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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27)화 (227/385)
  • 227화. 자승자박

    “어머니, 앞으로 저희가 외출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어요?”

    “그것까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못 들은 척하거라. 어차피 너와 별 상관없는 일 아니냐?”

    “그럼 걔는 앞으로 어떡해요? 대장공주님이 도로 집으로 돌려보내겠죠?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제대로 된 집안에서 어디 데려가려고 하겠어요? 설마, 우리 집안에서 평생 지내는 거 아니에요? 오라버니가 먹여 살리고?”

    위씨는 그게 문제가 되냐는 듯 여상히 대꾸했다.

    “조방궁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다른 궁관을 찾으면 되는 게지. 아니면 가묘(*家廟: 집안 사당)를 지어도 무방하고. 그래봤자 몇 푼 든다고…….”

    한담이 오가는 던 중, 밖에서 우당탕 발소리가 울리더니 곧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꿈이 참 크구먼. 어미인 나도 아무 말 않고 있는데, 자네는 벌써 내 딸을 가묘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구먼?”

    ‘이 목소리는……!’

    지형과 위씨가 흠칫 몸을 굳혔다. 곧이어 대부인과 그 뒤를 따라 어린 소저가 타박타박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올 ‘소저’가 지온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지서가 혼비백산하며 지온을 가리켰다.

    “너, 너, 넌 비적에게 잡혀갔잖아?”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지온이 눈썹을 찡긋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비적이라니? 뜬금없이 웬 비적?”

    기분이 상하여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정씨가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서방님과 동서는 지서를 어찌 가르친 겝니까? 멀쩡히 저와 같이 있던 온이를 두고 비적이라니요? 지금 저주라도 하는 겝니까?”

    지씨 가문에 들어와 나이 어린 새댁처럼 지내던 정씨는, 대노야인 지원이 세상을 떠난 후론 목소리 한 번 내는 법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강하게 나오자 차남가 부부는 적응이 안 돼, 바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소식을 들은 지온의 셋째 숙모인 장씨가 쫓아 들어왔다. 무탈한 지온을 본 장씨가 크게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온아! 괜찮은 것이냐?!”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춘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셋째 숙모님,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들 제게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조금 전에 둘째 아주버님이 헐레벌떡 돌아오셔서는 네가 제때 귀가를 하지 않았다더구나. 밖에, 비적이 널 납치해 대장공주님이 구하러 갔단 소문이 돈다고 말이다.”

    지온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난 건가요? 저는 비적을 만난 적이 없어요! 도성에 어떻게 비적이 있겠어요?”

    “지금까지 어딜 갔던 것이야? 다들 도성을 싹 다 뒤져 널 찾았는데, 찾질 못했어.”

    정씨가 대신 대답했다.

    “다 내 탓이네. 오늘 친정에 갔다가 우연히 온이를 만났어. 하여 같이 광명사에 다녀왔는데, 한 시진이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따로 말을 남기질 않았네. 그 때문에 공주마마께서 오해하신 모양이구먼, 다 내 탓이야.”

    “두 분 모두 무사하니 되었습니다. 무탈하면 된 것이지요. 저희 노야와 지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찾으러 나갔습니다.”

    정씨가 잔뜩 미안한 얼굴을 했다.

    “내가 쓸데없이 고생만 시켰구먼. 어서 사람을 보내 그만 돌아오라 하시게.”

    정씨의 말에 장씨가 밝게 웃으며 지시했다.

    “여봐라! 어서 성문에 가서 셋째 노야와 둘째 공자께 온이 아가씨는 무탈하시다 전하거라! 대부인과 광명사에 다녀오신 것뿐이다! 그리고 꼭 가장 큰 목소리로 전해야 한다. 모두가 들어야 하니!”

    그래야 쓸데없이 지온의 평판에 흠이 될 만한 입방아들을 찧지 않을 게 아닌가?

    ‘얼마나 점잖아! 제 어머니를 따라 향을 올리러 다녀온 것뿐인데 이 사달이 났던 게로군.’

    장씨의 지시에 지온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대장공주마마께도 내 곧 조방궁으로 돌아갈 것이라 함께 전하게.”

    “들었느냐?”

    장씨의 확인에 종 하나가 연신 대답을 하곤 금방 밖으로 사라졌다.

    소식을 전해 일 하나를 마무리한 지온이 차남가 가족들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었다.

    “조금 전에 들어올 때 듣자니, 둘째 숙모께서는 저를 사당으로 보내신다고요?”

    지온과 눈을 마주친 위씨가 컥, 밭은기침을 뱉고는 변명했다.

    “온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린 일반적으로 행하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게야. 내가 말 한 그런 일을 우리가 할 리가 없지!”

    “그러세요?”

    지온의 얼굴에 뜬 미소에 어쩐지 소름이 돋는 위씨였다.

    “그, 그럼, 당연하지. 양심이 없는 것들이나 제 집안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는 게야. 네가 무슨 죄를 진 것도 아닌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 지켜줘야지.”

    “하하, 둘째 숙모님. 그 말 꼭 지키셔야 할 것입니다. 혹, 만에 하나 제가 아니라 지서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아주 불쌍할 테니 말입니다.”

    지온의 말에 차남가 부부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우릴 협박하는 건가?’

    * * *

    강왕세자는 연회를 여는 중이었다.

    요즘 그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깨끗하게 정리를 한 덕에 이제 가문에서는 자신의 발목을 붙드는 이가 없었고, 조정에도 하찮은 놈들 몇이 날뛰고 있긴 했지만, 딱히 제 심기를 긁는 일은 없었다.

    ‘이 일만 제대로 풀리면, 그야말로 좋겠군.’

    “세자 전하, 미천한 계집이 술 한 잔 올리겠사옵니다.”

    아름다운 무희가 요요히 걸어 그에게 다가왔다. 무희는 애교 넘치는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어 강왕세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속없는 미소를 지으며 강왕세자가 술을 받아 마셨다. 절로 품을 파고드는 미인이라니, 술맛이 더없이 좋았다.

    ‘지금쯤이면 거의 끝났겠군.’

    밖으로 돌린 시선에 완연히 내려앉은 어둠이 들어왔다. 시간은 술시(*戌時: 오후 7시-9시)의 끝을 지나고 있었다.

    대장공주와 북양태비를 떠올리자 그는 머리가 아팠다.

    ‘다른 집안 어른들은 하나같이 저리도 대단한데, 대체 우리 집안은…….’

    잘 될 일도 못하고, 그저 사고만 쳐대는 모친은 그나마 다행히 이미 멀리 떨어진 장원으로 모셨다.

    ‘그것 하난 대장공주와 그 지온이란 아이에게 고맙군.’

    오늘 밤, 이 일만 잘 처리하면 대장공주와 북양태비는 분명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붙어 있으면 자신은 절대 마음 편히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 터였다.

    술잔을 든 강왕세자가 막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을 때였다. 밖에서 그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자 전하! 세자 전하!”

    강왕세자가 고개를 들었다. 흥겨움이 단숨에 사라졌다.

    우당탕 안으로 들어온 심복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실패한 것이냐?”

    강왕세자는 순간 역정이 솟았다. 실패면 실패지, 저리 울상을 할 게 뭐란 말인가?

    심복이 말했다.

    “세자, 큰일입니다! 대장공주께서 직접 찾아왔사옵니다!”

    “따지기라도 하려는 겐가? 막으면 된다. 지금은 3년 전이 아니야. 대장공주가 제멋대로 할 수 있던 그때가 아니다.”

    강왕세자의 음성은 미동도 없었으나 심복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대장공주께선 따지러 찾아온 게 아니옵니다.”

    “그럼 왜 온 것이냐? 마실 온 건 아닐 게 아니냐?”

    강왕세자는 제가 한 말에 제가 웃고 말았다. 재미있지 않은가? 제 집안과 대장공주가 정상적인 친인척간도 아닌데, 마실이라니.

    “아닙니다. 대장공주께서 왕비마마를 모시고 찾아왔습니다…….”

    멈칫한 강왕세자의 마음 한구석에서 좋지 않은 예감이 피어올랐다.

    “왕비마마라니? 어머니께서는 장원에 계시지 않느냐? 왜 여길 모셔와?”

    마음을 굳게 먹은 심복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일을 당한 분이 왕비마마이시옵니다! 소씨 가문이 비적의 수중에서 구출한 분이 마마셨사옵니다!”

    쨍강!

    강왕세자가 손에 든 술잔을 깨트렸다. 그는 심복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 한 것이냐? 멀쩡히 장원에 계신 어머니가 어떻게…….”

    “아직, 아직 정확한 상황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이들이 전부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옵니다. 비적들의 손아귀에서 구출된 이는 분명 왕비마마이시옵니다.”

    강왕세자의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의 머리가 웅웅 울렸다.

    비적이 납치하고 소씨 가문의 멍청이가 구한 사람이 강왕비라니!

    ‘내 어머니는 이 나라 황제의 모친이 아닌가!’

    강왕세자의 두 손이 하릴없이 떨렸다. 저를 부축하는 손에 간신히 의지하고서야 그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대체, 대관절 어찌 이런 일이……!”

    강왕세자가 돌연 심복의 멱살을 붙잡았다.

    “지온, 그 계집은……?!”

    심복의 표정이 울상이었다.

    “이미 귀가하였사옵니다. 떠도는 말로는 돌아가는 길에 제 새어머니를 만나 광명사에 함께 다녀왔다고…….”

    “네놈들, 사람을 착각한 것이냐?”

    심복이 고개를 저으며 확신했다.

    “아니옵니다, 절대 착각하지 않았사옵니다. 털보, 풍호자가 직접 잡아왔습니다.”

    그럼 어쩌다 인질이 어머니로 바뀌었단 말인가!

    강왕세자는 분노가 치솟아 누구 하나는 죽여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다들 뭐라 뒷말을 하고 있을지, 직접 귀로 들을 것도 없이 알 것 같았다. 지온, 그 계집이 비적에게 납치당한 일이 도성 전체에 퍼지게끔 더욱 소문을 내라 제가 손수 지시까지 내리지 않았던가!

    모두가 이 사건을 알게 된 것도, 자신이 뒤에서 밀어주고 끌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내 체면? 앞으로 강왕부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이러다간 폐하마저 입에 오르내릴 게 아니야!’

    평생 벗어날 수도 없는 제 생모에게 벌어진 일이다. ‘효’라는 글자가 앞에 붙은 이상, 자신은 반드시 어머니를 공(恭)과 경(敬)으로 받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욕 중에서도 상욕인, 늙은 어미를 제 손으로 때린 불효자란 명패를 머리에 이고서도, 화 한 번 내거나 표할 수 없다니!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직 봉지에 계신 아버지를 떠올린 강왕세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께서 알게 되시면……!’

    그때, 밖이 소란스레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공주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위의 호위 아래,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강왕비를 대동한 대장공주가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요담, 이 불효막심한 자야……! 네 어미에게 변고가 생겼는데 아직 예서 술이나 마시고 있단 말이냐!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대장공주 손에 안긴 강왕비를 본 강왕세자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의 음성이 잇새로 샜다.

    “고모님. 제가 막 소식을 접하여…….”

    “아직도 변명할 여유가 있는 게야?”

    그의 말을 끊은 대장공주가 질책을 이었다.

    “넌 네 어미를 먼 장원에 보내놓고 제대로 호위할 사람도 붙여 놓지 않은 게야? 친왕의 비가 비적에게 납치를 당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네 아버지가 오면 뭐라 말씀을 올리려고!”

    강왕세자는 욱하고 치미는 화를 간신히 눌러 담았다. 그는 마른 오징어 물 짜듯이 후회막심한 표정을 얼굴에 쥐어 짜냈다.

    “모두 제가 못난 탓입니다. 제대로 준비해놓았어야 했는데, 그리하질 못해 어머니께서 이런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구했어야 하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님.”

    그리고 강왕세자는 시비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다들 멍하니 뭘 하는 것이냐! 공주마마께서 어머니를 계속 붙들고 계셔야겠느냐? 어서 어머니를 모시거라!”

    시비들은 당황했지만, 얼른 대답하고는 강왕비를 부축하려고 대장공주에게 다가갔다.

    강왕비를 대동한 채 한동안 행진하듯 움직였기에, 대장공주는 이미 상당히 만족스러워진 상태였다. 그녀는 깔끔하게 강왕비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어 시비들에게 모시라 넘겼다. 그러면서도 입으로 잔소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네 어미가 상심이 클 것이다. 깨어나거들랑 제대로 위로해드리거라. 이게 다 구경꾼들 탓이다. 아무도 모르게 구해올 수 있었던 일을, 그리 입방아들을 찧어대는 바람에 도성 사람들이 전부 알게 돼버렸으니……. 요담아, 조만간 온갖 구설이 올라올 테니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거라.”

    고개를 떨군 강왕세자가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네, 고모님. 제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 앞으론 제대로 반성하여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대장공주가 게슴츠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 생각하면 됐다. 기실 네 어미에게 진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저 좀 놀랐을 뿐인 게야. 이 일도 딱히 네 어미를 탓할 일은 아니다. 힘없는 여인네가 비적을 어찌하겠느냐? 아니 그러냐?”

    “네, 고모님.”

    “너도 당장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닐 테니, 곤란하게 하지 않으마. 내, 먼저 일어나마.”

    화를 꾹 참으며 강왕세자가 대답했다.

    “고모님, 조심해서 돌아가시지요.”

    대장공주는 마지막으로 감상하듯 그의 표정을 훑고는 몸을 돌렸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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