문간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고 관졸을 향해 열띤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누구를 불러가려나?’

    관졸이 문간방을 쓱 훑더니 물었다.

    “여주의 통판을 했던 한현 대인, 계십니까!”

    제 이름이 불릴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한 노야는, 옆에 있던 이가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여기 있소!”

    관졸이 그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더니 말했다.

    “시랑(*侍郞: 정부 각 부처의 차장을 이름) 어른께서 모시라 하였습니다.”

    하급 관리가 밖으로 나가고, 그동안 얼굴이 익은 이들 몇이 한 노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언제부터 시랑 어르신께 연줄이 닿은 건가?”

    어리둥절한 것은 한 노야라고 다를 게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 * *

    집으로 돌아온 한 노야는 먼저 노부인부터 찾아갔다.

    한 노야를 맞으러 나왔다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한 남편을 본 그의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도 다른 소식이 없었어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이제 겨우 도성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요. 어떤 이들은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고 몇 달이나 기다린다 합니다.”

    노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도 요즘 출타하여 예전 인맥들을 다시 이어보고 있으니, 앞으로 연줄을 잡을 수 있을 것이야.”

    한 노야가 고개를 흔들자, 노부인은 제 아들이 너무 좌절했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다독였다.

    “그래도 관밥을 꽤나 먹지 않았느냐? 겨우 이 정도 일에 그리 의기소침해할 게 무엇이야.”

    “그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연줄을 그만 찾으셔도 되겠습니다. 일이…… 일이 해결됐습니다.”

    “뭐야?”

    노부인이 놀라 되묻자 그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한 노야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오늘 이부(吏部)의 엄 시랑이 직접 저를 부르더니 마침 형부에 자리 하나가 났다며 저더러 가겠냐 물었습니다.”

    노부인이 다급히 물었다.

    “어느 직(職)인 게야?”

    “청이사(淸吏司)의 낭중입니다.”

    노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영전이 아니냐!”

    한 노야 역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들어보니, 형부에서 제가 형옥(刑獄)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 것을 눈여겨본 듯했습니다. 제가 하겠다고 했으니 이번 일은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 * *

    걱정하던 일이 해결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노부인은 주루에서 연회를 열기로 했다.

    한제도 제 방 문지방을 넘긴 했지만, 여전히 속이 말이 아닌지라 조용히 먹기만 할 뿐, 동생들이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집안 어른들끼리 하는 대화 중 한 마디가 그의 귀에 꽂혀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백부께서 형부로 가게 되셨다는 말입니까?”

    한 노야는 기분이 좋아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됐구나. 앞으로 계속 도성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면 너희들에게도 좋은 서원을 찾아줄 테니, 학업에 더욱 정진하도록 해라.”

    그러나 한제는 뒷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물었다.

    “계속 연줄을 찾지 못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이리 갑자기 결정이 난 것입니까? 그것도 형부에 가는 일인데요?”

    질문이 뭔가 이상하자, 한 노야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절로 사라졌다.

    이노야가 한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백부님께 그 무슨 말버릇인 게야! 버릇이 있는 게야?”

    “그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을 무척 중시한 한씨 가문에서 자란 한제였기 때문에 얼른 해명했다.

    “추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이상한 것 같아 그렇습니다.”

    이노야가 계속 혼을 내려는 것을 한 노야가 막았다.

    “어떤 부분이 이상한 것이냐?”

    “형부의 낭중은 분명 많은 사람이 눈독 들인 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가 이리 갑자기 백부님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린 것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것이냐?”

    이노야가 말했다.

    “네 백부가 형옥(刑獄) 일을 경험한 것이 좋게 작용해 들어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한제가 반박했다.

    “백부님, 조카가 불경한 말씀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백부님께서 외진 여주에서 통판직을 수행하셨던 것은 그들의 눈에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하셨다고는 하나, 그 역시 백부님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지요. 그런 백부님을 그들이 굳이 모시고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 노야가 수염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에 일리가 있구나. 그럼 네 생각엔 무슨 이유로 이리된 것 같으냐?”

    잠시 머뭇거리던 한제가 대답했다.

    “백부님, 그, 아시는 분 중에 형부 출신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한제가 분명하게 이름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한씨 가문에서 워낙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던 인물인지라 모두들 곧바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노부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헛소리!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이냐!”

    그러나 말은 그리 했어도 이미 그녀의 마음에도 의심이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모두의 눈치를 살피던 한 부인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제야, 네가 너무 생각이 많은 게 아니냐? 우리가 지씨 가문을 찾아간 것도 아니고, 그가 어떻게 알고 우릴 도왔겠느냐?”

    한제는 그날 보았던 루안의 모습을 떠올리곤 제 의견을 고수했다.

    “설명되는 이유는 이것뿐입니다.”

    한 노야는 좋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날아갔다.

    정적이 흐르길 얼마나 지났을까, 한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한 일이라면 분명 찾아와 생색을 내지 않겠느냐?”

    노부인이 분한 듯 말했다.

    “교활한 것 좀 보아라! 우리가 그자에게 은혜를 입으면 온이와의 혼사를 어찌 반대하겠느냐?”

    한 노야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녕 그러하다면 제가 낭중직을 받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그 말에 한 부인이 입을 뗐다가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도로 다물었다.

    한제가 던진 폭탄에 즐거웠던 연회는 어수선하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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