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34)화 (234/385)
  • 234화. 미남계

    노부인이 다시 물었다.

    “루씨 가문의 본가는 어디라던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긴 한 것인가?”

    잠시 침묵하던 정씨가 결국 입을 열었다.

    “북양입니다.”

    “북양…….”

    노부인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큰 며느리인 한씨 부인이 그 말을 듣자마자 놀라 얼굴을 굳히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설마 혼처가 북양왕가인 것입니까?”

    그 질문에 정씨는 바로 불길함을 감지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노부인이 제 큰며느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는 것이야? 누구기에?”

    한씨 부인이 복잡한 시선으로 정씨를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북양왕가의 넷째 공자를 기억하시지요?”

    노부인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듯 대답했다.

    “제 형과 작위를 두고 싸운 그 불효자 말인가? 형부에 있다하지 않았어?”

    “올 해 영전하여 통정사로 갔습니다.”

    멈칫한 노부인이 다시 정씨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가 맞는 겐가?”

    정씨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노부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어쩐지! 온이의 배경에 그리 완벽한 이가 들어왔다 했더니, 그자였던 게야!’

    물론 그런 일만 없었다면 루 공자는 분명 감히 쳐다도 못 볼 좋은 혼처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래도 그런 불효막심한 자와 어찌 혼사를 맺을 수가 있겠나?’

    “그 혼처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구먼.”

    노부인이 천천히 읊조렸다.

    “혼처는 여러 곳을 알아보는 게 좋지.”

    정씨가 송구한 표정으로 웃었다.

    “어르신, 루 대인은 외모부터 능력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 혼사는 대장공주께서 매파가 되어 보증하고 있고 북양태비께서도 직접 찾아 진행하신 일입니다. 그것만 보아도 불효자란 말은 아마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노부인의 의심도 같이 깊어졌다. 그녀의 얼굴에 어둠이 깔렸다.

    “혼인과 같은 인륜지대사는 제대로 살피는 게 좋네. 어차피 온이도 아직 어린 나이가 아닌가?”

    * * *

    이야기를 들은 지온이 방긋 웃었다.

    “루 대인이 그 정도로 환영받지 못했군요?”

    정씨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혹시라도 한씨 가문에서 끼어들기라도 하면 혼사를 진행하기 어려워질 텐데, 지금 웃음이 나오는가!”

    정씨 자신은 계모라 말에 힘을 주기 어려웠고, 대장공주는 양모였으니 지온의 핏줄은 아니었다. 지온의 외가인 한씨 가문이 혼사에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은 지온의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기에 명분이 있었다.

    만약 정씨가 계속 고집을 부려 루안과의 혼사를 강행한다면 두 집안은 서로 원수를 질게 불 보듯 뻔했다.

    “외조모께서 자네를 무척 아끼시는 것 같지 않았나. 허니 우리가 그쪽 말을 아주 무시할 순 없을 것이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이렇다 할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으니 노부인이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자상함이 넘쳐흐르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제 딸에 대한 감정을 그녀에게 쏟는 것이 분명했다.

    지온은 그런 어르신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온이 물었다.

    “어머니, 혹시 아까 둘째 외숙모님의 눈빛을 보셨나요?”

    “왜 그러는가?”

    “저를 뜯어보는 눈빛이었습니다. 처음엔 저도 왜 그런지 몰랐는데, 한제 오라버니께서 오시고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한씨 가문에서 자네와 한제 공자를 이어주고 싶어 하는 것이로군.”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저는 양친이 모두 안 계시고, 집안도 그리 좋지 않으니 어쨌든 혼사를 진행하기 어려울 게 아닙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사정을 모두 아는 외가에 들여 괴롭힘이라도 받지 않고 살게 하려는 마음인 것이지요.”

    정씨가 지온을 흘겼다.

    ‘괴롭힘을 당해? 어느 가문으로 시집을 가든 괴롭힘은 그들이 당하지 않겠는가?’

    “여하튼 일이 좀 어렵게 되었구먼.”

    정씨가 연신 한숨을 뱉었다.

    “루 대인이 그랬던 이유를 자네 외가에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씨 가문은 가문대로 오해하고 있으니 분명 쉽게 허락하려 들지 않을 것이네. 그렇다고 대장공주께서 힘으로 누를 수도 없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던 지온이 이윽고 대답했다.

    “그럼 외가에서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요!”

    정씨가 흠칫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지온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와 한제 오라버니를 같이 붙여 놓고 싶으시다니, 그리 해드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지온!”

    * * *

    지온의 큰외삼촌인 한 노야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부인에게 불려갔다.

    노부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노야는 상을 치며 분노했다.

    “역시 계모는 믿을 수 없을 줄 진작 알았습니다! 루안, 그자가 어떤 자입니까? 제 형을 배신하고 재물이나 탐했던 인간입니다! 그런 작자에게 어떻게 시집을 보낸단 말이에요! 도성에 제대로 된 어느 가문이 제 딸을 그런 놈에게 주겠습니까? 권세에 눈이 돌아간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한씨 가문 이부인이 새침하게 말을 받았다.

    “어머니께서 지온이를 우리 한제에게 붙여준다 하셨을 때 저도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희 바깥양반과 아주버님의 관계를 생각해 억지로 받아넘긴 것인데, 도리어 우리 한제를 눈에 안 차하는 게 아닌가요?”

    노부인이 인상을 썼다.

    “무슨 그런 소릴 하는 게야? 언제 우리가 그런 소릴 입에 올렸다고? 이 일과 눈에 안 차는 것이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어머니…….”

    노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보니 온이는 권세를 탐하는 아이가 아니었어. 제 혼삿길이 가시밭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혼약까지 물린 데다 집안 가세마저 저러니 이것저것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겠지.”

    한 부인이 노부인의 의중을 떠보듯 물었다.

    “그럼 어머니께선…….”

    “한제와의 혼사는 그래도 넣어야지.”

    노부인이 대답했다.

    “루안, 그 사람은 온이보다 나이도 몇 살이나 더 많지 않은가. 거기다 심계도 깊으니 분명 온이와 성격이 맞지 않을 게야. 우리 한제와 온이는 서로 또래인데다 둘 모두 외모도 뛰어난 선남선녀가 아닌가? 아주 딱 맞는 짝이지. 자네, 한제에게 온이를 자주 불러 같이 놀면서 친해지라 하게. 온이만 원한다면, 계모가 어디 강요할 수 있겠는가?”

    이부인은 반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 노야가 바로 맞장구를 치는 게 아닌가!

    “어머니 말씀이 딱입니다! 바로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형 뒤에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한씨 가문의 차남, 이노야는 그만 제 부인에게 피멍이 들도록 꼬집혔다.

    영문을 모르는 이노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부인을 보며 물었다.

    “왜 이러시오?”

    이부인은 그저 제 남편을 째려보기만 하며 분을 삭였다.

    말만 거창했지, 한 마디로 제 아들에게 가서 미남계를 쓰란 것이 아닌가!

    * * *

    소식을 들은 한제는 앙앙대며 난리를 쳤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혼사까지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다 했는데, 그것으로 부족하셨던 것입니까?”

    지온이 연초에 도성으로 돌아왔을 당시 돌았던 소문은 한 해의 반이 지나갈 때쯤 한씨 가문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

    딸을 먼저 저승으로 보낸 노부인은, 죽은 딸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바람과 함께 제 외손녀를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려서 집을 떠난 ‘지온 소저’는 아홉 해가 가도록 소식조차 없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던 터라 한 노야만 옆에서 노모의 슬픔을 다독였을 뿐, 다른 이들은 이에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온이 도성으로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노부인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외지에 있는 사당까지 찾아가 지온의 귀환을 감사하는 불공까지 드렸다.

    그러나 기쁨은 길지 않았다. 도성으로부터 속속 날아오는 소식이라고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지온의 온갖 추문뿐이었다. 처음엔 유씨 가문에서 지온과의 혼사를 원치 않아 물리고 싶어 한다는 소식이 도착하더니, 이윽고 혼약이 파기된 후 지씨 가문에서조차 지온을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지온이 조방궁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됐단 소식이 날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천리나 떨어진 먼 곳은 바람 같은 소문조차 힘겹게 당도하는 곳이 아니던가? 하물며 당도한 소문조차 처음 모습은 간데없고 전혀 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그 소식이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한 노야의 통판직 임기가 거의 만료 될 때쯤, 노부인은 마음을 굳혔다. 

    그래도 어렸을 적 외손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않던가? 분명 그 미모가 상당할 터였다. 쌓은 교양은 없다지만 그것도 외지를 오래 떠돈 탓일 테니 앞으로 다시 제대로 교육하면 될 터였다.

    ‘집안에서 해줄 수 있는 뒷받침이야, 어차피 우리 가문이 권세에 빌붙어 사는 가문도 아니었으니 우리 힘으로 노력해봐야지. 어쨌든 그리 하면 여차저차 할 수는 있을 게야.’

    노부인이 제 의지를 전하자 한 노야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아직 혼약이 없는 셋째인 한제와 나이도 맞으니 서로 붙여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한씨 가문의 이노야는 비록 이렇다 할 능력은 없었지만 단 하나 장점이 있다면 제 어미와 형님의 말에 잘 따른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형님이 그리 말하니 그는 곧장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에 남은 이부인이 무슨 수로 다른 말을 한단 말인가?

    노부인은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상황이라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하지만 한제까지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야말로 그는 마른하늘에 친 날벼락이 우르릉 쾅 하고 제 머리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사춘기 소년이 다들 그러하듯, 한제 역시 한창 여인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 시기였다. 아직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기대하는 바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아름다운 꿈을 깨부순 짱돌은 그렇게 날벼락처럼 떨어졌다. 집안 어른에 의해 돌연 혼사가 결정된 것도 충격이었는데, 상대마저 교양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촌 여동생이라니!

    한제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의 압박을 이길 수 없었던 그는 반항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끝내 눈물을 머금고 제 모진 운명을 받아들였다.

    힘겨웠으나 현실을 받아들인 후로 한제는 제 상상과 다른 사촌 여동생을 보고 그나마 이 혼사에 아주 조금이지만 기대감이 생겼었다.

    ‘그런데 뭐? 이제 와 지온에게 다른 혼약이 있으니 나더러 그 아이의 마음을 돌리라고? 이 집안은 왜 나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한제는 환장할 지경이었으나 이부인은 굳이 방방 뛰는 한제를 다독여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달랠 생각 없이 자신에게 눈만 홉뜨고 있자 이노야가 나서서 한제에게 물었다.

    “지온이의 외양이 부족하더냐?”

    한제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건…… 괘, 괜찮았습니다.” 

    “보기에 교양이 없어 보이더냐?”

    “그것도…… 괜찮았습니다.”

    “그럼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말문이 턱 막혔던 한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 돌리지 마십시오! 저는 어른들이 원하시는 대로 혼인을 하겠다 했던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제가 나서서 그 아이의 마음을 사야 한다니요…….”

    “네가 나서서 마음을 사는 게 뭐가 어떻다고? 사내가 그리 하는 것이 어디 이상한 일이더냐?”

    “아, 아니, 당연히 그럴 수 있긴 하지만…….”

    “그럼 된 것이지 볼멘소리는 왜 늘어놓는 것이야? 어서 준비하고 지온이에게 가거라!”

    “…….”

    한제는 제 아비의 말발에 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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