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28)화 (228/385)
  • 228화. 원수와 가족

    강왕부를 나온 대장공주가 제 마차에 올랐다. 그제야 그녀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리 통쾌할 수가! 매, 3년이야! 내 지난 3년간 이리 통쾌했던 적이 없었단 말이네!”

    매고고도 함께 웃음을 지었다.

    “마마, 돌아가신 후에 이 기쁨을 즐기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아가씨께서 벌써 도착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온이가 돌아왔단 말이냐? 요 녀석, 오늘 본궁을 얼마나 걱정시켰는지, 내 돌아가면 꼭 혼쭐을 낼 것이야!”

    말로는 혼쭐을 낸다지만, 그녀의 얼굴엔 웃음이 함박꽃처럼 피어있었다.

    * * *

    강왕부.

    강왕세자는 한참이나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간 심복이 그를 불렀다.

    “세자 전하…….”

    그가 목소리를 냈을 때 강왕세자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강왕세자의 고함이 강왕부를 뒤흔들었다.

    “꺼져라! 제대로 하는 것 없는 폐물들 같으니라고……! 다 눈앞에서 사라져!”

    * * *

    이른 아침 동이 트자 아침 식사를 파는 노점들이 하나둘 문을 열었다.

    “황씨, 여기 콩물 한 사발 주쇼!”

    “네네, 나갑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저잣거리 백성이 삼삼오오 모였다. 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모인 틈을 이용해 그들은 수다를 떨었다.

    오늘의 수다 주제는, 당연히 간밤을 떠들썩하게 달군 바로 그 사건이었다.

    “어이, 대장공주마마의 수양따님은 구했다는가?”

    누군가 만두를 베어 물며 묻자 사정을 아는 이가 옆에서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마씨, 일을 반절만 알고 있구먼? 공주마마의 수양따님은 이미 예전에 집에 돌아왔지!”

    마씨라 불린 사내가 의아해 물었다.

    “간밤 일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돌아왔단 말이야?”

    “만두 두 알 주쇼!”

    다른 사내 하나가 그들의 상에 앉으며 끼어들었다.

    “대장공주마마의 수양딸이 납치됐던 것이 아닐세. 제 새어머니와 향을 올리러 다녀왔다 하더군! 그러니까 처음부터 실종된 적도 없었단 말이네. 공주마마 지레짐작에 일이 커졌던 거야! 겨우 그 정도로 실종은 무슨……!”

    “그런 것이었나?”

    결론이 미적지근하자 마씨는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별일 아니로구먼, 겨우 그런 일로 그 난리를 친 게야? 무슨 수선을 그리 떨어?”

    “누가 별일 아니라던가?”

    먼젓번의 그 사내가 말을 받았다.

    “공주마마의 따님은 무사했지만, 다른 사람이 비적에게 납치를 당했네!”

    “오? 누가?”

    호기심이 동한 마씨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자네 표정을 보니, 어디 다른 관가 규수라도 되는 가보구먼?!”

    상대방이 쉬쉬하며 입을 열었다.

    “관가 규수가 아니네! 누구냐면…… 강왕비일세!”

    마씨는 넋을 잃고 말았다.

    “강, 강왕비?! 강왕비라면…….”

    강왕비라 말을 전해준 이가 막 설명을 해주려 할 때였다. 그의 지인이 사내의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

    “입조심하게. 괜히 횡액 맞지 말고.”

    그제야 관졸의 경고가 떠오른 사내가 기민하게 대꾸했다.

    “안 해야지, 안 해야지!”

    그러나 하던 이야기가 중간에 끊긴 마씨는 뒷간에서 뒤처리 못 한 사람처럼 찝찝했다.

    “아니, 제대로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게 아닌가! 어쩌다 강왕비가 납치를 당하게 된 것인가? 왕비마마면 모시는 이들만 주변에 겹겹이 쌓였을 터인데, 어떻게 납치를 당한단 말이야?”

    그러자 말을 하다 말았던 사내가 휙휙, 주변을 둘러보더니 눈치껏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왕비마마께서 병으로 요양차 다른 장원으로 나가셨던 모양이네. 그게 놈들에게 틈이 된 것이지. 비적 놈들, 평범한 귀부인이라 생각하고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하려 했던 모양인데, 그게 왕비마마일 줄 누가 알았겠나? 그래서 놈들 본거지가 두 쪽 났네.”

    “그런 게로구먼.”

    마씨는 또다시 실망했다. 하지만 그래도 일의 전후 사정을 듣고 나니 호기심은 채워졌다. 마씨가 소감을 전했다.

    “도성에서 비적이 출몰하다니, 거 참 무섭구먼! 부아(府衙)에선 뭐라던가?”

    “그냥 비적 나부랭이라더구먼. 외지에서 온 놈들이라는데, 이번이 첫 번째 범죄였다나 봐. 벌써 싸늘한 시체가 됐지, 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지. 왕비를 다 납치하다니 말이네.”

    “내 말이 그 말이네.”

    강왕비가 납치되었다는 소문은 부아가 나서서 진압한 끝에 간신히 잠재울 수 있었다.

    나이가 있는 왕비인 탓에 그리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 귀부인 중에서도 더욱 특별한 신분이었기에 입방아를 찧던 백성들도 어느 순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작은 소문마저도 강왕세자에게는 여전히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왕비가 대장공주의 손에 들려 돌아온 후, 그는 강왕세자비에게 그녀를 보살피라 명하곤 자신은 강왕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분노에 치를 떨며 밤을 보낸 그는 날이 밝자마자 입궁했다.

    조회(朝會)가 없는 날이라 황제는 화원에서 그를 맞았다.

    “형님, 참으로 이른 시간에 오셨습니다.”

    담담한 얼굴의 황제는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밤을 지새운 강왕세자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당한 것이 있는지라 몸을 낮추는 법을 배운 그는 유달리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이 잘못했사옵니다.”

    의외란 듯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왜 죄를 빌고 그러십니까?”

    강왕세자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신이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탓에 폐하까지 소문에 휘말리셨습니다.”

    “오?”

    그런데 황제의 반응은 그의 생각보다 덤덤했다.

    황제가 사태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한 강왕세자는 말을 이었다.

    “간밤에 외지에서 온 비적이 도성까지 들어와 관가 소저 하나를 납치했습니다. 소저를 구하기 위해 금군과 부아에서 급히 성문을 나섰는데, 천만뜻밖에…….”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그에게서 말할 수 없는 치욕스러움이 느껴졌다.

    “비적의 손에서 구출된 이가 바로…… 어머니셨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강왕세자는 드디어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큰일에도 화를 안 낸다고?’

    익숙한 감각이 몰려왔다. 일이 제 손을 벗어난 듯한 느낌에 그의 경계심이 쑥 올라왔다.

    강왕세자가 황제의 표정을 살피고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페하…….”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황제는 어디서 나온 여유인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다른 일 처리가 대충 끝나면, 짐이 숙모님을 뵈러 왕부에 들리겠습니다.”

    “폐하.”

    강왕세자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저 얼굴만 뵈러 오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아니면요?”

    황제가 여상히 말했다.

    “그저 금전을 노린 비적이 숙모님을 지체 높은 가문의 소저로 착각해 납치한 일입니다. 그마저도 실패했지요. 겨우 그런 일에, 형님께선 굳이 짐이 나서서 무게를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숙모께서 치욕을 당한 것을 모두에게 알리라고요?”

    너무도 타당한 황제의 대답에 강왕세자의 말문이 틀어 막혔다.

    그동안의 경험상, 일이 뭔가 틀어졌다. 자신은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황제가 이미 사정을 꿰뚫은 듯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로부터 이미 보고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대응 방법을 바꾼 강왕세자가 낮게 속삭였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단순한 사건으로 취급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다만, 아들 된 저희는 이대로 배후를 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옳지요. 그럼 형님은 어찌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숨을 내쉰 강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일이 벌어지고 신이 어머니께서 계시던 장원에 들러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방비가 잘 되고 있는 와중에 어머니께서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폐하, 그 장원을 지키는 수위들의 실력이 비록 내성의 왕부만 못하긴 해도, 장원의 방비가 아무나 쉽게 납치할 만큼 허술한 것은 아닙니다. 성인 한 사람을 몰래 납치할 수 있었을 정도라면, 분명 오랫동안 계획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게 다 누굴 겨냥하고 벌인 일이겠습니까? 바로…….”

    “형님이 아니겠습니까?”

    별안간 치고 들어온 황제의 한 마디에 강왕세자는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황제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형님, 여러 말 많이 하셨는데, 그 계획을 세운 이가 형님인 것은 왜 말하지 않으십니까? 짐을 이해가 안 됩니다. 지온, 그 아이가 형님께 무슨 죄를 지었다고 무고한 소녀를 해치려고 하셨습니까?”

    잠시 말을 멈췄던 황제가 다시 이었다.

    “숙모님을 위해 복수해야 한단 말은 하지 마세요. 칠월칠석, 황궁 연회에 있었던 그 일은 본래 숙모님께서 먼저 한 오해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숙모님은 여덟째의 사고로 마음에 맺힌 한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도 형님은 숙모님의 마음을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왕부에 가뒀지요. 

    그러니 숙모님이 옆에서 속살거리는 요사한 자들의 꾀에 넘어가 지온, 그 아이가 여덟째의 일에 관련됐단 오해를 하게 된 게 아닙니까.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형님은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칠월칠석 연회에서 일이 벌어지자 숙모님을 버리듯이 먼 장원으로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신경을 꺼버렸어요. 형님이 숙모님께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비적이 숙모님을 납치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황제의 말을 듣고 난 강왕세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가 황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오나 다른 이들이 어머니를 그리 대했는데, 폐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제때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으면, 지금 무슨 소리가 나돌지 알 수 없단 말입니다!”

    “짐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요. 고모님께서 벌인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형님. 형님도 고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고모님이 강왕부를 좋게 보지 않은 게 하루 이틀입니까? 고모님이 숙모님을 싫어한 게 하루 이틀 일이냔 말입니다. 

    고모님께 우리 강왕부는, 제 오라비의 황위를 빼앗고, 가족 모두를 앗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런 고모님께서 이제야 간신히 수양딸 하나를 제 슬하에 들였는데, 형님이 그 아이를 해치려고 한 겁니다. 고모님께서 반격한 게 이상한 일입니까? 고모님은 처음부터 강왕부의 원수였습니다!”

    정신이 나간 듯 벙벙한 얼굴을 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강왕세자에게 황제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원수가 벌인 일은, 짐은 기억할 뿐 화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짐의 가족이 그리한다면…… 짐도 크게 실망하겠지요.”

    * * *

    황제는 지난밤을 떠올렸다.

    술시(*戌時: 오후 7-9시)가 되었는데 루안이 알현을 청해왔다.

    규율을 어기는 법이 없던 그는, 황궁의 문이 닫힌 후에 저를 번거롭게 했던 적이 없었다.

    ‘필시 중한 일이 틀림없겠군.’

    역시나, 루안은 저를 보자마자 죄부터 청했다.

    “왜 이러는 것인가?”

    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짐에게 미안한 일이라도 한 것이냐?”

    루안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신, 정녕 폐하께 황공할 일을 저질렀습니다.”

    사뭇 진지한 루안의 대답에 황제가 미소를 거뒀다.

    “무슨 일인가?”

    “강왕비께서 비적에게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뭐라?!”

    황제가 믿기 어려운 듯 소리쳤다.

    “도성에서 비적이라니?! 숙모님은 어쩌다 납치를 당하신 것이냐? 강왕부의 시위는 다 죽었단 말이냐? 지금 숙모께선 어디 계시냐? 구하긴 한 것이냐?”

    “이미 구하였사옵니다. 다만 조금 놀라셨을 따름이옵니다.”

    루안이 잠시 머뭇거렸다.

    “폐하께서 물으신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옵니다. 도성에 비적은 없습니다. 강왕비마마 역시 진짜 납치가 아닌, 누군가 빼돌린 것이옵니다.”

    황제는 루안의 말에 저의가 있단 것을 깨달았다.

    “무슨 뜻이지?”

    루안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

    “비적이 가장 처음 납치하려 했던 이는 강왕비마마가 아니라…… 대장공주마마의 수양딸인 지온 소저였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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