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32)화 (232/385)
  • 232화. 맞고 싶거나, 뒤지게 맞고 싶거나

    기분이 나아진 유신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가 화를 내는 게 두려운 게 아니오. 너무 많은 걸 알게 됐다가 몸을 뺄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될까 두려운 거지요. 루 통정의 신분을 생각하면, 사실 그와 이렇게 친해지면 안됐습니다. 내가 뭘 하든 루 통정에게 무시만 당할 때 빨리 그와 단교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자를 찾아가 왜 그리 들러붙었는지 모르겠소.” 

    지온이 웃음을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인연이지요! 대공자께는 친우가 많으시지만, 막역하다고 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지 않으신가요? 루 대인도 성격이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는지요? 그걸 알면서도 대공자께서 굳이 루 대인을 찾아가 그를 붙잡고 늘어진 걸 보면, 그의 그런 부분이 공자의 마음에 들었던 거겠지요.”

    유신지가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사람 무시하는 꼴을 보면 미워도 한참 미워야 할 게 분명한데 말이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게 바로 사랑이죠.”

    결론을 내리듯 지온이 말하자 유신지가 제 생각에 빠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말로 설명이 안 됩니…….”

    그러다가 그는 다시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뭐라고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온은 미친 듯이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정도를 보니 웃음을 참는 게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그녀가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되어 유신지의 손을 토닥였다.

    “농담이에요. 그래도 제가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진 않았으니 대공자님은 스스로에게 좀 더 자신을 가지세요. 루 통정이 대공자를 정말 어떻게 하려 들었다면 지금까지 잘 지낼 수나 있었을까요? 그러니 당당히 가서 물어보세요. 그도 원하면 당연히 알려 주겠지요. 그리고 얘기를 들을지 말지는 물론 대공자님의 선택일 테고요.”

    이 말에도 유신지는 여전히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유신지를 보던 지온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혹시…… 의지가 부족해서, 대공자가 그쪽 길로 휩쓸릴까 봐 염려되어 주저하시는 건가요?”

    유신지가 할 말이 많다는 얼굴로 지온을 향해 두 눈을 희번덕거렸지만, 지온의 태도는 여전히 다정했다.

    “다 이해합니다. 그냥 묻지 마시지요.”

    유신지가 불퉁스레 대꾸했다.

    “궁금해 속이 터질 것 같단 말입니다!”

    그러자 지온이 화내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대답했다.

    “묻는 건 못하겠는데, 그렇다고 안 물을 수도 없다니요? 설마 지금 신랑감을 찾으시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유신지 소저? 조심하세요, 그러다 제게 맞는 수가 있으니까!”

    * * *

    제(祭)가 끝나도록 유신지가 수심에 차 있자, 지온은 도와주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유신지가 떠나자마자 주변을 기웃대던 유민이 도도도 달려와 쫑알쫑알 물었다.

    “언니, 큰 오라버니가 뭐래?”

    “아, 지금 마음을 몹시 괴롭히는 일이 있대. 내게 의견을 물으시더라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한 지온의 말에 유민이 화들짝 놀랐다.

    “유씨 집안의 대공자인 유신지 오라버니가, 감정 문제를 겪고 있다고?!”

    “응.”

    유민은 멀어지고 있는 유신지의 뒷모습과 지온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유민은 유신지 오라버니가 지온 언니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상대에게 조언을 구하지는 않잖아? 그럼 큰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단 말이야?’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거야?”

    어렵게 질문을 던진 유민에게, 지온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게 꼭 여자라고 누가 그래?”

    유민이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제 입을 움켜쥐었다.

    한참을 충격에 허우적거리던 유민이 목소리를 낮췄다.

    “……역시 오라버니는 사내를 좋아했던 거지?”

    유민의 질문에 이상함을 느낀 지온이 물었다.

    “역시……? 왜 역시인데?”

    그러자 지온에게 바짝 붙어온 유민이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오라버니가 이상하단 걸 난 이미 예전에 알아봤지. 봐봐, 그리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해서 입신양명한 인재가 풍류라곤 전혀 즐기질 않잖아. 그게 사람이야?”

    지온이 심각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사람이 아니지.”

    “그치!”

    지온이 제 의견에 동의하자 유민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10살 때부터 내가 집 밖만 나가면 사람들이 찾아와 오라버니 소식을 물었거든? 5년이 넘도록 오라버니에 관해 물어본 여인들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아직도 저러고 있는 게 어디 정상이겠어?!”

    “그렇지, 정상이 아니지!”

    “혼인은 고사하고 지인으로 둔 어여쁜 처자도 주변에 하나 없다니까? 맨날 옆에 부주만 끼고…….”

    말을 잇던 유민이 돌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별안간 유민의 표정 변화가 현란해졌다.

    “생각해 보니 부주가 풋풋하니 좀 생겼지 않아?”

    “응응, 그렇지.”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민의 상상이 우리를 뛰쳐나간 말처럼, 붙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끝없이 달려나갔다.

    “백모님 안타까워 죽겠다. 아들이라고 달랑 둘 있는 게, 하나는 몸에 문제가 있고 하나는 머리에 문제가 있으니…….”

    “흡……!”

    지온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지금 누구 이야길 하는 것이냐?”

    이때, 두 사람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게 누구냐면…….”

    대답하려다가 휘릭 뒤를 돌아본 유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큰, 큰 오라버니!”

    유신지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건 둘째일 테니, 그럼 몸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 오라버니란 말이로구나? 유민 소저, 시집도 안 간 규방 소저가 제 오라버니의 신체에 문제가 있단 말을 뱉다니, 맞고 싶단 거겠지요? 아! 아니면 뒤지게 맞고 싶은 것이거나.”

    후다닥 지온의 뒤로 숨은 유민이 알랑거리는 미소를 장착한 채 고개만 쏙 내밀었다.

    “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잘못 들은 거야.”

    “오, 그래? 내가 무엇을 잘못 들은 것이냐? 어디 한 번 설명해 보아라.”

    “그러니까 나는… 그러니까 내가…….”

    유신지가 그녀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한 번만 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했다간, 네가 소설을 쓴단 것을 셋째 숙모께 다 말해버릴 줄 알아라!”

    혼비백산한 유민이 물었다.

    “그걸 오라버니가 어떻게 알았어?!”

    유민은 대번에 지온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지온은 손을 흔들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란 것을 분명히 했다.

    유신지가 허허, 웃었다.

    “소설 안에 그리 단서를 뿌려놨는데 내가 정녕 모르리라 생각한 것이냐? 변씨 가문 둘째 공자는 둘째인 모지가 아니더냐? 혼약도 파기 당했다고 잔뜩 비웃어 놨더구나. 녀석이 시간이 없어 그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을 다행인 줄 알거라.”

    “…….”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유민이 애걸복걸 매달렸다.

    “내가 잘못했어, 오라버니. 다음부터는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을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유신지는 찬바람을 쌩하게 휘날리며 돌아섰다. 그만 가보려던 그가 순간 마음이 놓이지 않은 듯이 다시 돌아섰다.

    “난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어!”

    유민이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대답하자 유신지가 지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지온 소저. 유민이에게 나쁜 물 들이지 마십시오! 소설을 쓰도록 꼬신 것도 그냥 넘어갔는데 대체 어디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전 아무 말도 안 한걸요!”

    지온이 자신은 무고하다는 듯 파닥파닥 손을 내저었다.

    이에 또다시 유신지의 코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어디서 발뺌을! 아무튼, 무슨 일만 생겼다간, 두고 보십시오, 바로 소저부터 찾아갈 테니까!”

    유민이 돌아서 멀어지는 유신지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위험했다. 오라버니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 중이었는데…….”

    지온은 유민의 혼잣말에 실소를 머금었다. 지금 유신지가 남색이라 소설에 쓰려 했단 말인가?

    ‘우리 유민이 간도 크지.’

    * * *

    밤.

    등불 아래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지온의 모습에 정씨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늦었네. 눈이 나빠질 수 있으니 그만 정리하고 자는 게 좋겠네.”

    지온이 잔뜩 열을 올리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 괴상한 무공을 연마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단 것을 증명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온이 정씨에게 물었다.

    “오늘 유씨 가문 삼부인이 갑자기 제 외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지요? 저희에게 미리 언질을 주려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씨가 멈칫했다.

    “먼저 준비해둘 수 있도록 언질을 준 거란 말인가?”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물었다.

    “어머니, 저는 어릴 적에 집을 떠나 제 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께서 지금의 한씨 가문이 어떤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정씨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 아버지를 처음 알게 됐을 땐 이미 자네 모친께서 세상을 떠난 뒤였네. 그렇지만 그 후로도 한씨 가문과 왕래가 있었어. 자네 아버지께서 전해 준 바로는, 부인께서 세상을 떠난 일로 자네 외삼촌이 내심 불만을 품고 계신 것 같다시더군.”

    지온이 물었다.

    “이유가 무엇인지요?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잘 대해주지 않으셨던 건가요?”

    “그건 당연히 아니네.”

    정씨가 대답했다.

    “다만 자네 어머니께선 가문의 정실로 들어오시지 않았는가? 남편의 이해만으론 부족하셨을 것이네. 아들을 낳지 못하다보니 늘 뒷말에 시달리셨고 자네마저 집을 떠난 후에는 가문의 여러 친인척이 딸마저 지키지 못했다며 복도 없다고 입을 놀린 것이지. 후, 사실 자네 어머니의 병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세.”

    이야기를 듣던 지온은 입맛이 씁쓸했다.

    비록 얼굴을 보진 못했으나, 그래도 지금의 몸을 낳아준 생모가 아니던가.

    정씨가 그녀를 위로했다.

    “한씨 가문이 도성으로 돌아오면 내, 자네를 데리고 인사를 하러 갈 것이네. 어찌 됐건 자네는 그들의 골육이 아닌가. 자네의 외조모께서도 아직 살아계시니 자넬 보면 무척 좋아하실 거야.”

    “외조부께선 안 계시지요? 외삼촌은 모두 몇 분이나 계십니까? 이모님은요?”

    지온의 물음에 정씨가 대답했다.

    “자네 외조부께선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외삼촌은 두 분, 이모님은 한 분일세.”

    그러다 정씨가 문득 속상한 듯 말했다.

    “그마저도 다 잊은 것인가?”

    지온은 순간 움찔했으나 크게 티 내지 않고 대답했다.

    “잊으셨는지요? 제가 도성을 떠나기 전에 크게 앓지 않았습니까. 당시 열 때문에 머리가 함께 상했습니다.”

    “그렇구먼…….”

    안타깝다는 듯이 수긍하던 정씨는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자네의 큰외삼촌은 학문이 뛰어나 지금도 통판 자리에 계시네. 그리고 자네의 작은 외삼촌은 학문보다 다른 잡기에 더 뛰어나 과거를 보지 않으셨어. 이모님은, 기억에 아주 먼 곳으로 시집을 가셨다 들었던 것 같네. 촉(蜀) 땅, 어디라 했던 것 같군.”

    ‘잡기가 뛰어나단 것은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니, 이 몸의 둘째 외삼촌은 분명 학문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일 터…….’

    지온은 대강 감이 왔다.

    한씨 가문이 도성으로 돌아오면 분명 왕래가 생길 것이다. 그들을 어찌 대할지 지온은 그들의 태도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마저 대화를 나눈 지온은 그리고 있던 것을 정씨에게 보였다.

    “어떠세요?”

    제 오라비의 점포와 집에 있는 기관들을 전부 정씨가 설치했으니, 그녀는 이 분야에 정통한 게 분명했다.

    슬쩍 그림을 훑던 정씨가 화들짝 놀랐다.

    “자네가 떠올린 것인가? 이 설계대로 만든다면 분명 커다란 위력을 낼 수 있을 것이네.”

    지온이 웃었다.

    “서책에서 보았던 것을 제가 좀 더 개량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사용할만하다 하셨으니, 내일 사람을 보내 만들라 하겠습니다.”

    정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도 되겠지만, 늘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니 크기를 좀 더 작게 만드는 게 좋을 것이네.”

    “얼마나 작게 만들면 좋겠는지요?”

    “반 촌(*半寸: 손가락 반 마디 길이).”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설계도 옆에다 이를 덧붙여 넣었다.

    정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쓰고 주무시게. 이야기는 내일 해도 늦지 않을 게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