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29)화 (229/385)
  • 229화. 군(君)과 신(臣)이 유별하니

    황제 역시 높은 가문 사이에 벌어지는 암투를 보아온 이가 아닌가? 그는 루안의 말 한마디에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누구 짓이냐?”

    “소씨 가문이옵니다.”

    “소달?”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황제는 소달이 벌인 일에 어찌 강왕비가 납치된 것이냔 질문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대장공주마마께서 지온 소저를 구하려고 비적의 뒤를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강왕비마마를 구출해 나오셨습니다. 입을 막긴 했을 것이나, 그 전에 이미 일을 크게 벌이신 터라 완전히 숨길 순 없을 것이옵니다.”

    루안이 고개를 떨궜다.

    “대장공주마마를 제때 막지 못한 신의 죄이옵니다.”

    “자네…….”

    “신의 어머니와 대장공주께서 무척 가까우시어, 신 역시 함께 사람을 찾으러 나섰사옵니다.”

    루안의 말이 이어졌다.

    “대장공주께서 악감정이 많이 누그러지셨지 않사옵니까. 최근 몇 년, 공주마마와 폐하께서 많이 가까워졌사온데…… 이번 일로 다시 공주마마께서 폐하에게서 멀어지고 말았사옵니다. 신, 폐하께서 보내주신 신뢰에 부응하지 못하였사옵니다.”

    황제는 입만 벙긋거렸다.

    처음엔 대장공주가 선을 넘었다 생각했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던 탓이었다.

    대장공주는 본래 제 가문을 미워했다. 그녀는 저가 황위에 오른 후, 조방궁으로 떠나버림으로써 제 입장을 확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수양딸을 들인 후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슬슬 황궁에도 오가며 관계를 개선할 불을 지피기 시작한 것이다. 현비의 일이 있었을 땐, 그녀에게 금쪽같은 조언까지 받지 않았던가. 그 이후로 그는 조정에 조금씩 힘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황당무계한 일로 대장공주가 다시금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만 것이다.

    황제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이리 내 발목을 잡는 것이냐?’

    * * *

    강왕세자는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의 언변이 제 입을 틀어쥘 만큼 대단하단 하단 것을 그는 처음으로 느꼈다.

    “폐하…….”

    “형님, 짐을 실망하게 하지 마세요.”

    황제가 말했다.

    “이 일은 이대로 넘어가세요. 체면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고모님께 복수할 때가 아닙니다. 시기가 좋지 않아요.”

    “어찌하여 시기가 좋지 않은 것입니까?”

    강왕세자의 물음에 황제가 대답했다.

    “짐의 만수절이 곧 입니다. 서영왕과 북양왕이 보낸 축하 서신에 따르면 두사람 모두 도성에 올라와 하수(*賀壽: 새해나 경사스러운 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던 축하하는 글)를 올린다고 했어요. 이런 때 고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 되겠습니까? 불필요하게 귀찮은 일을 만들 게 될 것입니다.”

    강왕세자는 배알이 뒤틀렸다.

    인제 보니 황제는 정녕 3년 전의 그 황제가 아니지 않은가?

    조금 전에도 근거를 딱딱 들어가며 논리를 펼쳤고, 사고(思考)도 다각도로 부족함이 없었다.

    ‘부왕(父王)께서 계셨어도 부족함을 찾지 못하셨겠지.’

    결국 강왕세자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신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세요, 형님.”

    * * *

    궁을 나선 강왕세자는 침묵 속에 강왕부로 돌아왔다.

    세자비가 돌아온 강왕세자를 맞았다.

    “어머니께서 깨어나셨어요. 누군가 실수로 어머니를 때리는 바람에 혼절했다고 하시는데,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감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당신은 어찌 생각하세요?”

    한차례 마음을 다스린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세자비가 또 물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다시 장원으로 모실까요, 어쩔까요? 어머님은 이곳에 오셔서 좋으신 것 같던데, 다시 장원으로 모신다고 하면…….”

    “그럼 이대로 계시라 하시오.”

    강왕세자가 대답했다.

    “당신이 잘 살피시오. 종종 가문 어르신들을 불러 말동무라도 해드리면 좋겠군. 간밤에 있었던 일은 꺼내지 마시오. 그저 도적을 만난 것이겠거니 생각하게 해드리는 게 좋겠소.”

    “네.”

    강왕세자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세자비가 따뜻하게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궁에 갔던 일이 잘 안 풀린 거예요?”

    강왕세자는 제 정실부인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신의 혼사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강왕세자, 자신의 혼사에 부왕께선 유독 마음을 많이 쓰셨다.

    세자비는 용모가 단정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웠다. 안팎으로 자신을 부족함 없이 도울 줄 알았고, 눈치도 빨랐던 것이다.

    그래서 강왕세자는 마음이 복잡하고 심사가 좋지 않을 때, 그녀와의 대화를 즐겼다.

    시비들에게 눈짓을 하여 모두 내보낸 후에야 그는 제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여섯째가 전 같지 않소!”

    세자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폐하 말씀이세요?”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의 적장자로서 나는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소. 그리고 그 아이는 선대 태자와 나이가 같다며 자연스레 입궁하게 됐고. 전에는 나도 별생각 없이 부왕을 도왔는데, 요즘은…….”

    세자비는 깨달았다. 부부로 산 지 벌써 10년이나 되지 않았는가? 그녀는 강왕세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성정이 강한 부군은 시아버지인 강왕의 뜻을 따랐다. 오직 황위를 빼앗아야겠단 생각뿐이었던 당시, 그는 의안왕이 황위에 오르는 것이 곧 강왕부가 득세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가 점점 군주의 모습을 보이는 지금, 그는 이제야 서로의 생각에 격차가 있단 것을 깨달았다.

    강왕부의 득세가 꼭 황제의 득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황제는 단 한 사람이 오르는 자리다. 그 손에 쥔 권력을 기꺼이 다른 이와 공유하려는 황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강왕세자가 놀라 멈칫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미소를 머금은 세자비가 말했다.

    “설사 당신이 그분을 황위에 올리셨어도 같습니다. 군(君)과 신(臣)이 유별하니, 그 사이엔 거대한 격차가 있는 법이지요.”

    강왕세자의 신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폐하께선 유약한 성정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니 군주로서의 위엄만큼은 다른 이가 침범하게 둘 수 없으셨던 것이지요. 지난번 첩여에 봉해진 류 낭자를 두고 폐하와 다툼이 있으셨던 것 역시, 여인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속의 분노 때문이지요.”

    류명주 이야기가 나오자 강왕세자가 다소 불편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난 그 여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소.”

    세자비가 웃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에게 그런 여인들은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지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편해진 얼굴로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왕세자는 세자비의 이런 면을 좋아했다. 그녀는 질투 한 번 하는 일 없이 사안의 경중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분의 그런 성정을 떠올리면 대응하기 어렵지도 않습니다. 지금 그분께서 군(君)이시고 당신은 신(臣)이니, 당신이 신하 된 도리를 다하면 폐하께서도 당신에게 더욱 큰 황은을 베푸실 것이에요.”

    강왕세자의 눈이 반짝였다.

    ‘신하된 도리라…….’

    짧은 정적이 지나가고, 강왕세자가 물었다.

    “만약…… 내가 그리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신은 그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분이 이미 확실하니까요. 조정 신료는 물론이거니와 백성도 황제를 능가하는 이가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바로 이게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벽에 부딪히는 이유입니다.”

    대답하던 세자비가 작은 한숨을 내쉬곤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부왕(父王)께서 왜 도성을 떠나셨는지 잊지 마세요.”

    강왕세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앉은 의자 손잡이를 붙든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잘못한 게 확실했다.

    부왕마저 쫓기듯 도성을 떠나셨는데, 자신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단 말인가?

    * * *

    비적 소동은, 굳이 따로 언급할 것도 없이 다들 사건의 엄중함을 알고 있었기에 입들을 다물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갖가지 좋은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들었다. 대순(大舜) 주변의 약소국들이 보낸 공물 또한 속속 도성에 도착함에 따라 황당한 비적 소동은 끝내 모두의 머리 뒤편으로 잊힌 것이다.

    지온은 다시금 화정교로 향했다.

    종이를 재단하고 있던 주인장은 누군가 작게 헛기침하는 소릴 듣고 곧장 영업용 미소를 띠고 고개를 들었다.

    “손님, 무엇을…….”

    말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온 소저! 이리 귀한 손님께서 찾아오시다니!”

    지온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말씀 편히 해주시지요, 외삼촌. 온이라 불러주세요.”

    주인장은 마다하지 않고 냉큼 말투를 고쳤다.

    “또 혼자 나온 것이냐, 온아? 지난번에 그런 일을 겪고도 겁도 나지 않는 게야?”

    지온이 대답하기도 전에 루안의 길쭉한 신형이 점포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장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 널 지켜주는 이가 있었던 게로구나.”

    지온이 물었다.

    “어머니께선 오셨는지요?”

    고개를 끄덕인 주인장이 일꾼에게 점포를 보라 일러두곤 제 지팡이를 들고 일어섰다. 두 사람을 이끌고 그는 후원으로 향했다.

    지씨 가문의 대부인 정씨는 마침 집에 설치해둔 기관(*機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부비트랩 같은 함정 기계장치)을 검사하고 있었다.

    지온은 그녀가 날카롭기 그지없는 대나무 화살을 하나하나 담장 구석에 꽂아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 꽂아 넣은 그녀는 잡초로 그 위를 덮었다. 지켜보던 지온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실수로라도 기관을 작동시켰다간 벌집 신세가 되겠어.’

    “얘, 온이가 왔다!”

    주인장이 소리치자 정씨가 그들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닦고 다가왔다.

    “루 대인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루안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휴무라서 말입니다.”

    정씨가 원하는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휴무라 해도 루 대인께서 하실 일이 많은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계속 이리 번거롭게 해드릴 순 없는 노릇이지요.”

    루안이 그녀를 흘끔 보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 일보다 더 중한 일은 없습니다.”

    알만하단 얼굴로 정씨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온이가 평소 조방궁에서 지내는 터라 제가 잘 살피질 못합니다. 앞으로 루 대인께서 잘 살펴 주시지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주인장이 히죽 웃으며 차를 건넸다.

    “루 대인, 그날 온이를 구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쓰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론 저희를, 내 사람이라고 여기고 편히 대해주십시오.”

    드디어 나누려던 주제가 나오자 지온이 말을 받았다.

    “어머니와 외삼촌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분께서 일찍 발견하지 못하셨으면, 저도 그리 쉽게 몸을 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인장이 손을 저었다.

    “운이 좋았다. 대장공주마마의 암중호위가 집 후원에 쓰러져 있어 그리 빨리 눈치챌 수 있었던 게야.”

    지온이 방긋 웃었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은 그들이 대장공주님의 암중호위인 줄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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