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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37)화 (237/385)
  • 237화. 루 대인을 보신 적 있으세요?

    오후 시간이 어찌 흘러갔는지, 한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해거름이 되자 강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밤이 되면 장락지는 또 다른 곳으로 변모하니 연치 어린 분들께선 어울릴 생각 마시고 돌아가시게.”

    강 선생이 그리 말하자 다들 아쉬움을 품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강가에 오르자 마차를 끌고 오던 야우가 루안을 보고는 헐레벌떡 달려왔다.

    “공자님!”

    흥분한 야우와 다르게 루안은 덤덤했다.

    “조방궁으로 보낼 때 내가 뭐라 했지?”

    야우가 눈을 끔벅였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없는데?’

    얌전히 지온 소저의 마부가 되어 마차만 잘 몰지 않았던가? 지온 소저를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일 역시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등이 다가오더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야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조금 지온 소저가 강 선생의 배에 오를 때 왜 같이 안 왔수?”

    멈칫한 야우가 대답했다.

    “바, 바로 뒤에 있는 배에 있었습니다, 공자님! 무슨 일이 있었으면 바로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배 안에 불온한 마음을 먹은 이가 있었으면 그걸 어떻게 발견할 생각이었는데요?”

    “…….”

    “이제 뭘 잘못했는지 알겠죠?”

    한등이 득의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만약에 북양왕 전하를 호위하는 것이었으면 이리 대충 했겠어요? 네? 솔직히 지온 아가씨를 대단찮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 거 아니에요, 네? 공자님이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한등의 깐족거림에도 야우는 그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빌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지온 소저가 제 조상의 조상이라 생각하고 모시겠습니다! 북양왕 전하께 하는 것보다 더 조심하겠습니다, 넷째 공자님!”

    여기서 더 좌천됐다간 마구간에서 말똥이나 치우는 신세가 되리라.

    다행스럽게도 루안은 그에게 죄를 묻지는 않았다.

    “알면 됐다.”

    한쪽에선 지씨 가문 남매가 서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백모님께선 조방궁에서 잘 지내시지? 백모님과 서로 이야기도 잘하고?”

    “좋아요, 오라버니. 어머니께서 계시니 시녀들도 더 마음을 쓰는 것 같고요.”

    그제야 지장은 안심한 듯했다.

    “어머니께서 침방 사람은 안 데려갔다고 걱정하시더라.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겨울옷은 충분한지 모르겠다고.”

    지온이 웃었다.

    “저희 이미 겨울옷 준비를 다 끝냈다고, 오라버니께서 돌아가시면 숙모님께 전해주세요. 아, 대장공주께서 가죽을 내려주셨어요. 상등품이면 제가 돌아가서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그걸 어떻게 받아. 너나 남겨서 써.”

    “우리끼리는 다 쓰지도 못해요. 남겨놔 봐야 괜히 낭비예요.”

    강현이 떠나려 하자 지장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조심해서 돌아가, 온아! 집에 자주 오고!”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보세요, 한제 오라버니께서 계시니까 저도 괜찮아요.”

    지장은 한제에게 지온을 조방궁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후에야 강현을 따라 떠났다.

    “…….”

    한제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제 여동생에게 이렇게까지 질척이지 않았던 것이다.

    루안이 다가와 물었다.

    “지금 돌아갈 생각이오?”

    지온이 대답했다.

    “나오면서 특별히 말을 남기지 않았어요.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테니 저녁 식사 전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루안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갑시다.”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한제를 향해 말했다.

    “오라버니, 저희 가요!”

    “아, 음…….”

    황급히 인사를 마무리한 한제는 지온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여기저기 꼬인 기분인 한제의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이 스쳐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말발굽 소리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는 창문에 쳐진 천을 걷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엔 말을 탄 루안이 달그닥달그닥 말을 몰며 마차와 나란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제를 본 그는 심지어 꾸벅 인사까지 했다!

    조방궁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직접 지온이 들어가는 것까지 본 후에야 제 갈 길을 갔다.

    * * *

    노부인은 자신이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셋째는 아직인 게야? 이러다 날이 다 지겠구나.”

    시녀가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셋째 공자께서 늦게 오시는 건 좋은 일이지요. 지온 아가씨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계신다는 뜻이니까요.”

    시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노부인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빨리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어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길고 긴 기다림을 이어가던 중 드디어 한제가 돌아왔다.

    “조모님, 백모님, 어머니.”

    한제가 대충 인사를 마치자, 노부인이 부리나케 물었다.

    “한제야, 온이와 재미있게 놀았느냐? 어땠느냐?”

    한제가 고개를 저었다.

    “싫었던 게야?”

    노부인의 마음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혹시 아직도 혼인하기 싫어 그러는 것이냐? 온이 좀 보거라. 어디 부족한 게 있더냐? 용모면 용모, 인품이면 인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아직도 불만이 있는 게야?”

    한제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의 목소리로 말했다.

    “불만 없습니다, 조모님. 지온 동생은 아주 훌륭하지요. 너무 훌륭한 나머지 제가 지온 동생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노부인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 게야?”

    한 부인 역시 물었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보아라. 왜? 지온이 어디가 문제인 것이냐?”

    “아무 문제도 없지요.”

    한제는 여전히 기운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그보다 제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자 셋의 시선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루 대인을 보신 적 있으세요?”

    한제는 영혼이 달달 타는 고문을 겪기라도 한 듯이 울분 어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어딜 봐서 지온 동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리고 지씨 가문도 그렇습니다. 지씨 가문이 왜 권력에 기생한 거라 그리 확신하셨던 건가요?”

    여인 셋은 모두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한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노부인이 대답했다.

    “그걸 꼭 봐야 아는 것이냐? 세상에 북양왕가 넷째 공자의 일을 모르는 이가 어딨더냐?”

    한제의 입이 삐죽거렸다. 여강과 강현이 그를 대했던 태도를 생각하며 한제는 생각했다.

    ‘그가 그런 소인배 간신이었으면 대유학자인 두 분께서 그와 같이 앉아 술잔을 나눌 리가 있겠어?’

    “여하튼 저는 보았습니다. 그를 버리고 저를 선택한다? 제가 지온 동생이라도 머리에 활이 꽂혀도 안 할 거예요.”

    제 할 말을 마친 한제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그대로 인사하고 물러나 버렸다.

    한제는 오늘 뱃놀이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외모도 졌고, 학문은 심지어 그 자리에 저보다 못한 이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지온에게 미남계를 쓸 생각을 했다니, 탕약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거의 제일 못생긴 축에 속하지 않았던가.

    ‘흐윽…… 아무래도 침상에 틀어박혀 상처 난 자존심을 치유해야 할 것 같구나.’

    * * *

    한 편, 한씨 가문의 세 여인은 서로 눈만 마주치고 있었다. 한제가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 노야가 돌아왔다.

    한 노야에게 한제의 일을 전하려던 노부인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들어오자마자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는 한 노야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도성에 머물려 했으나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제의 일도 중하다지만, 그게 어디 한 노야의 앞날보다 중하겠는가? 노부인이 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한 노야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지난번에 맡기로 했던 일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너무 오래 도성을 떠나 있었어요, 인맥이 그만큼 튼튼하지 않은 겁니다.”

    “그럼 이제 어쩌면 좋으냐?”

    노부인이 걱정하며 물었다.

    “외임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냐?”

    “외임을 할 수나 있으면 다행입니다. 외임도 하지 못하게, 심사받은 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나 않을는지 걱정입니다.”

    노부인이 당황하여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 우리가 누구에게 미움을 산 것도 아니지 않아?”

    “미움을 사서가 아닙니다.”

    한 노야가 대답했다.

    “그나마 좋은 자리를 그만큼 많은 이들이 노리고 있단 것이겠지요. 저희가 가진 인맥으로 해결하지 못하니 바로 다른 이에게 뺏기지 않습니까.”

    “그럼 다른 인맥이라도 찾아 해결해봐야지. 다행히 요 몇 년 가업 운영이 잘 되어 얼마간 돈을 모으지 않았느냐.”

    한 노야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통할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난 3년간 도성 판도가 너무 바뀌었어요. 저희와 원래 연이 있던 인맥은 대다수가 물러나 힘이 못 됩니다. 새로운 인맥을 찾으려 해도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들 역시 저희가 건네는 것은 받지 않을 테고요.”

    한 노야의 말에 가족 모두 수심에 잠겼다.

    그나마 3년 전이였다면 지씨 가문에 어느 정도 인맥이 남아있을 테니 돌아 돌아 연을 만들어 볼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온의 아버지인 지 노야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엮어볼 인맥 하나 남지 않았다.

    경력도 잘 쌓았고 기운까지 왕성한 지금이야말로 한 노야에게 있어 한 단계 더 높은 관직을 노릴 수 있는 적기였다. 만약 이 시기를 놓친다면 이대로 오, 육품 관직만 전전하게 될지도 몰랐다.

    * * *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한제는 식사마저 걸렀다.

    한씨 가문 이부인은 그 모습을 보고는 희희낙락한 태도로 제 아들에게 먹일 야식을 준비해 가져왔다.

    “한제야, 탕이라도 마셔야지.”

    이부인은 정성을 가득 담아 늙은 오리로 만든 탕을 그릇에 덜었다. 위에 뜬 기름까지 손수 걷어가며 아주 지극정성이었다.

    “어미가 아침부터 푹 고아 맛이 아주 일품이다.”

    오리탕을 흘끔 쳐다본 한제는 여전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입맛이 없습니다.”

    이부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한제를 다독였다.

    “조급할 필요 없어. 혼인은 서로가 원해야 하는 게야. 죽어도 싫다는 너를 원수처럼 억지로 혼인시키겠느냐? 정 안되면 이 어미가 아주버님을 찾아뵈어도 되고.”

    한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어머니. 저와는 이어질 수가 없어요.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저에게까지 기회가 올 리 없단 말입니다.”

    “지온이가 그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단 말이냐?”

    이부인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잘 됐구나! 사실 네 조모님과 다른 분들이 너무 따지신 게지. 루안, 그 사람의 명성이 아무리 바닥에 떨어졌대도 천자 곁에 딱 붙은 근신(近臣)인데, 그런 이와 맺어질 기회를 놓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본인들이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도 다 그런 줄 아신다니까.”

    제 어미의 말이 듣기 나빴던지 한제가 인상을 썼다.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 지온 동생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이번엔 이부인의 마음이 상했다.

    “방금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지온이도 그 혼사를 원한다면서!”

    “제가 언제 그 혼사를 권력 때문에 원한다 했습니까? 루 대인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인품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저보다 부족한 게 뭐 하나라도 있기나 합니까? 그나마 명성이라도 나쁘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당장 엎드려 절이라도 할 판이라고요…….”

    말을 하다 보니 한제는 또다시 상처 입은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비록 제가 원해서 진행하려 했던 혼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눈 멀쩡히 제가 뭐 하나 비벼도 이길 게 없단 현실을 목도하는 것은 절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부인은 의문이 들었다.

    “네가 왜 루안 편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그 물음에 한제는 내심 자신이라고 이러고 싶어 이러겠냐는 생각을 했다.

    ‘현실이 너무 참혹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이러는 거지, 나도…….’

    “아무튼, 어머니도 더는 관여하지 마세요. 며칠 지나면 조모님과 다른 분들께서도 다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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