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아니 이게 누구야?
지온이 쪼르르 가버리고, 루안이 정신을 차렸을 땐 두 사람은 이미 구릉 뒤에 몸을 숨긴 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 술이 있는데,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전 추위를 안 타요.”
“그럼 물을 드시죠.”
유신지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누가 물을 챙겼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루안이 물을 대령해 건넸다.
물을 몇 모금 마신 그녀가 수통을 도로 루안에게 돌려주자, 루안은 그녀의 입술이 닿은 곳을 굳이 찾아 입을 대고 목을 축였다.
“…….”
‘도움도 안 되는데, 난 여길 왜 온거지…….’
유신지는 말을 잃었다.
“어머니의 경공이 대단하십니다.”
지온이 감탄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다들 알지도 못하다니.”
정씨가 겸양하며 손을 내저었다.
“루 대인 수하들의 능력이 좋았던 것이네. 수위들의 시선을 돌려주어 나도 이리 쉽게 포위를 뚫을 수 있었던 것이네.”
정씨가 이어서 물었다.
“루 대인, 혹시 저들이 구원병이 당도하기 전에 먼저 발견해 숨기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루안이 미소를 지었다.
“대장공주께서 제때 당도하실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그때 밖에서 망을 보던 시위가 인기척을 느끼고 말했다.
“공자! 왔습니다!”
구릉 뒤에서 나온 그들의 시선 끝에 적잖은 숫자의 구원병이 와아, 소리치며 장원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들어왔다.
* * *
풀어헤친 옷가지에 노출된 가슴가리개를 발견한 대장공주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쓰러지려는 듯 휘청거리자 북양태비가 기민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여양, 진정하거라! 온이가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니냐?”
눈을 뜬 대장공주가 반쯤 얼굴을 감싼 채 물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위로할 것 없다. 내 명(命)이 박한 게지……. 어렵게 슬하에 수양딸을 들여 내 심장처럼 아꼈거늘, 어찌 또 이런 일이…….”
“납치를 당한 소저라 했지, 온이라 하지는 않았잖느냐? 우선 가서 확인부터 하자, 내 같이 가주마. 어떻냐?”
소씨 집안 호위는 내심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 직접 눈앞에 들이밀어 주지!’
횃불을 챙겨 든 그는 여인의 얼굴을 덮고 있던 모포를 치우며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맞습니다, 마마! 어쩌면 아닐 수도…….”
뒷말이 소리 없이 흩어졌다.
횃불 빛이 아른거리는 아래, 불빛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소씨 가문 호위의 시선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관리를 무척 잘한 얼굴이긴 했다. 외모도 그렇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눈이 먼 것도 아니고, 이 얼굴을 지온 소저라 누가 착각해!’
누가 봐도 나이가 있는 여인의 얼굴이 아닌가! 마흔은 훌쩍 넘었을 얼굴이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온 소저는 어디 가고? 이 나이든 여자는 또 어디서 나타난 게야!?’
미처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구원병의 금군교위가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 마음을 푸시옵소서. 소저께서 겪으신 일은 저희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분명 숨길 수 있을…….”
“닥쳐라!”
대장공주가 말채찍을 휘둘렀다. 금군교위의 얼굴에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놀라 멍해진 교위의 귀에 대장공주의 욕이 틀어박혔다.
“눈이 멀었느냐? 저 여인이 우리 아이로 보이느냐? 본궁도 저리 늙지 않았느니라!”
이어서 대장공주가 북양태비를 향해 의혹 가득한 시선을 한 채 말을 걸었다.
“그런데 여단, 어찌 이리 낯이 익은 게야? 이 여인은…….”
“그리 말하니, 나도 어째 그런 것 같구나.”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던 북양태비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세상에……! 강왕비가 아니냐? 어떻게 여기 있는 게야?!”
경악한 대장공주가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맞다! 강왕비! 강왕비! 일어나 보게!”
강왕비란 세 글자가 울려 퍼지자 따라나섰던 구원병들이 순식간에 웅성웅성,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된 거야? 지온 소저를 납치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어쩌다 갑자기 강왕비로 바뀐 거야?’
‘세상에나! 화를 입은 게 강왕비였다니, 이 일이 강왕세자의 귀에 들어가는 날엔…….’
양쪽에서 싸웠던 이들 중 꽤 많은 이들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다 풀렸다. 그들은 죄다 주저앉을 뻔했다.
‘끝났다. 일을 망쳤다!’
지온 소저에게 해를 입히지 못한 것은 차치하고, 납치당한 게 강왕비라니!
세자의 그 성정에, 자신들의 목숨이 남아나겠는가?
소씨 가문 호위 역시 정신이 나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 집안 장군의 뒷배가 강왕세자인데 강왕비가 누군가? 강왕세자의 친어미가 아닌가!
너무 많은 이들이 공자가 비적이 숨었던 곳에서 강왕비를 데리고 나온 걸 봤다.
‘이, 이, 이걸 없던 일로 할 수 있을까?’
나이 차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이를 어찌 헷갈린단 말인가?
‘이 쓸모없는 것들!’
부모상이라도 치른 듯 울상을 한 이들을 바라보며, 대장공주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강왕비를 데려가고자 그녀가 앞으로 나섰다.
“마침 강왕비를 구하게 됐으니, 본궁이 그녀를 강왕부로 데려다 주겠다.”
제 호위가 한 말만 기억하고 있던 소염은 그 와중에 강왕비를 내어주지 않았다.
대장공주가 한기 가득한 눈으로 소염을 노려보았다.
“무엇이냐? 설마 너희 남정네들이 우르르 강왕비를 데려다 주려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대장공주는 소염의 손에서 강왕비를 빼앗듯 데려와 제가 타고 온 말 안장에 널 듯이 던졌다.
“비적은 도망갔지만, 인질은 구했으니 그만 돌아간다!”
대장공주는 강왕비를 태운 채 득의양양 말에 올라 고삐를 채고 장원 밖으로 나갔다. 북양태비는 다른 이들을 인솔해 그 뒤를 따랐다.
서로 눈만 마주치고 있던 이들 중 일부는 그대로 북양태비를 따랐고, 누군가는 눈을 반들거리며 도망칠 궁리를 했다.
* * *
한편, 계획대로 진행된 것을 확인한 루안은 귀성을 명했다.
지온이 물었다.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성문이 닫혔을 텐데요?”
“걱정하지 마시오. 오늘 밤에 마침 곡식이 성으로 들어갈 예정이라 우리도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면 되오.”
유신지가 의심스레 루안을 흘겼다.
“그거 검사가 아주 철저한데, 미리 이야기는 됐겠지?”
루안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유신지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루안, 저 녀석 발이 너무 넓어. 뭔가 이상한데…….’
* * *
고삐를 쥔 대장공주 덕에 다들 성문 아래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수기로 기입한 명령서를 내밀자 성문이 서서히 열렸다.
가장 앞서있던 대장공주는 강왕비를 앞에 태운 채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적지 않았다.
부탁받은 가문을 제외해도 구경꾼이 많았던 것이다.
좌불안석이던 지익과 지장은 대장공주가 돌아온 것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아버지! 저기 보세요!”
지장은 단번에 대장공주 앞에 앉은 여자를 발견했다.
“온아! 지온아!”
지익이 애타게 지온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대장공주가 말을 멈춰 세웠다.
“지씨 가문 사람인가?”
불안과 초조로 엉망인 두 사람을 바라보며 대장공주가 묻자 지익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마, 신은 온이의 셋째 숙부입니다.”
대장공주가 데려온 여인을 바라보던 지익의 얼굴에 슬픔이 번졌다.
“어찌, 어찌 이리 명이 박한 것인지…….”
“뭐라는 것이냐?”
대장공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본궁은 온이를 찾지 못했다. 벌써 귀가했는지도 모르지.”
지익과 지장이 몸을 굳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강왕비에게 꽂혔다.
“하오면 이 사람은…….”
대장공주는 비통한 척하며 강왕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비적이 납치한 이가 내 올케 되는 강왕비일 줄이야…….”
‘뭣이라?!’
바로 그때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지씨 가문 하인이 지익에게 소리쳤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요! 아가씨께서는 귀가하시는 길에 대부인을 만나 광명사에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 * *
지장과 지익이 떠난 집 안에서 지형은 좌불안석이었다.
지온의 둘째 숙모인 위씨는 방을 뱅글뱅글 돌며 배회하는 지형 때문에 멀미를 할 지경이었다.
“가만 앉아 기다리면 안 됩니까? 당신 딸이 납치된 것도 아니고, 웬 호들갑인지!”
“그래도 지씨 가문의 아이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지서도 똑같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오.”
“그래서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벌써 일은 다 벌어졌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요.”
위씨가 더욱 강하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 지서가 그저 그런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감히 비웃어요?”
지서의 혼사를 떠올린 위씨는 속이 좋지 않았다.
지온과 화해한 후, 유씨 가문도 마음이 풀어진 듯 유 대부인이 중매를 선 끝에 지서의 혼사가 이뤄진 것이다.
상대는 유씨 가문의 먼 친척으로 가산이 풍부하고 조부 대에 진사가 된 이력이 있는 집안이었다. 비록 높은 관직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집안이 좋았다.
위씨는 처음엔 무척 만족스러웠다. 지서의 혼사를 두고 가는 곳마다 벽을 만나는 바람에 조건을 계속 낮춰, 사람 좋은 가문이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혼사가 정해지자 숨어있던 탐욕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비록 우리 가문이 전만큼 세는 없어도, 재상을 배출했던 집안이 아닌가!’
상대 집안의 관직 품계가 제 남편보다 다소 높긴 했지만, 중앙관청에서 종사하고 있진 않으니 그나마도 한 급 떨어졌다.
‘사위 될 아이도 열여덟에 수재(*秀才: 과거시험의 일종)를 준비하고 있으니…….’
그쪽 집안에선 아직 나이가 어리니, 앞으로 3년만 더욱 열심히 하면 다음 과거엔 꼭 붙을 거라며 좋은 말을 늘어놨다.
‘흥, 과거가 말로만 붙을 거라고 하면 철커덕 붙는 건 줄 아나?’
제 큰아들, 지염만 봐도 그리 똑똑한데 아직 과거를 통과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우리 지서가 시집을 가서 몇 년이 지나야 부인 소릴 들을지 어떻게 아냔 말이야.’
그러나 위씨는 이런 생각을 그저 속으로만 삭였을 뿐, 또다시 혼례를 물리자는 둥의 법석은 떨지 않았다. 다소 마음에 차지 않는 낮은 가문에 시집을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시집을 가지 못하는 게 진짜 큰 문제였던 것이다.
지형은 위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했다.
“그럼, 우리에게 별 영향도 없는 게로군?”
“무슨 영향이 있겠어요?”
위씨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봤자 뒤에서나 수군거리는 건데, 우리가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요. 더구나, 이번 일에 체면을 구긴 건 우리도 아니고요.”
어깨가 올라간 위씨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 앞에서 감히 전처럼 위세를 떨 수 있는지 보자고요!”
지난 반 년 간 지온에게 눌려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했던 위씨는 내심 고소하기까지 했다.
“옳소!”
위씨의 말에 홀랑 넘어간 지형은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다. 다만 대장공주를 떠올리니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공주마마께서 수양딸로 들인 것도 물리시겠지? 그럼 앞으로 찾아뵙긴 어렵겠소.”
하지만 위씨는 그마저도 아쉽지 않은 듯했다.
“그 아이가 대장공주와 연을 맺었다고 우리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요? 있어봐야 삼남가에게나 있지, 우리까진 누리지도 못하는 것을요.”
‘그도 그렇지.’
아쉬움까지 말끔하게 털어버린 지형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편안히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지염과 지서 남매까지 찾아오니, 일가족 네 식구가 화기애애한 웃음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