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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23)화 (223/385)
  • 223화. 일은 더 크게 부추겨야지요

    곧 날이 까맣게 저물었지만 누구도 두 사람을 찾지 않았다.

    지온과 서아는 그저 유등(油燈) 근처에 하릴없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냐! 멈춰라!”

    문 앞을 지키던 수위의 음성이었다. 그때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수위가 차갑게 대답했다.

    “필요 없으니, 당장 나가라!”

    그러나 웃음 띤 여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리, 안에 계신 분들은 귀빈이셔서 식사를 거를 수 없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거든 총관 나리께 여쭤보시지요. 쇤네가 확인한 것입니다.”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서아의 가슴이 꽉 막혔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낯익지?’

    그녀가 그리 말하자 고민하던 수위가 이윽고 대답했다.

    “알겠다. 빨리 주고 나와라.”

    “네, 나으리.”

    통통 튀듯이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문 앞까지 왔을 때 돌연 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지온이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가 볼품없는 무공이나마, 청력만큼은 뛰어나지 않던가!

    누군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문이 벌컥 열리고 평범한 아녀자의 복색을 한 누군가가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본 서아는 대경실색했다.

    “부, 부인?”

    “쉿!”

    검지를 들어 올렸던 대부인 정씨가 조용히 말했다.

    “어서 날 따라오거라.”

    순간 경악했지만, 지온은 금세 미소를 지었다.

    “대부인, 그동안 정체를 잘 숨기셨군요.”

    “돌아가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 지금은 우선 여기서 벗어나세.”

    지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시만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정씨가 물었다.

    “왜 그러는 것인가? 떠나고 싶지 않은 겐가?”

    지온이 조용히 대답했다.

    “이리 잡혀 오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기념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는지요?”

    이번엔 정씨가 경악했다.

    밖을 살피던 지온이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긴 어딘가요? 대부인께서 저희를 데리고 나가실 수 있는 걸 보면, 다른 이를 데려오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 * *

    화정교 일각에서 주전부리를 파는 작은 점포의 상인은, 너도나도 계속 던지는 질문에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여기서 빠져나간 마차는 골목을 돌아 금방 사라졌습니다. 다른 것은 저도 모릅니다.”

    화정교가 얼마나 번화한 곳이던가. 매일 오가는 마차도 셀 수 없이 많은 곳인데, 저가 뭘 얼마나 기억하겠느냔 말이다.

    ‘대체 어느 집안 자식이 사라졌기에, 이 난리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무리들은 관졸에, 병정에, 심지어 높은 가문에서 나온 이들까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북새통에 같은 질문만 대여섯 번씩 받느라 점포 전체가 영업도 못할 지경이었다.

    관졸이 떠나자 옆 점포의 일꾼이 혀를 찼다.

    “대단하구먼, 아주! 정국공부에, 영국공부, 선무후부, 평강후부까지……. 다들 사람 찾는 걸 돕겠다 나섰어. 대체 어느 댁 아가씨인지, 위세 한 번 대단하구먼!”

    행상이 입을 열었다.

    “왕후부 집안이 아닌가 싶어?”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이가 가세했다. 그가 쉬쉬하며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난 누군지 아네.”

    그러자 두 사람이 눈을 둥그렇게 뜨곤 물었다.

    “누군가?”

    눈치를 보던 이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자네들이 들어봤나 모르겠네만, 대장공주의 수양딸이 된 지씨 가문의 아가씨라네.”

    눈을 반짝인 두 사람이 이구동성, 외쳤다.

    “화신첨!”

    “그렇지, 바로 그분일세. 듣자니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화정교에서 떠났다는데, 조방궁으로 돌아가지 않은 모양일세. 대장공주께서 애가 타시니 바로 사람들을 모아 찾기 시작하신 게야.”

    행상이 입을 열었다.

    “대장공주께서도 너무 조급해하시는 게 아닌가? 겨우 한 시진밖에 안 지나지 않았나? 야시장이 얼마나 흥겨운데, 다른 곳으로 놀러간 걸지도 모르네. 진짜 사라진 게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말이네! 마차까지 타고 갔으면, 옆에 시녀도 있고 마부도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일을 이리 크게 벌인 통에 우리만 일하기 힘들어졌구먼.”

    “높은 집안사람이지 않나. 어디 우리 같을까 봐?”

    그들은 그렇게 불평을 쏟고는 각자 제 점포로 돌아갔다.

    * * *

    도성 전체가 들끓고 있을 때, 루안은 한등과 함께 나타난 유신지를 보고 있었다.

    “자네가 무슨 일이지?”

    “내가 오면 안 되는 거였나?”

    유신지가 불퉁하게 말했다.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내게 알리지도 않고 말이야!”

    개나 소나 다 알게 된 일을 자신만 모르게 하다니, 무슨 친우가 그렇단 말인가?

    루안이 피식 웃었다.

    “아직 집은 다녀오지 않았나보군. 내가 이미 자네 집으로 사람을 보내 사람을 빌렸어.”

    “아, 그랬어?!”

    루안의 해명 한 마디에, 더 달랠 것도 없이 유신지의 마음에 뭉쳤던 응어리가 금세 녹아 없어졌다.

    “길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자네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바로 찾아왔지. 그런데 뭐 하는 거야? 왜 여기서 웅크리고 있어?”

    다들 도성을 쥐 잡듯 뒤지고 있을 때, 루안과 정씨 주인장은 이미 성문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한등을 만나지 못했다면, 유신지는 그들을 찾지 못했을 터였다.

    루안이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웅크리고 앉는 것이 어려운 주인장은 못 쓰는 다리를 펴고 제 지팡이 위에 앉아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동생이 지 소저가 납치당한 것을 발견해 뒤를 쫓았소. 동생이 남긴 표시를 보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터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오.”

    주인장을 살피던 유신지는 어딘지 그가 눈에 익다 생각했다. 그런데 말투는 또 밑에서 일하는 자 같지가 않아 물었다.

    “그런데 선생께선 뉘신지…….”

    “온이의 외삼촌이다.”

    루안의 대답에 유신지가 몹시 놀랐다.

    유신지는 지온을 낳은 생모의 친정이 도성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쪽 다리를 못 쓴다는 특징이 명확해 그는 곧 지온의 계모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정 어르신이셨군요.”

    공수를 하던 그는 문득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정 어르신께 다른 동생이 또 있나?’

    “대부인께서 위험하진 않겠습니까?”

    그때 루안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주인장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경공이 뛰어난 아이니 걱정하지 마시게.”

    “이 일로 부인께 문제가 생긴다면 어르신을 뵐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면목 없을 게 무언가? 온이는 그 아이 자식이니, 당연히 목숨 걸고 구해야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유신지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그러니까, 뭐야? 정 어르신이 말하는 동생이 지씨 가문의 대부인이란 말이야?’

    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가문 심처의 대부인이 어찌 무공을 한단 말인가?

    ‘지씨 가문엔 어떤 인물들이 사는 거지?’

    머리가 복잡해진 유신지가 입을 열려던 찰나, 주인장이 제 지팡이를 돌연 붙들고 일어났다.

    “왔군!”

    달빛이 요요한 가운데 까만 점이 나는 듯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까만 점이 넓은 도로에 내려앉았다.

    검은 인영이 주변을 두리번대자 주인장이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다!”

    달려온 대부인은 낮은 구릉 뒤에 사람들이 복닥복닥 모여 있는 것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오라버니…….”

    “여긴 루 대인이시다. 이분은 유씨 집안의 대공자, 너도 뵌 적이 있겠지?”

    곧 평정을 찾은 대부인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루안은 괜찮았으나, 유신지의 마음속에는 충격의 파도가 거세게 쳤다.

    유신지는 지씨 가문의 대부인을 몇 차례나 만났었다. 당시 기억으론 그저 조용하고 약한 부인이었는데, 이 무슨…….

    ‘내원 깊숙한 곳에서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거지?’

    “온이는 찾은 것이냐?”

    “찾았어요.”

    제 오라비의 물음에 정씨가 대답했다.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안전합니다.”

    루안이 안도한 듯 큰 숨을 내쉬었다.

    강왕부에서 손을 쓴 것을 알았을 때 이미 지온의 목숨이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러나 무사한 것이 확인되기 전엔 마음을 온전히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온이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마음 놓고 움직이면 될 터.

    “대부인,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씨가 빙긋 웃었다.

    “사실 저는 온이의 말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 * *

    일각 전.

    정씨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지온이 작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누가 저를 잡아왔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대부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일련의 움직임이 나에게 아주 익숙하네. 착오가 없다면 오랜 적인 그쪽일 것이네.”

    지온이 웃었다.

    “어머니께선 역시 그 일을 하고 계셨던 거로군요.”

    지온의 대답에 대부인의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알고 있던 것인가?”

    지온이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우선 지금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시지요. 누가 벌인 일인지 아신다니, 어머니께선 저들이 저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도 아시겠지요.”

    그러나 정씨는 생각이 달랐다.

    “목숨은 건들지 않겠지. 그러나 그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네.”

    “맞습니다.”

    순순히 인정한 지온이 대답했다.

    “저들이 애써 저를 잡아온 걸 보면 분명 그럴듯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저를 죽이기엔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저는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그리해봐야 대장공주님의 분노를 살 뿐이지요. 살인하길 원치 않는다면, 제게 또 무슨 일을 벌이려 하겠습니까? 제 생각으론 최근 북양태비께서 조방궁에 자주 걸음하신 것을 보고 저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정씨가 밖을 흘끔거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말하게, 들키면 일이 번거로워지네.”

    고개를 끄덕인 지온은 대놓고 그 연유를 말했다.

    “저들은 대장공주와 북양이 손잡는 것을 방해할 생각입니다. 저와 루안의 혼사를 깨고 싶은 것이지요.”

    대부인은 애가 탔다.

    “그런데도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것인가?”

    지온이 그녀를 도닥였다.

    “괜찮습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계획한 사람이라면, 일단 하루 이틀 잡아두고 볼 것입니다. 제 실종 소식이 도성 전체에 퍼지고 난 후에 여론을 몰아가도록 손을 쓰면 이 혼사를 쉽게 깰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럼 이제 우린 어찌하면 되는가? 자네의 실종 소식이 퍼지지 않게 막아야 하는가?”

    지온이 히죽 웃었다.

    “아닙니다. 그 반대지요. 저희는 오히려 이 소식을 크게 부추겨 저들이 먼저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목소리를 낮춘 지온이 정씨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전했다.

    정씨는 반신반의했지만 지온이 조방궁에서 해낸 일들을 떠올렸다. 이를 악문 그녀는 결국 지온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알겠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시게, 내 금방 사람을 데려오겠네.”

    지온과 서아가 있는 방문이 다시 닫혔다.

    수위를 끌어 문에 기댄 듯한 자세를 해놓은 대부인은 빠른 손놀림으로 그들의 혈도를 짚었다.

    가물가물 눈을 뜨던 수위 두 사람은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듯한 정씨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자객이다!”

    수위는 곧장 정씨를 잡으려 달려들었다.

    당황한 듯 뒤로 훌쩍 물러난 정씨는 제집 드나들 듯, 아무렇지 않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신형은 곧 사라졌다.

    다른 수위가 달려왔다.

    털이 덥수룩한 털보는 수위들의 수장으로 바로 지온을 납치해온 그 사내였다.

    털보가 물었다.

    “인질은?”

    수위가 문을 열었다. 경계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확인한 수위가 다시 돌아와 전했다.

    “인질은 안전합니다.”

    그에 털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감시해!”

    저택 대문에서 얼마쯤 기다렸을까, 자객을 쫓았던 수위가 돌아왔다.

    “여자의 경공 실력이 대단해 붙잡지 못했습니다.”

    털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지온이 감금된 방의 닫힌 문을 보며 그의 수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장소를 옮길까요?”

    털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늦었다. 이미 위치는 들통 났어. 다시 장소를 옮기면 너무 눈에 띈다. 옮기는 중에 누군가 구하러 올 거야.”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마음을 굳히곤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 연락을 취해라! 계획을 앞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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