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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31)화 (231/385)
  • 231화. 비밀

    “어머니, 이 방이 어떠신지요? 마음에 드십니까?”

    지온이 정씨를 방으로 이끌자 정씨가 슥 둘러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고생했네.”

    지온이 의운과 다른 시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들이 고생했지요. 집에 돌아온 후에 어머니와 크게 소통이 없었던지라 어머니의 취향을 모르겠습니다.”

    정씨가 하하, 웃었다.

    “자네는 참 솔직하구먼.”

    밀탐 출신인 그녀는 안 해본 고생이 없어 의식주, 무엇도 까다롭지 않았다.

    짐을 정리한 정씨가 곧 지온이 어찌 지내는지 하나하나 물었다.

    “하로와 의운에게서 자네가 매일 활을 쏜다는 얘기를 들었네. 그럼 힘도 꽤 쓰겠구먼?”

    지온이 대답했다.

    “글을 쓰려면 힘이 필요해서요.”

    정씨가 지온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맞잡고 밀어 보시게.”

    그녀의 행동에 지온은 내심 까드득 소름이 돋았다.

    “어머니, 이러시는 연유가……?”

    “자네 힘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네.”

    지온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을 시도했지만, 지온은 정씨가 움직이는 대로 밀리기만 했다. 지온은 무척 실망했지만, 정씨는 의외로 만족스러워 보였다.

    “확실히 열심히 활을 쏜 모양이로구먼. 그럼 수련하는 것도 쉽겠어.”

    지온이 경악했다.

    “어머니, 설마……!”

    정씨가 인자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게. 나이가 나이니만큼 고수가 될 만큼 수련하는 것도 불가능하네. 지난번과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호신술이나 알려주려는 것일세.”

    “아…….”

    지온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 *

    그러나 다음날, 그녀는 자신이 너무 성급히 마음을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그만 절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지온은 울상이었다.

    “매일 서예에 독서, 조향도 해야 하고 조방궁 일도 보느라 시간이 적잖이 들어갑니다. 간신히 시간을 내어 기마와 활쏘기 수련을 하고 있는데, 이건 정말 제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지온은, 정씨가 마당에 나무로 만든 목인(木人)을 꽂아두고 자신에게 쇄음공(鎖陰功)을 연마하게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지온은 싫었다.

    ‘선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내가 갑자기 돌변해서 손톱을 바짝 세우고 달려들면, 그게 말이 되겠어? 되겠냐고! 안 해! 절대 안 해!’

    정씨가 그녀에게 말했다.

    “손이 아닌 발을 사용해도 되네. 충분한 힘과 함께 정확한 곳을 찬다면 상대가 어떤 고수든 자네의 발차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

    “혹 상대가 여자라면요?”

    정씨가 대답했다.

    “여자라면 더 쉽지! 어차피 자네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구하러 오길 기다리면 되겠구먼.”

    “…….”

    소식을 들은 대장공주는 그보다 더 기뻐할 수가 없었다.

    “배워야지, 암! 배워야 하고말고! 이번에 납치된 일만 봐도 그렇잖으냐. 천만다행으로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지만, 이런 행운은 두 번 다시 없을 게야.”

    이야기를 들은 루안의 얼굴이 파르라니 질렸다. 어쩐지 하반신이 싸늘하게 굳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그가 뭐라 의견을 내기도 전에, 그는 대장공주와 정씨에게 떠밀리다시피 쫓겨나고 말았다.

    아무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절망한 지온은 저 자신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할아버지인 지 어르신이 소장한 서적들을 꺼내 정씨 앞에 늘어놓았다.

    “이게 무엇인가?”

    정씨가 의아해 묻자, 지온이 <노반유권(魯班遺券)>을 탁 치며 말했다.

    “무술을 배우지 않아도 제 한 몸 지킬 수 있단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책벌레들은 책벌레들만의 방법이 있지 않은가!

    * * *

    하원절(*下元節: 도교에서 음력 10월의 보름날을 이르는 말)의 조방궁은 관례에 따라 제(祭)를 지낸다. 

    유씨 가문 사람들은 조상께 올릴 제(祭)를 위해 일가친척과 함께 조방궁으로 찾아왔다.

    정씨는 지온과 함께 나비 사건이 있었던 오송원에서 이들을 맞았다.

    다소 늦게 들어온 유민이 주위를 둘러보다 유모지 옆에 섰다.

    “흠흠, 오라버니!”

    잠두(*蠶豆: 누에콩)를 까고 있던 유모지가 유민을 흘끔 보며 물었다.

    “왜? 목이 안 좋아?”

    유민이 그의 소매를 붙들며 말했다.

    “그 자리 내가 앉아도 돼?”

    유모지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자리도 많은데 굳이 왜 여기에 앉겠다는 거야?”

    “그렇지만 이 자리가 지온 언니와 가깝단 말이야!”

    유민이 말했다.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면 오라버니가 멀리 떨어져 주는 게 예의지!”

    유모지는 그 말에 휙 고개를 돌려 지온을 보더니 구시렁거렸다.

    “여인들은 뭔 놈의 수다를 그리 떠는지……!”

    “오라버니!”

    유민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쏘아붙였다.

    “말 함부로 한다고 큰 백모님께 이른다? 그래도 돼?”

    “…….”

    침묵하던 유모지는 손을 내저으며 항복했다.

    “알았다, 알았어. 비켜드려야지요, 아무렴!”

    제가 깐 잠두(*蠶豆: 누에콩)를 챙겨 떠나려던 유모지를 유민이 다시 붙잡으며 말했다.

    “치사하게 그걸 또 가져가고 그래. 나 줘!”

    그 말에 반박하며 반항하려던 유모지의 귀로 유민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해야 할 공부는 다 했어, 오라버니? 계속 이렇게 나오면 신지 오라버니가 오라버니의 학업에 관해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유모지는 오늘 해야 할 분량을 끝내지 못한 것을 떠올렸다.

    “……줄게! 줘야지!”

    그렇게 유모지가 정성스레 깐 잠두(*蠶豆: 누에콩)는 유민의 손에 들려 접시 위에 올라갔다. 유민은 냉큼 접시를 지온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살갑게 말했다.

    “언니, 같이 먹자!”

    열심히 깐 잠두를 한방에 입에 털어 넣고 시원하게 씹어 먹으려던 유모지는, 결국 제 입에 넣을 청경채를 따로 하나 주문해야 했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유 대부인과 정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온이를 집으로 데려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자네가 들어왔구먼? 왜 그랬는가? 집에 불편한 것이라도 있는 건가?”

    정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온이가 공주마마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여 이곳에 온 것뿐입니다. 집도 무탈합니다. 어차피 저도 집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으니 겸사겸사 제가 조방궁에 들어온 것입니다. 오고 보니 조방궁이 넓고 조용한 것이 집보다 더 편한 듯합니다.”

    유 대부인이 말했다.

    “자네도 평소 자주 문밖출입을 해두는 게 좋겠네. 벌써 연말이지 않은가? 처리할 일도 많을 게 아니야.”

    유 대부인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깨달은 정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의 양어머니인 대장공주가 있긴 하지만, 계모이긴 해도 집안의 어미인 자신이 지온의 혼사에 나서는 것이 여러모로 남들 보기에 좋을 터였다.

    말을 꺼낸 유 대부인의 시선이 제 큰아들에게 향했다.

    가까운 정원에서 어린 동생들에게 오송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던 유신지는, 제 어미의 시선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유 대부인 옆에 있던 유씨 가문 삼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남쪽 지방으로 시집을 간 제 친정 여동생이 마침 한씨 성을 가진 통판(*通判: 지방직 관직명) 집안과 알게 되었는데 그 댁의 부인 하나가 말하길, 그 집안에 도성으로 시집간 아가씨가 있다고 하더랍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그 처녀와 혼인한 부군이 지씨라더군요. 그 이야길 듣자마자 그분이 혹 지온 소저의 생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정씨가 물었다.

    “통판께서 혹 함자를 현(鉉)으로 쓰시는지요?”

    유씨 가문 삼부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정씨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 집안 어르신이 맞습니다. 작년에 선물도 보내드렸지요.”

    유씨 가문 삼부인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지온의 생모가 세상을 떠난 게 이미 6, 7년 전이였다. 그리고 지온의 생부인 지씨 집안 대노야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나 흘렀다. 그녀는 아직 두 집안에 왕래가 있단 것이 놀라웠다.

    “그럼 한씨 가문이 도성으로 돌아오려 하는 것도 이미 알고 계시겠습니다.”

    정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알지 못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씨 가문 삼부인은 빙긋 웃음을 짓고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 * *

    지온은 제(祭)가 진행되는 동안 부들방석에 앉아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옆에서 사부작사부작, 옷감 스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유민이 있던 자리에 어느새 유신지가 앉아 있었다.

    지온이 고개를 돌린 찰나 유신지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사르르 웃은 지온이 조용히 물었다.

    “제게 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아, 네.”

    할 말이 있다고는 했지만 유신지는 제를 이어가는 능양진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지났다. 그가 말을 하지 않으려나 보다 생각하며 지온이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려던 그때, 그제야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소저에겐 비밀이 참 많습니다.”

    지온이 담담하게 답했다.

    “제게 무슨 비밀이 있다고요? 대공자께서도 전부 보셨잖아요.”

    가만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듭하던 유신지가 말했다.

    “그럼 지온 소저 주변 사람들이 비밀이 넘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유신지는 속으로 잇고 싶은 말을 삼켰다.

    ‘이를테면 대부인 정씨라든가, 루 통정이라든가 말이지요.’

    그러나 지온은 그저 웃으며 되물을 뿐이었다.

    “그게 저와 관련이라도 있는지요?”

    “…….”

    유신지는 말문이 막혔다.

    ‘관련이 없나? 하긴 그도 그렇지…….’

    “제가 물어본다면…… 지온 소저는 제 질문에 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 우선 대공자께서 제게 어떤 것을 물으실지 먼저 알아야겠죠? 다른 이의 비밀까지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저에게도 없어서요.”

    유신지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은 자신의 비밀은 말해 줄 수 있다는 소리인가!’

    “소저의 새어머니에 관한 것은 어떠신지요? 그것도 다른 이의 비밀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지온이 웃었다.

    “그분이 다른 평범한 귀부인과 다르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출신이 특별하시거든요. 하지만 새어머니께서 지씨 가문에 들어오신 이상, 새어머니께서는 그저 저희 지씨 가문의 대부인일 뿐이세요.”

    유신지는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깨달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루 통정에 관한 것은…….”

    지온이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친우이지 않으세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저를 통할 것 없이 직접 물으시면 되지요.”

    이에 유신지가 울상을 지었다.

    “묻는 게 어려우니 이러는 게 아닙니까.”

    “어려울 게 뭐가 있나요?”

    지온의 표정이 은근해졌다.

    “대공자님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지세요. 그가 친우로 받아들인 이가, 조정 신료 다 훑어봐야 몇이나 되나요? 그리고 확실히 물어보지 않으면 대공자가 그의 심중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그 후로 유신지는 말도 없이 능양진인이 읊는 경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다시 조용히 말했다.

    “지온 소저야말로 저기 법단 위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소.”

    지온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끌어 올리자 그가 대답했다.

    “그런 언변을 가지고도 소저께서 강호의 사기꾼이 되는 길로 가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지온이 나지막이 웃었다.

    “칭찬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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