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30)화 (230/385)
  • 230화. 대부인 정씨의 비밀스러운 신분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지온이 손에 든 찻잔을 돌리다 주인장과 정씨 앞으로 밀었다.

    “암중호위에 대해 그리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다니, 어머니와 외삼촌께선 대체 누구신지요?”

    “우린 강호인이다.”

    주인장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일찍이 강호에서 떠돌다 다리를 다친 후에 이 아이와 함께 강호를 떠났어. 그리고 평생을 모은 돈으로 점포를 열고 생활을 이어가다, 네 아버지와 이 아이가 혼인했고 지금, 이리된 것이다.”

    루안이 가볍게 찻잔을 부딪쳤다.

    “어르신, 강호인과 밀탐(*密探: 정탐꾼, 스파이, 밀정 등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수사관을 이름)은 다릅니다.”

    “…….”

    그 말에 나무라듯 제 오라비를 툭 친 정씨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말을 이었다.

    “루 대인, 구체적인 것까지 말씀드리긴 곤란하나, 저희 남매가 밀탐 출신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르신과 혼인을 할 때 과거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씨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대부인께선 왜 지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것입니까?”

    그러자 다소 부끄러운 듯 정씨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제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께서 임무를 수행하다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그때 살길이 막막해진 저희를 어르신께서 구해주셨지요. 그 후로 저희는 어르신을 따라 도성에 들어왔고 지금의 점포를 열고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대부인께서 돌아가셨고 어르신을 보호하기 위해 제가 어르신께 시집을 갔습니다. 하지만 그리했음에도 제 마지막 임무는 끝내 실패했지요.”

    지온이 미간을 좁혔다.

    “보호요? 그렇다면 제 아버지께선 다른 이의 손에 목숨을 잃으셨단 말씀이신지요?”

    “……그렇네.”

    정씨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흉수가 누구입니까?”

    주인장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은인께서는 연회에 다녀오시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나와 네 어미는 누군가가 쓴 독에 쓰러진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고. 수년의 조사 끝에 강왕부가 의심스럽단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선 선제 폐하께 충성하신 것이 맞는지요?”

    주인장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은인께선 충신이셨다.”

    지온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강왕부가 한 짓이라 하면 되지요.”

    정씨와 주인장이 멈칫했다.

    이리 중한 일을 그렇게 치부해도 된단 말인가?

    “자네…….”

    정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의 앞뒤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복수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온이 의기양양 대답했다.

    “복수와 증거가 반드시 관련될 필요가 있겠는지요? 더구나 이미 3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증거는 이미 예전에 사라졌을 텐데, 그런 일에 시간 낭비를 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강왕부를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왕부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뿌리 뽑듯 뽑으면, 저희 일의 진상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정씨 남매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표정이 기이했다.

    ‘이리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해도 된단 말인가? 정녕?’

    ‘잠깐! 막무가내든 아니든, 우리에게 그리 움직일 만큼 믿을 만한 뒷배가 있기나 한가?’

    강왕부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황제 역시 여전히 황위에 앉아있는데 강왕부를 뒤집는다니, 일을 너무 가벼이 생각하는 게 아닌가?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 확신하느냐?”

    외삼촌의 물음에 지온이 웃으며 되물었다.

    “혹, 저희를 만나지 않으셨다면 두 분은 어떻게 복수하려 하셨는지요?”

    그가 대답했다.

    “누가 은인을 죽이라 명령을 내렸는지 정확하게 조사한 후에, 당연히 목숨을 값을 받을 생각이었다! 정 여의치 않으면 그자의 적에게 몸을 던지려 했고 말이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하시려는 일은 너무 복잡합니다. 우선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는 지부터가 문제입니다. 이미 3년이나 조사를 했는데 확실하게 나온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으신지요. 그런 조사를 언제까지 이어가시겠습니까? 

    아버지의 관직으로 보아, 명을 내린 이는 어쩌면 강왕부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더라도 그 사람 역시 강왕부의 심복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데 강왕부가 쓰러지지 않는 한, 저들에게 목숨값을 받는 것이 쉬울 리가 있겠습니까?”

    지온이 말을 이었다.

    “강왕부가 없어져야 그들이 비호 세력을 잃게 됩니다. 제 계획과 두 분의 계획을 비교해보시지요. 두 분의 계획에 단계가 하나 더 있지 않으십니까? 생각해보시지요, 강왕부를 뒤집는 게 더 쉽지 않습니까?”

    “…….”

    확실히 일리 있는 그녀의 말에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

    정씨와 주인장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온을 흘끔 살핀 루안의 눈에 미소가 스쳤다.

    “부인, 어르신. 온이가 농 같은 말을 했지만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강왕부에 숙청자들이 적힌 명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해, 명단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죽었거나 조정에서 물러났습니다. 살아남은 이가 없다시피 하지요. 혹, 그 명단에 돌아가신 지 노야의 이름이 올라있다면, 그해 그리 떠나신 것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다만, 어렵지만 그 명단을 손에 넣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정씨와 주인장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강왕부를 뒤집는 것이지!”

    루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이에게 결국 세뇌당했군.’

    한참을 고민하던 정씨가 끝내 큰 한숨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그럼…….”

    정씨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루 대인. 대인께서는 폐하께서 깊이 신뢰하는 충신, 심복이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어찌 저희와 같은 길을 가려 하시는지요? 온이의 납치 사건으로 대인께서도 피해를 입지 않으셨습니까.”

    “…….”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리되면 그 역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가 옆에서 성가신 일을 만든다고 해서, 제가 부인을 맞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가 이 일을 본질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강왕부를 뒤집는 것.

    그래야만 지온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 당당히 북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루안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던 지온이 말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머니께서 이리 정확하게 알고 계신 것을 제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멀리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제야 떠오른 듯 정씨가 그녀에게 물었다.

    “자넨 이미 강왕부를 원수로 보고 있었던 겐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장공주님으로부터 3년 전, 강왕부가 조정 신료들 중 일부를 숙청했단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그래서 혹시 아버지께서도 그때 함께 숙청된 것이 아닐까, 추측만 했습니다.”

    주인장이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면 네가 강왕부와 여러 번 척을 졌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게로구나.”

    “하늘의 뜻이었지요.”

    자신을, 저와 똑같은 적을 원수로 둔 ‘지온 소저’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저도 모르게 지온의 손을 바싹 쥔 정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늘에 계신 자네 아버지께서 굽어살피신 게 틀림없네. 자네가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아시면 분명 크게 위로를 받을 것이네.”

    그리고 정씨가 말을 돌리듯이 입을 열었다.

    “다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싶네. 이번 일만 봐도 그래. 우연이었지만 우리가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분명 자네가 욕을 봤을 것이야. 후……. 자네의 무공은 심각한 수준이네. 대체 어떻게 배웠기에 이 지경인가?”

    지온이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조방궁은 권법을 수련하는데, 그저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에 머물러 그렇습니다. 제 스승님께서도 고수는 아니셨지요.”

    정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 스승님도 고인(高人)이긴 하셨으나 도법에 정통하여 그리된 것이지, 그분의 무예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긴 했네.”

    기회를 포착한 루안이 끼어들었다.

    “대부인께서 온이를 이리 걱정하시니, 차라리 조방궁에 들어가 며칠 머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부인께서도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셨으니, 가신 김에 정양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이와 더 친해질 수도 있으실 테니 일거양득이 아닙니까?”

    정씨가 그를 흘끔 쳐다보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저를 호위로 쓰려고 꾀어내시는 것 같습니다.”

    슬쩍 고개를 떨군 루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온이를 조방궁에 보낸 것은 안전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아비도 잃었는데, 제가 저 아이를 보호하지 않으면 누굴 보호하겠습니까?”

    “부인…….”

    루안은 다소 부끄러웠다.

    진솔한 그녀의 모습에 도리어 자신이 소인배처럼 느껴진 것이다.

    * * *

    며칠 후, 정씨 부인은 짐을 챙겨 조방궁으로 들어갔다.

    위씨 부인은 여전히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형에게 말했다.

    “형님이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피곤했던 지형은 그에 대해 언급도 하기 싫었다. 그가 대충 얼버무렸다.

    “지온, 그 아이를 보러 가는 게 뭐가 이상해 그러시오? 젊디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데다 아이마저 없으니, 그 아이 말고 앞으로 의지할 곳이 또 어딨겠소?”

    위씨가 지형의 어깨를 꼬집었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다는 겁니까? 또 어떤 요물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형이 억울함에 소리를 꽥 질렀다.

    “요물이 어디 있다고 그러시오?! 매월 들어오는 녹봉도 다 당신 손으로 들어가고 겨우 몇 푼이나 쥔다고?! 동료들과 겨우 식사나 할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되는 돈으로는 음악도 못 듣소!”

    위씨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네들 식사 자리에 여인들을 부르는 걸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까? 어쩌진 못해도 눈으로 훑지도 않을까 봐?!”

    “어휴, 내 속이야!”

    지형이 속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그럼 식사 자리에서 눈이라도 가리고 먹으란 말이오?!”

    위씨가 눈을 한 번 부라리곤 다른 이야길 꺼냈다.

    “생각 좀 해보란 말입니다. 밖에서 고 계집애가 납치를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형님이 그 아이와 함께 돌아왔잖아요.”

    지형이 갸웃했다.

    “그 일이 뭐 어떻다는 거요?”

    “그 일이 이상하단 게 아니라, 형님의 태도가 이상했단 말입니다. 우리 앞에서 형님은 늘 얌전하기 그지없었잖아요. 그런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지형도 그날 본 정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지 않은가?

    “그러게…….”

    그러다 또 이상해 되물었다.

    “그래서 그게 어떻단 말이오? 그리 강하게 나와 봐야 우리와 상관없는 게 아니오! 지온, 그 아이의 지참금이야 이미 우리가 내줬으니, 계산은 끝났소.”

    그때 일을 떠올리자 위씨는 여전히 가슴이 미어져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그 바람에 형님의 비밀을 캐보려던 마음까지 싹 날아가 버렸다.

    ‘됐다, 됐어. 형님이 어떻게 변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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