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36)화 (236/385)

236화. 경계심 가득한 한제

장락지에 도착하여 지온은 배 한 척을 빌렸다.

지온의 뒤를 따라 배에 오르던 서아는 야우 역시 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마차나 잘 지키고 있을 것이지, 여긴 왜 와요?”

서아의 가시 돋친 말에 야우가 대답했다.

“공자께서 날 마차나 끌라고 보내셨다고 내가 진짜 마부인줄 아시오? 지온 소저께서 어디를 가시든, 난 지난번과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뒤를 따라야 하오.”

지온의 안전을 위해 배에 올랐다는 말에 서아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야우의 건들거리는 태도에 그녀는 한 마디 톡 쏘았다.

“이런 거만한 마부가 어딨나고요!”

야우가 제 흰자가 드러나도록 눈을 위로 굴렸다.

‘성깔을 부리든지 말든지! 어차피 날 싫어해주면 나는 아주 좋다고! 제에~ 발 날 돌려보내 달라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듣지 못하고 그저 서아와 야우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만 본 한제는, 제 사촌 동생을 향한 동정심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마차 좀 끌게 했다고 세상 온갖 짜증은 다 내고 있네. 지씨 가문 하인은 예의라고는 전부 내팽개쳤나보군!’

배 안 좌석에 착석한 지온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장락지의 밤은 가무(歌舞)가 많지만, 낮엔 문회(文會)가 많이 열려 적잖은 문인 기재들이 모습을 보여요. 오라버니께서도 여유가 있으실 때 구경하러 오시면 좋을 거예요. 또 모르지요, 막역한 지우라도 사귀게 될지?”

지온이 짧은 설명과 함께 물었다.

“오라버니께선 올해 과거에 응시하셨나요?”

한제는 부끄러운 얼굴이 됐다.

“백부께서 내 학업이 아직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이번엔 응시를 해봐야 낙방할 거라 하셨다. 그래서 차라리 두 해 정도 더 정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제의 대답에 지온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큰외숙께서 보아하니 꽤 엄격하신 분이신가보네.’

한제는 다소 무안함을 느꼈다. 올해 과거에 붙은 소년 거인(擧人)들은, 듣자 하니 자신보다 겨우 몇 살이나 더 먹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지온이가 날 변변찮다 생각하면 어쩌지?’

사실 그의 학업 수준은 제 또래 사이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다만 백부의 임지(任地)를 따라 다니다보니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 도성에 있는 최고 수준의 다른 서생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좀 있었던 것이다.

지온은 뱃사람에게 큰 배에서 열리는 문회 근처로 가달라 말했다. 한제의 시야를 넓혀주고 싶었던 것이다.

‘인재의 보고인 도성이라 그런지 역시나 문회의 수준이 무척 높구나!’

한제가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놀란 듯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지온아!”

한제가 고개를 돌리자 배 한 척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선수에는 그와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 서 있었는데, 청수한 외양을 한 소년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를 본 지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지장 오라버니.”

‘지씨 가문 사람이라고?’

순간 한제 역시 온 몸의 털이 쭈뼛 설 만큼 경계심이 솟았다. 그 모습이 꼭 작고 귀여운 동물 같았다.

지온의 인사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지장이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어찌 여기에 있는 거냐?”

“외사촌 오라버니와 함께 나들이 왔어요.”

지온이 반문했다.

“지장 오라버니는요?”

“난 스승님을 따라 온 거야.”

지온이 선실을 흘긋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지장의 시선이 한제에게로 향했다.

“지온의 외가인 한씨 가문의 오라버니 되십니까? 저는 지장이라 합니다. 인사드립니다.”

한제는 지장과 통성명을 하며 생각했다.

‘지온의 사촌 오라비라더니 사람은 부드러운 것 같은데? 나쁜 사람 같지가 않잖아?’

그러다 한제는 생각을 고쳐먹으며 다시금 경계를 끌어올렸다.

조금 전 청옥이란 선고도 보기엔 후덕해 보이지 않던가? 자고로 사람은 외양으로 판단할 수 없단 걸 알아야 하는 법이다.

지장과 대화가 이루어지던 그때, 선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장아,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지장이 몸을 돌리더니 공손히 대답했다.

“저희 집안의 사촌 동생이옵니다, 스승님. 마침 장락지에서 나들이 중이었다 합니다.”

그러자 다소 놀란 음성으로 선생이 물었다.

“혹시 여강이 말한 그 소저냐?”

“그러합니다.”

“이런 우연이있나! 괜찮으면 넘어와 함께하면 어떠하냐?”

지장은 제 스승에게 대답을 하고는 지온에게 물었다.

“지온아, 두 사람 다른 일 없지? 우리 배로 넘어올래?”

지온은 기쁘게 그리하겠다고 하더니 조용히 한제에게 속삭였다.

“지장 오라버니의 선생은 도성에서 이름난 분이세요. 그분과 안면을 익혀두면 오라버니께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아, 음…….”

한제는 별안간 벌어진 이 상황이 아직 어리둥절했다.

지온이 서아와 야우에게 전했다.

“서아 넌 야우와 여기 있어. 난 오라버니와 다녀올게.”

그리고 한제와 그녀는 지장의 배로 넘어갔다.

선실에 들어간 지온은 두 사람이 앉은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여강이었다.

지온이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여 대인, 대인께서도 여기 계셨군요!”

여강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지온 소저는 어째 매번 배에서 보게 되는 것 같구먼. 아무래도 우리가 물과 연이 많은 것 같네.”

여강과 함께 앉은 이는 말랐지만 건실해 보이는 중년의 문사로, 옷차림에서 이름 높은 명사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바로 여강이 지장을 위해 찾아준 선생이었다.

강(江)씨 성에, 이름은 외자로 현(玄)을 쓰는 강현 선생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유학자였다. 하지만 성정이 담박(淡泊)하여 청운에는 뜻을 두지 않았던 고로 거인(擧人)이 된 후로 더는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온은 그녀가 옥종화였을 때, 그를 본 일이 있었다. 일찍이 무애해각에 찾아와 제 할아버지인 옥형 선생에게 배움을 청했었던 것이다.

지장이 자신의 스승을 소개하자 한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강, 강, 강 선생님…….”

한제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강현이 저를 지켜보고 있자 그가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길에 읍했다.

강현 선생이라니, 그야말로 시대를 풍미하는 명사가 아닌가! 단 한 번 강현 선생의 강의만 들어도 얻는 것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지경이라는! 그러니 그의 학생이 되어 수업을 듣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씨 가문의 둘째 공자가 저분의 제자라니? 저런 각박하고 무덕한 가문이 어쩌다 강 선생의 눈에 들었단 말인가?’

한제는 미궁에 빠졌다.

그때 지장의 소개가 이어졌다.

“이분은 여 대인이십니다. 강 선생님의 각별한 친우 분이시기도 하고, 저를 가르치셨던 스승님이시기도 하지요. 조정의 대학사로서 성은 여, 함자는 강을 쓰십니다.”

‘여강! 헙!’

입을 다문 한제의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강현 선생보다 더 명성 높은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사람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대장장이 출신으로 장원에 오른 여강의 이야기를 여전히 즐겨 하곤 했다.

학당에서 오는 선생마다 어찌나 여강의 이야기를 많이 했던지, 한제는 귀에 정이 박힐 정도로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왔다.

‘지씨 가문이 망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 지장이란 녀석의 스승들은 어쩌면 이리 대단하단 말인가?’

강현은 도도하고 고고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거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따뜻한 눈으로 한제와 지온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어서 와 앉으시게.”

지온은 금방 예를 갖추고는 대번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한제 역시 그녀를 따라 엉덩이를 붙이긴 붙였지만, 파르르 떨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감히 내가 최고의 선생들과 한곳에 있다니, 현실인가? 진짜 현실인가?’

강현이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여강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네. 여강이 낸 시험에, 재미있게도 그림을 답으로 받았다더군. 그리고 답변을 한 이가 군자와 소인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했다하여, 내 그 이야기를 듣고 답을 낸 이와 한 번 만나고 싶었다네. 허나 신분상 편히 볼 수 없는 상황인지라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 코에 바람이나 쐬러 나왔다 이런 예상 밖의 행운을 얻었군.”

지온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습니다. 그저 규중에 사는 이의 말장난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온 소저는 겸손이 지나치구먼.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했단 것이네. 그리 학문에 몰두하는 태도는 몇 있는 내 제자들조차 가지지 못한 것일세!”

지장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온이가 과거를 보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볼 수 있었다면 분명 저보다 더 대단했을 터인데요.”

지장의 말에 강현이 웃으며 꾸지람했다.

“부끄럽지도 않은 것이냐? 제 사촌 동생만 못하단 소릴 어찌 그리 당당하게 하는 것이야?”

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었다.

“선생께서 제게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더 대단한 이들을 목표로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온이가 저보다 대단한 것이 사실이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어찌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은 그래도 은근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내, 데리고 있는 제자 중에 네 능력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나 지금 보인 너의 그 장점이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다.”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진 지장이었다.

“그 말씀은 제가 다른 사형들보다 더 좋단 것입니까?”

“그럴 리가.”

강현이 잔인하게 그의 환상을 깨뜨렸다.

“네 녀석은 시작점이 너무 낮아, 가르침의 성취감이 특별히 큰 게야.”

붕붕 떠오르려던 지장의 얼굴이 대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스승님!”

그런 지장을 보며 강현과 여강이 껄껄,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한제는 더욱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지장 공자와 지온이 서로 무척 잘 지내는 것 같지 않은가? 설마 밖이라 연기하는 것인가? 그리고 두 선생 모두 지온이를 저리 높이 평가하다니……’

그가 복잡한 머리를 굴리며 고심하고 있던 그때, 배가 한 번 출렁이더니 이윽고 밖에 있던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 대인, 술을 사 오셨습니까?”

곧이어 저음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음. 옥루주가 다 팔렸다 하여 경방주를 사 왔네. 아쉽지만 강 선생께서 이것으로 만족하셔야겠군.”

하인이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방주를 사셨단 말입니까? 아쉽다니요, 선생께서 얼마나 좋아하는 술인지 모릅니다!”

한제는 이미 꼬일 대로 꼬여 복잡한 머릿속을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인지라, 그저 멍하니 목소리가 좋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바람이 깊은 숲을 스치는 듯도 하고, 샘물이 솟아나듯 청아하기도 하구먼……. 이런 목소리의 주인은 어떤 풍류를 가진 사람이려나?’

이윽고 배의 천막 문이 들리며 젊은 공자 하나가 앞으로 들어왔다.

그는 선실 안에서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거기에 그의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잘생긴 얼굴 위엔 방만하고 도도한 표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꼿꼿하고 다부진 자태에선 홀로 구름을 노닐어야 하는 고고한 학이 오리들 사이에 끼어 피곤하단 듯, 권태로움이 흘렀다.

한제의 눈이 끝내 풀어져 버렸다.

‘도, 도성은 과연 영웅호걸들이 넘쳐나는 곳이로구나. 저런 사람을 내 평생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선실에 들어온 그는, 두 사람이 늘어난 것을 보곤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그를 휘감고 있던 권태로움이 삽시간에 사라지더니 따스한 기운만이 남았다.

“딱 맞춰 돌아왔구먼, 사제.”

여강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 전에 우연히 지온 소저를 만났네. 이런 우연이 있겠는가?”

그저 ‘오’ 하고 감탄사만 흘린 루안의 시선이 지온에게 머물렀다 한제에게로 향했다.

“이분은……?”

지장이 대답했다.

“루 대인, 이분은 지온의 외사촌 오라버니이십니다. 성은 한이요, 이름은 제를 쓰고 한씨 집안의 셋째 공자입니다.”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심 그리 자세히 말할 이유가 있나 생각했다.

그때, 지장이 한제에게 말했다.

“이 분은 통정사의 루 대인이십니다.”

‘이리 젊은데 벌써 관직에 올랐단 말인가! 대단하구먼!’

 한제가 감탄하며 그에게 인사했다.

“소생 한제, 루 대인을 뵙습니다.”

그러자 루 대인이라는 사람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예상 밖에도 정식으로 예를 갖춰 마주 인사를 했다.

“한씨 가문 셋째 공자시군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한제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은 겨우 생원밖에 안 되는 자지만 상대는 당당한 조정 대신이 아니던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어찌 이런 과한 예를 차린단 말인가?

‘나더러 어떻게 인사를 받으라고!’

속으로 절규하던 그때, 그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있었다.

‘잠깐, 통정사? 루 대인?’

한제의 표정이 천천히 기괴하게 변했다.

자신더러 지온 동생의 마음을 사야 한다며 불렀을 때 조모님께서 뭐라 하셨더라? 지씨 가문이 권세를 탐하여, 사촌 동생인 지온을 북양왕가에서 쫓겨난 넷째 공자에게 붙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넷째 공자가, 뭐라더라? 불효하고 불의하여 명성이 바닥임에도 당금의 황제에게 알랑거리는 간신이 되어 지금의 근신(近臣)자리까지 올랐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절대 지씨 가문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게 둘 수 없다고 했었지? 그야말로 지온 동생이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꼴이라고…….’

루안을 바라보는 한제는 자신이 시시각각 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어딜 봐서 불구덩이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