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35)화 (235/385)
  • 235화. 사는 게 고된 우리 지온이

    조방궁 입구에 도착한 한제는 자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겠다고 했단 말인가?’

    하지만 조방궁까지 와서 멍만 때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한제는 꾸무럭꾸무럭 안으로 들어갔다. 곧 어린 선고를 발견한 그가 인사를 건넸다.

    “선고님, 실례지만 지온 소저께서 여기 계시는지요?”

    한제의 말을 들은 어린 선고가 눈을 반짝이더니 살갑게 대답했다.

    “지온 사저를 찾아오셨군요! 향을 올리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화신점을 보러 오신 건가요?”

    순간 당황한 한제의 말문이 막혔다.

    ‘지온 사저? 아, 지온을 어려서 데려간 분이 능운진인이셨지, 참. 그럼 사저가 맞지. 그런데 향이라니? 화신점은 또 뭐란 말인가? 설마 내 사촌 동생이 조방궁에서 그런 일까지 하고 있단 말인가!’

    한제는 부지불식간에 화가 났다.

    지씨 가문에서 설마 잘 부탁한다는 시줏돈도 주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잡일을 어디 관가의 규수가 직접 한단 말인가?

    ‘역시 조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았어. 고모부와 고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지씨 가문이 온이를 박대한 거야!’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렀다. 그리곤 뭐라도 좀 더 캐볼 요량으로 어린 선고에게 물었다.

    “향은 어찌 올리면 되고 화신점은 어찌 봐야하는 것입니까?”

    어린 선고는 한제를 데리고 사방전으로 향하며 설명했다.

    “사실 공자님은 지온 사저를 직접 찾으실 필요 없어요. 지온 사저께서 사방전의 전주(殿主)이시긴 하지만, 일은 대부분 청옥 사저가 다 보시거든요. 청옥 사저도 어려서부터 능운 사백을 따라 수행을 하신 분이라 도(道)에 정통해요. 물론 화신점도 무척 영험하고요!”

    한제는 어린 선고의 말을 한참 생각했다.

    ‘지온이가 전주(殿主)인데 대부분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 이거지? 뭐야, 그럼 바지 전주(殿主)란 소리잖아?’

    이제 보니 지씨 가문만 지온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도관까지 그 아이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반드시 만나야겠다면요?”

    “그럼 공자님의 운이 그만큼 좋으셔야겠지요.”

    어린 선고가 미안한 듯 말했다.

    “지온 사저는 사방전에 매일 계시는 게 아니거든요. 가끔은 며칠이나 뵐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한제는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오지 않을 땐 뭘 하고 지내는 겁니까?”

    어린 선고가 말했다.

    “지온 사저께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경도 필사해야 하시고, 조향도 하셔야 하고 거기다 대장공주마마의 말동무도 해야 하셔서 하루도 쉴 시간이 없으십니다. 얼마 전에 공주마마께서 잠을 못 이루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온 사저가 며칠이나 잠도 안 주무시고 안면향(安眠香)을 만들어 내시기도 하셨고요.”

    어린 선고는 지온이 정말 너무 바빠 그런 것이지, 일부러 향객을 홀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소 과장을 보탠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한제의 귀에 들어갔을 땐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대장공주의 수양딸이 된 것이 좋은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불쌍한 제 사촌 동생은 조방궁에서도 지내는 게 너무 힘들어 어떻게 해서든 대장공주에게 잘 보여야 했던 것이다.

    ‘조모님이 외손녀만 예뻐하여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생각했는데……. 내가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어!’

    인제 보니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제 사촌 동생을 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혼인을 하여 제 집안으로 데려오는 것뿐이었다.

    고로 한제는 지온의 마음을 사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선고님,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곧 도착합니다. 저 앞이 바로 사방전이에요.”

    어린 선고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사저께서 계시는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어린 선고의 뒤를 따르던 한제는, 어린 선고가 사방전에 들어가서 누가 봐도 어린 선고보다 경력이 많은 듯 보이는 다른 선고에게 인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청옥 사저를 뵙습니다.”

    스물이 조금 넘은 듯 보이는 그 선고는 순하고 부드러운 외양으로, 전혀 누구를 괴롭힐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외양만 봐선 알 수 없군!’

    한제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청옥 사저, 지온 사저께서 오늘 나오셨나요?”

    “딱 맞춰 찾아왔네. 지금 뒤에서 함옥이에게 조향을 가르치고 계시거든. 가서 뵈려고?”

    숨는 법이 없던 지온은, 누가 찾아오든 만날 수 있었다. 신이 나서 그대로 들어가 지온을 보려던 어린 선고는 찰나 화들짝 놀라며 밖에 세워둔 한제를 떠올렸다.

    “아! 청옥 사저, 어떤 공자께서 지온 사저를 찾으세요.”

    한제를 본 청옥이 미소와 함께 다가와 예를 갖췄다.

    “화신점을 보러 오셨는지요? 그럼 지온 사저를 찾으실 필요 없이 빈도가 봐드릴 수 있습니다.”

    어린 선고에게 들은 그대로의 상황이 펼쳐지자 순간 열이 뻗친 한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가 점 같은 걸 보러왔다고!’

    제 사촌 동생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더욱 당당하게 나서줘야 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지온 소저에게 한 공자가 찾아왔다 전해주십시오. 저는 지온이의 외사촌 오라비입니다!”

    청옥이 전한 말에 지온은 놀라 하던 일을 멈췄다.

    “내 외사촌 오라버니요?”

    “한 공자라 했어요. 사저의 외가가 한씨였지요?”

    “네.”

    연자를 함옥에게 넘긴 지온이 손을 씻었다.

    “왜 왔는지 말하던가요?”

    “아니요,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만 계세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은 서아에게 제 손을 내밀어 물을 닦게 하고는 앞치마를 벗고 옷차림을 다시 정돈했다.

    * * *

    정리를 끝낸 지온은 한제를 맞으러 나섰다.

    사방전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한제는 전보다 더욱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지온이 나오는 것을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 허리를 더욱 곧추세웠다.

    “오라버니.”

    지온이 몸을 낮추며 예를 갖추자 한제도 급히 마주 인사했다.

    “지온 동생!”

    웃음을 지은 지온이 물었다.

    “향을 올리러 오신 건가요?”

    한제가 대답했다.

    “아니다.”

    “그럼 일부러 저를 보러 찾아오신 건가요?”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끄덕이는 한제를 보고 지온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는 건가요, 아닌 건가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한제가 말했다.

    “오늘 날이 좋아서 지온 동생과 나들이나 가려고 찾아왔지.”

    옆에 있던 청옥은 고개를 들고는 구름이 낀 하늘을 보았다.

    ‘날이 좋다고?’

    그러나 지온은 대답은 흔쾌했다.

    “도성에 오신 건 오랜만이시지요? 그럼 낯선 것이 많으실 테니 이번엔 제가 오라버니를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순간 한제는 초조해졌다. 그는 사실 조방궁 안을 지온과 함께 돌아다닐 생각이었던 것이다.

    ‘조방궁을 돌아다녀야 온이의 외가가 돌아왔다는 걸 알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지온은 그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바로 마차를 준비했다.

    청옥이 피풍의를 챙겨와 지온에게 건네며 말했다.

    “날이 점점 추워지니 옷을 더 챙겨 입으세요, 사저.”

    고마움을 표현한 지온은 피풍의를 두르고 밖으로 나서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아, 음……!”

    한제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지온이 탄 마차의 마부는 원래 지씨 가문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일을 겪고 루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마부를 붙여주었다.

    새로 온 마부는 젊고 준수한 사내였으나, 행동이 무척 건들거렸다. 매번 원망 가득한 눈으로 지온을 바라보며 꼭 지온이 그에게 빚이라도 진 듯 굴었던 것이다. 지금도 역시나 지온이 소년과 함께 등장하자, 그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희번덕댔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가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말투로 물었다.

    “우선은 장락지로 가죠.”

    대답하며 지온이 마차에 올랐다. 한제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내심 지온과 마차를 같이 타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온 것도 아니어서 말이다.

    ‘역시 마부 옆에 앉아야 하나?’

    그런데 그때 서아가 한제에게 다가오더니 그를 재촉했다.

    “한 공자님, 어서 오르셔야지요. 그래야 저도 앉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시녀가 마부 옆 자리에 앉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럼 한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제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부가 불퉁히 말했다.

    “지금 저자와 지온 소저를 마차 안에 같이 앉히겠다는 거요?”

    서아가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대꾸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리 아가씨의 외사촌 오라버니라고요! 같은 집 사람인데 같이 앉지도 못해요?”

    “허! 꼴에 외사촌이란 거지?”

    서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 아가씨도 가만히 계시는데, 한낱 마부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난 우리 공자님을 대신해…….”

    “입! 그 입 좀 다물어요!”

    서아가 버럭 화를 냈다.

    “여기 왔으면 우리 아가씨 말이나 잘 들으라고요! 그렇게 하기 싫으면 지금 당장 돌아가든가!”

    서아의 기운에 눌린 마부는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 그렇게 살갑던 시녀가 돌연 제게 입을 다물라니!

    ‘괜히 저 여자를 모시는 시녀가 아니구먼!’

    쳇 하고 혀를 찬 마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사이 한제는 조심스레 마차 천막 문을 걷어 올리며 슬금슬금 마차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서아가 마부 옆자리로 올라갔을 때, 갑자기 마부가 말에 채찍을 휘두르는 바람에 미처 제대로 착석하지 못한 서아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녀는 얼른 마차 천막 문을 붙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마차 제대로 못 끌어요?”

    마부가 그 말을 무시하며 듣는 척도 하지 않자 서아는 열이 뻗쳤다.

    “당신,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내일 당장 돌려보낼 줄 알아요!”

    “눼에~ 눼에~!”

    마부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저는 야우라고 하굽쇼, 앞으로 절대로 잊어버리지 마십쇼! 아시겠습니까?”

    야우 역시 열이 뻗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누구던가? 북양왕의 제일가는 심복이 아니던가?

    ‘여기가 북양이었으면 지부(*知府: 부(府)의 행정수장)든 지주(*知州: 주(州)의 으뜸 벼슬아치)든 다 내 눈치를 보며 설설 기었을 텐데!’

    그런 자신이 어쩌다 뜬금없이 도성까지 떠밀려 와 넷째 공자님 옆에서 머슴 노릇이나 하게 됐단 말인가.

    ‘아냐, 이건 괜찮아. 어차피 가문의 넷째 공자님이시다. 다 집안 주인 분들이시니 모시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머슴살이 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그마저도 좌천되어 지온 소저의 마부 노릇이나 하게 됐냐고, 대체!’

    야우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아냐, 이것도 괜찮아. 어차피 앞으로 주인으로 모시게 될 분이니까, 그 날이 당겨졌다 생각하면 되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저 새파란 시녀에게까지 욕을 들어 먹어야 하는 거냐고!’

    말을 몰던 야우는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로 슬픔에 잠겼다. 

    ‘하아, 이게 다 잠깐 정신줄을 놓고 북양으로 그런 정보를 전달한 탓이지……. 흐어엉! 공자님, 제가 정말 일부러 공자님을 남색이라 한 게 아닙니다! 공자께서 너무 잘 숨기셨던 탓이죠! 공자님, 제발 화를 그치시고 저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놔주세요! 제발! 제에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