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25)화 (225/385)
  • 225화. 미녀를 구하러

    성문 근처 노점 다관.

    대장공주와 북양태비는 서로 마주 앉아있었다.

    “술시(*戌時: 오후 7시–9시)네.”

    북양태비가 초조히 입을 열었다.

    “술시 안에 반드시 해결을 봐야 해!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까지 넘어가면 다들 이상하다고 여길 게야…….”

    대장공주는 숫제 목구멍으로 차를 들이붓고 있었다.

    “괜찮을 게야!”

    이는 대장공주의 말이었다.

    “난 온이를 믿어!”

    두 사람이 멍하니 성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성문에서 인기척이 났다.

    “문을 여시오! 어서! 우리 공자께서 비적을 상대하고 있단 말이오!”

    대장공주와 북양태비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서로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장공주가 우연을 가장한 채로 다가갔다.

    “뭐라 한 것이냐? 비적이라니, 비적이 어디서?”

    소씨 가문 호위의 얼굴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대장공주마마, 저희가 타고 가던 마차가 도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여 근처 장원에 도움을 요청하러 찾아갔는데 그곳에 젊은 소저를 납치한 비적들이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하여 저희 공자께서 소저를 구해야 한다고 하시며 그곳에 남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보내 원병을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대장공주가 몹시 놀라며 물었다.

    “젊은 소저라니? 설마……!”

    그녀가 곧장 명했다.

    “여봐라, 날 따라나서라!”

    대장공주의 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모를 이들이 셀 수도 없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뭐?! 소저가 비적에게 납치를 당했다니, 설마 공주마마의…….”

    “그럼 예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가서 도와야지!”

    “감히 도성에서 비적이 사람을 납치해?! 당장 상관께 보고를 올려야겠군!”

    “집합! 다들 집합해라! 비적을 찾으러 갈 것이다!”

    “우리도 가서 도우세! 죄 없는 여인을 납치하다니, 그런 무도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북양태비는 냉정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모인 이들의 신분은 다양했다. 금군과 순검사, 부아에서 나온 관졸에, 어느 왕후부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위들, 그리고 심지어 그저 길을 가다 소식을 듣고 의분으로 뛰쳐나온 이까지 섞여 있었다.

    ‘놈들이 증인을 아주 다채롭게 구성했구나.’

    애가 타는 초조한 얼굴의 대장공주가 모인 이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다들 떠드는 것이냐! 납치당한 소저가 내 아이일 수도 있단 말이냐!”

    그러자 소씨 가문 호위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 소인은 그 소저가 마마의 따님이라 하지는 않았사온데…….”

    그 말에 대장공주가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네 녀석이 방금 그리 돌려 말하지 않았느냐!”

    호위는 억울했다.

    “소인에게만 덮어씌우지 마시지요! 실은 마마께서도 그리 의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지 뭐!’

    본인이 이 난리를 쳤는데 한 시진이 되도록 못 찾고 있다가 비적에게 납치당한 소저가 있단 소릴 듣지 않았던가? 다들 그리 의심할 터였다.

    ‘사람들에게서 말이 나올 게 겁이 났으면, 처음부터 일을 크게 벌이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일이 이리 된 걸, 누굴 탓해?’

    대장공주는 순식간에 질책 가득한 시선에 휩싸였다.

    그때, 북양태비가 슬쩍 다가와 그녀를 잡아당겼다.

    “우선 사람부터 구하는 게 급하네.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어.”

    그러며 연기는 이쯤하면 됐다는 눈짓을 보냈다.

    대장공주는 화를 풀듯이 소매를 떨치더니 다시 소리쳤다.

    “말을 준비해라!”

    시위가 말을 대령했고, 곧 보무도 당당한 이들이 사람을 구하러 줄줄이 따라나섰다.

    본래 야간에 성문을 개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성문지기가 보고를 올리자마자 허락이 떨어졌다.

    그들이 성문을 넘자, 소문은 바람처럼 도성을 뒤덮었다.

    공주마마가 저녁 내내 찾던 수양딸은, 실은 비적에게 납치당했던 것이다!

    * * *

    한편, 지씨 가문 둘째 노야인 지형은 저택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중인 지형에게 누군가 찾아와 물었다.

    “지 형(池兄), 자네가 왜 여기 있나?”

    지형이 그를 슬쩍 보며 대답했다.

    “이 형(李兄), 거 무슨 뜻인가? 나는 밖에서 식사도 못한단 말인가?”

    이 형이라 불린 이가 답답한 듯 혀를 찼다.

    “그게 아닐세! 자넨, 조카딸이 비적에게 납치됐다는데 숙부가 돼서는 술이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멈칫, 지형이 되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겐가?”

    “대장공주마마의 수양딸 말이네! 지온 소저가 자네 조카딸이 아닌가?”

    대장공주의 수양딸……!

    지형은 마시던 술이 목에 걸려 사레가 들었다.

    “지, 지, 지, 지온이가 비적에게 납치됐다고?”

    “그래! 도성 전체가 다 아는 일일세. 대장공주께서도 이미 성 밖으로 구하러 가셨다고!”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난 지형이 자리한 이들에게 읍하며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게들 됐네, 난 먼저 가봄세.”

    그런 소식을 들었는데, 다른 이들이 그를 붙잡을 수 있겠는가. 다들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어서 가보시게, 식사는 언제든 할 수 있는 게지!”

    지형은 식은땀을 훔치며 다급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 * *

    소식을 접한 지씨 가문의 셋째 노야인 지익이 펄쩍 뛰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서, 우리도 어서 가서 구하러 갑시다!”

    지형이 지익을 붙잡았다.

    “공주마마께서 이미 구하러 가셨다. 반드시 구해 돌아오실 터이니, 우린 다른 일들을 처리해야지.”

    지형의 말에 지익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뜻이오, 형님?”

    지형의 눈이 번들거렸다.

    “지온이 안전하게 돌아오든 아니든, 그 아이가 납치됐단 소문이 이미 도성 전체에 퍼졌다. 그 아이의 평판은 이제…….”

    이에 지익이 노성을 토했다.

    “지형, 이 불측한 인간! 조카딸이 지금 위험에 빠졌는데 평판 따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설사 평판에 흠이 잡혀도, 살아 돌아온 후에나 생각할 일이지! 이건 안 가겠다는 소리 아니오? 됐소! 난 가겠소!”

    그리고 밖에다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지장아! 가자!”

    그러나 그들이 성문에 도착했을 땐 이미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그들은 초조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대장공주가 연신 길을 재촉하는 바람에 모두들 속도를 더할 수밖에 없었다.

    금군과 관졸, 각 집안에서 나온 시위들로 조직된 구원병이 장원에 당도했을 때, 이미 불길에 휩싸인 장원에서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 길이 없는 대장공주가 애타는 눈으로 북양태비를 바라보았다.

    주위를 휙 둘러보던 북양태비는 곧 루안이 남긴 표식을 발견했다. 그녀가 대장공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장공주가 마음을 먹은 듯이 분노한 채로 고함을 쳤다.

    “다들 멀뚱히 뭐하는 것이냐! 어서 가서 구해야지!”

    무리가 장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원에 진입한 그들은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다 보니 곧장 지온이 갇힌 작은 방으로 직행했다.

    그들의 수색이 워낙 빠른 탓에, 이제 막 현장을 꾸미길 마친 소씨 가문 사람은 다급히 소염을 방으로 밀어 넣으며 당부했다.

    “공자님, 안에 소저 한 분이 계실 것입니다. 소저의 옷을 풀어헤친 후에, 안아 들고나오세요! 혹시 소저가 반항하면 때려서 기절시키면 됩니다!”

    비록 소염 공자가 머리에 문제가 생겨 맹해지긴 했지만, 무공 실력은 여전했던지라 호위는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대장공주가 저 있는 곳 문 앞까지 온 것을 본 대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그 앞을 막아섰다.

    “마마, 여긴 어찌 오셨습니까?”

    초조해 마지않는 얼굴의 대장공주가 말채찍을 든 채 노성을 토했다.

    “비켜라! 본궁이 아이를 구하는 걸 막지 마!”

    그러나 호위대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웃는 낯을 한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공자께서 이미 구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천금보다 귀한 마마를 어찌 위험하게 하겠습니까?”

    “누가 그 녀석에게 구해 달랬느냐?”

    대장공주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너희가 구할 필요 없으니, 비키란 말이다!”

    북양태비가 옆에서 같이 변죽을 울렸다.

    “못 들었느냐? 감히 대장공주마마의 뜻에 반하려는 게야?!”

    두 사람이 더욱 화를 낼수록 호위대장은 더욱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계획이 실패하게 생겼으니, 미치고 팔짝 뛰겠지? 응? 이제 어떻게 혼사를 맺을 테냐?’

    대장공주가 저리 애태우는 걸 보니 수양딸을 정말 아끼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아주 잘 됐어.’

    어쩌면 대장공주가 제 수양딸의 앞날을 생각해 억지로 이 혼사를 이어 붙이려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루씨 가문도 대를 이어온 왕후 가문이 아닌가? 북양태비가 비적에게 납치됐던 여자를 제 아들의 부인으로 삼을 리가 없었다.

    ‘그럼 분명 서로 얼굴을 붉히겠지.’

    그때 소씨 가문에서 혼사를 맺으려 나선다면 대장공주에게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나?

    지온 소저가 비록 가문은 한미해도 타고난 미색이 출중하고 대장공주를 뒷배로 두고 있으니 간신히 공자께 맞출 정도는 됐다.

    “마마! 무리하지 마십시오, 저희 공자께서 곧 구해 나오실 것입니다.”

    거의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간 소염은 텅 빈 방에 어안이 벙벙했다.

    “소저가 어딨단 말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침상 위에서 모포로 감싼 사람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확 번졌다.

    “여깄네!”

    소염은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안고 나가려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옷을 헤쳐야지! 그렇지!”

    옷을 헤치다 붉은색 가슴가리개가 드러나자 소염은 그대로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소염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호위의 얼굴에 꽃이 활짝 폈다.

    “마마, 보십시오! 저희 공자께서 구해 나오셨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러나 불덩이를 목구멍으로 삼키는 듯한 얼굴이었다. 호위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여인을 안은 소염이 황급히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염의 품에 안긴 여인은 옷이 다 흐트러져 붉은색 가슴가리개마저 노출한 상태였다!

    ‘헉! 설마 지온 소저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인가!’

    * * *

    “에취!”

    재채기를 한 서아가 손으로 코를 비비적거렸다.

    지온이 뭐라 말을 하려던 찰나, 비척비척 다가온 한등이 먼저 피풍의를 서아에게 건넸다.

    “벌써 시월이라 밤은 날이 추워요, 누님. 여며 입으세요, 한기 드실라.”

    그러더니 부끄러운 듯 손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제가 잠시 입었던 거라 냄새가 날 수 있긴 한데……. 그래도 몸이 중하니 조금만 참으세요!”

    본래 서아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정말 너무 추워,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함박꽃 같은 미소를 지은 한등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아직 저녁도 못 드셨죠? 배가 비면 자연히 더 추워져요. 제가 나오면서 계수나무 꽃으로 만든 계화떡을 좀 챙긴 것이 있는데, 아직 따뜻할 테니 배라도 채우러 가시죠…….”

    그렇게 한등이 서아를 꾀어 갔다.

    지온이 할 말 많은 눈으로 루안을 흘기자, 그 눈빛에 흠칫한 루안은 조용히 고심했다.

    ‘설마 내가 한등 녀석보다 못해 싫은가?’

    루안이 해명이라도 하려 입을 열었을 때, 유신지가 한 발 먼저 목소리를 냈다.

    “지온 소저, 여기서 바람을 피하세요!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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