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33)화 (233/385)
  • 233화. 지온의 외조모

    한씨 가문의 입성(入城)은 예상보다 빨랐다.

    직접 하수(*賀壽: 장수를 축하함) 하겠다던 북양왕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이 먼저 도성에 당도한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연통을 주지 않아, 지온은 그들이 도성으로 이사까지 마친 후에야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동생과 매형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남은 것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질뿐이니 누구에게 먼저 연통을 넣겠는가? 생질이 가주로서 집안을 건사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정씨 부인은 이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힘없는 제 집안은 지온을 받쳐 줄 뒷배가 되어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온이 대장공주라는 대단한 뒷배를 가지게 됐다고 자신의 가문과 관계를 끊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와중에 외가 사람들이 왔으니 지온도 어느 정도 배경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 * *

    정씨는 먼저 한씨 가문에 첩지를 보낸 후, 잡은 날짜에 지온을 데리고 한(韓)씨 가문을 방문했다.

    한씨 가문은 쓸데없는 허세 없이 두 사람을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지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혼사가 정해졌을 때만해도 지씨 가문의 어르신은 아직 청운(靑雲)에 오르기 전이었다. 당시 두 집안은 물려받은 가산도 비슷하고 어느 정도 위치가 되는 중간 귀족 가문으로서 혼사를 진행하기 딱 좋았다.

    돌아가신 어르신을 배출한 지씨 가문만큼, 한씨 가문에 관운이 따른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한씨 가문은 관(官)에 뿌리를 제대로 내렸다. 그 후로도 단단하게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지금도 한씨 가문은 체면치레는 할 수 있는 집안이었다.

    한씨 가문의 한현(韓鉉)은 비록 품계가 높은 관직에 종사하는 이는 아니었으나 그가 하는 업무만큼은 무척 중요하게 쓰이는 이라, 장래를 생각하면 지씨 가문의 두 노야에 비해 상황이 좋았다.

    후원 정방(正房)에 도착한 지온은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이 정중(正中)에 있는 것을 보자마자 그녀가 바로 ‘지온 소저’의 외조모란 것을 알았다.

    지온이 다가가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지온의 외조모인 한씨 가문의 노부인(老夫人)은 지온을 붙잡고 한참이나 위아래로 그녀를 살폈다. 곧 노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이 어찌 이리 빨리 흘렀단 말이냐. 온이가 못 본 새 이리 컸구나. 아주 어여쁘게 자랐구나. 네 어미와 똑 닮았어.”

    지온은 제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노부인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저와 비슷한 외양이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외탁을 한 듯했다.

    한씨 가문의 큰 며느리인, 한 부인이 제 시어머니를 달랬다.

    “어머니, 가족을 이리 만나는 것은 기꺼운 일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지요.”

    “맞아요, 어머니!”

    한씨 가문 차남의 부인되는 이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오시는 내내 외손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리 만나셨는데 기쁜 일이지요!”

    그녀가 이상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신 지온을 훑어보는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만족스러운 얼굴인 것 같다가도 트집을 잡으려는 듯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지. 내 눈물바람을 할 게 아닌 게야.”

    눈물을 훔친 노부인이 지온을 끌어 제 옆에 앉히더니 이것저것 물었다.

    “스승님과 그리 떠나 9년이나 지냈다고? 그간 고생이 많았겠구나.”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은 당연히 집에 있던 것만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제게 무척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고생이라기보다, 세상을 크게 볼 수 있는 경험을 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기도 했고요.”

    지온의 대답이 기꺼운 듯 노부인이 제 며느리들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들었느냐? 어찌 이리 철이 난 게야. 묵향 풍기는 학자 가문에서 즐거움만 찾는 것은 아니 될 말이다만, 먹거리나, 입성보다야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이 중하지.”

    그녀의 말에 두 며느리가 고분고분 대답했다.

    외손녀가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본 노부인은 당연히 정씨에게도 부드러울 수밖에 없었다.

    “온이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는가. 자네가 살피느라 고생 많았겠구먼.”

    능운진인이 아무리 대단한 고인이라지만, 노부인은 그녀가 관가 소저의 교육법까지 알았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 보이는 지온의 언어나 자태는 모두 가문에 돌아온 후 배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리 제대로 가르치다니 애를 많이 썼겠어.’

    정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부끄럽지만, 저는 온이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 아이는 혼자 저리 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노부인은 정씨 부인이 겸손한 태도로 예의상 한 대답이라 생각했다.

    그때 한씨 가문의 자녀들이 찾아왔다.

    한씨 가문은 자녀가 적지 않았다. 장남가와 차남가 모두 합쳐 공자 다섯에, 아가씨도 셋이나 보았던 것이다.

    지온보다 두 살 연상인 첫째 소저는 이미 시집을 간 후라 이번에 같이 도성에 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남은 소저 둘은 겨우 열 살 남짓으로 아직 어렸다.

    아들 중 장남과 둘째는 모두 혼인을 했다. 그리고 남은 아이 셋 중에 가장 어린 막내는 열 살이 안 됐고, 그보다 하나 큰 아이가 열세 살이었다. 남은 셋째 공자는 이제 열일곱으로 지온과 나이가 비슷했다.

    한씨 가문 셋째 공자가 안으로 들어오자 이부인이 그에게 손짓하며 불렀다.

    “제(齊)야, 이리 오거라! 네 사촌과 인사하거라!”

    한제(韓齊)는 그 이름처럼 가지런한 이목구비를 타고났다. 거기다 피부가 유달리 하얀 한씨 가문의 공자인 만큼,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터덜거리는 몸짓에서 기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 어미의 말에 지온에게 고개를 돌린 한제가 설렁설렁 예를 갖췄다.

    “사촌을 뵙습…….”

    멍해진 얼굴로 말을 마치지도 못한 한제였으나, 지온은 제대로 예를 갖췄다.

    “셋째 외종사촌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그 모습을 본 노부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네 외삼촌이 앞으로 도성에서 일을 해볼까 하여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일이 잘 풀리면 앞으로 도성에서 쭉 살게 될 게야. 그러니 너희 둘도 서로 자주 만나며 가까이 지내도록 하거라.”

    지온이 웃으며 대답하는 동안, 정씨는 한씨 가문 사람들을 지켜보며 침묵을 지켰다.

    노부인이 말했다.

    “제야, 동생들을 데리고 가 놀다 오거라.”

    그리고 다시 지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른들과 있어봐야 답답하기만 하지, 너도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와.”

    정씨를 바라본 지온이 웃으며 그리 하겠다 대답했다.

    아이들이 떠나고 노부인은 정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듣자 하니, 온이가 혼약을 물렸다고?”

    정씨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온이와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 사이에 있던 혼약은 물렸습니다.”

    노부인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내게 숨길 것 없네. 유씨 가문에서 우리 온이에게 만족하지 않았던 게지?”

    정씨는 그저 웃었다.

    처음엔 분명 그랬다. 그래서 정씨 역시 유씨 가문을 다소 불만스레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일 이후, 유씨 가문에서 때마다 지온을 얼마나 잘 챙겨 주었던지 품었던 불만도 흐지부지 사라졌던 터였다.

    “내 눈엔 우리 온이가 아주 훌륭하네. 어차피 유씨 가문은 문턱이 너무 높아 맞지 않는 상대였지.”

    노부인이 말을 이었다.

    “전에야 우리가 도성에 없었으니 어찌하질 못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도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앞으로 온이의 혼사에 대해선 걱정할 것 없네.”

    정씨는 노부인의 말에 오히려 걱정이 생겼다.

    대장공주가 그녀에게 언질도 했고, 제 눈으로 이미 루안이 지온에게 어찌하는지 모두 보지 않았던가? 두 가문 사이에 이미 묵약이 된 터라, 올 연말에 구체적인 계획을 잡아보려 하지 않았던가!

    정씨는 솔직하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온이의 혼사는 이미 묵약한 곳이 있습니다.”

    “음?”

    놀란 노부인이 물었다.

    “자네가 찾은 것인가? 어느 집안인가?”

    * * *

    지온은 회랑에서 한씨 가문 아이들이 제기를 차며 노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제 동생들과 놀아주며 연신 몰래 지온을 흘끔거리는 한제의 표정은 무척 변화무쌍했다. 웃었다가 돌연 인상을 쓰기도 하는 게, 대체 무슨 생각 때문에 저러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때, 서아가 지온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가씨, 한제 공자님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요?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잖아요.”

    지온이 서아를 흘겼다.

    “말조심 해야지.”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걸요!”

    서아가 입을 삐죽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아가씨가 공자님을 어떻게 한 줄 알겠어요.”

    지온은 어찌된 상황인지 대충 알 것 같았으나 제 입으로 말을 꺼내기는 뭣했다. 그녀는 대부인이 말을 전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간단히 내용만 전달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 일이, 예상 밖으로 귀찮아졌다.

    시녀가 하나 찾아와 지온을 불러 안으로 들어서니 노부인의 안색이 매우 나빴던 것이다. 두 며느리는 어딘가 복잡한 듯한 얼굴이었다.

    홀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정씨가 그들을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시간이 많이 늦어 그만 온이와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르신, 건강 잘 챙기시고 다음에 온이가 또 뵈러 오겠습니다.”

    좋지 않은 표정을 지워낸 노부인이 지온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본래는 네게 며칠 묵어가라 할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에 도성에 돌아온 것이라 정리가 너무 안 됐지 무어냐? 하여 너까지 귀찮게 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온아, 전에는 우리가 도성에 없어 널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만, 이제 돌아왔으니 무슨 일이 있거들랑 개의치 말고 이 외할미에게 말하거라.”

    “예.” 

    지온은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정씨와 함께 한(韓)씨 가문을 떠났다.

    * * *

    마차의 차창이 내려지고서야 지온이 정씨에게 물었다.

    “한씨 가문의 기분이 상한 것인지요?”

    정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 문인들에게 고결함이 얼마나 중요한데, 루 대인이 가진 배경은…….”

    * * *

    조금 전.

    정씨가 지온과 묵약이 오간 상대에 대해 알리자, 노부인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통정이란 직위 자체는 천자를 가까이 모시는 친신(親臣)의 자리임은 분명했지만…….

    ‘통정이면, 경력이 짧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지 않은가?’

    고관과 관계를 다지려 지씨 가문에서 지온을 후처로 넘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노부인의 표정이 그리 굳었던 것이다.

    “우리가 계속 도성을 떠나있던 터라 도성의 일을 잘 알지 못하네. 루 통정의 연치(年齒)가 어찌 되는가?”

    “나이는 온이보다 조금 많습니다. 올 해 스물하고도 셋입니다.”

    온이보다 조금 많다는 말에 노부인은 순간 분이 화르륵 타올랐으나, 뒷말을 듣고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스물 셋이란 말인가? 연치가 그리 어리다고?”

    사내의 혼기(婚期)는 상당히 여유 있게 보는 편이었다. 일찍 혼인하는 이는 열대여섯 살에 가정을 꾸리기도 했고, 어떤 이는 스물이 되어서야 혼사가 오가기도 했다.

    특히 청운의 꿈을 꾸는 이들은 과거 준비 때문에 스물이 넘도록 미루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것이다.

    ‘스물 셋이면 나이는 적당히 맞는 구먼.’

    노부인이 다른 것을 물었다.

    “생긴 것은 어떤가? 혹시 혼인을 했던 이는 아닌가?”

    노부인은 루 통정의 신분이나 나이면 어느 집안의 영애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다 생각했다. 하여 혹시나 그 본인에게 뭔가 흠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정씨가 겸손한 대답을 했다.

    “혼인은 한 적이 없고, 외모는…… 본 이들은 모두 좋다 평하였습니다.”

    노부인은 미궁에 빠졌다.

    제 손녀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온의 집안 배경을 생각하면 문턱 높은 가문에 들기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재상을 배출했던 가문이니 문인들이 말하는 고귀함은 갖췄지만, 하필 양친을 모두 잃었고 집안 가세마저 기울지 않았던가? 그 말은 지온과 혼인을 해도 처가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단 뜻이 아닌가.

    이것저것 생각해봤지만 지온이 가진 강점은 아름다운 외모뿐이었다.

    허나 외모를 보고 들이는 건 첩실이지, 정실은 역시 가문이 가장 중요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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