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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21)화 (221/385)
  • 221화. 부족합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헛간도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 마차 밑에서 꿈지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천천히 몸을 빼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 밑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참아온 듯한 숨을 내쉬었다.

    “죽겠네…….”

    머리에 꽂아 둔 은잠(銀簪)을 쑥 뽑으며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 * *

    반 시진 전, 필묵점.

    대부인 정씨는 점포를 정리하고 지씨 가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때 점포에서 일하는 일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뒷문에 있는 장작더미에서 혼절한 두 사람을 발견했는데, 복색을 보니 아무래도 ‘갈고리’ 같습니다!”

    정씨가 흠칫 일꾼을 돌아보았다.

    ‘갈고리’는 밀탐(*密探: 정탐꾼, 스파이, 밀정 등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수사관을 이름)을 지칭하는 그들끼리의 은어였다.

    이곳에서 잠복하고 있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누구던가? 바로 밀탐이 아닌가!

    주인장은 즉시 지팡이를 들었다.

    “가보자, 어서!”

    정씨 역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을 따라 뒷문으로 향했다.

    정말 장작더미에 두 사람이 혼절해 있었다.

    평범한 생김새였지만 몸이 건장했다. 손을 보니 분명 무술을 익힌 이들이었다.

    일꾼이 이리저리 뒤적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빼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영패(令牌)를 본 정씨가 대번에 안색을 굳혔다.

    “이런! 대장공주 쪽 사람이에요.”

    주인장과 정씨의 시선이 얽혔다. 의혹과 의심이 겹겹이 쌓인 시선이었다.

    “지온이는?”

    “조금 전에 떠났습니다.”

    마침 마차가 그들 맞은편에 대기하고 있었던지라 주인장도 이를 보았었다.

    까드득, 이를 문 정씨가 재빨리 겉옷을 벗었다. 금방 소매가 좁은 바지가 튀어나왔다. 편한 일상복 차림이 된 그녀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얘야!”

    제 오라비가 그녀를 불렀다.

    “다친 것도 이제 막 회복했는데…….”

    그러나 정씨는 멈추지 않았다.

    “온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 전부 무슨 낯으로 어르신을 봬요?”

    정씨 집안은 대부인의 친정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떠나자 그녀의 오라비인 주인장이 일꾼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조방궁, 사방전의 선고를 찾아가거라. 그리고 이 일을 대장공주마마께 바로 알리라 전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간 일꾼은 문을 나서자마자 금세 사라졌다.

    좌우, 주변을 살핀 주인장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손에 하나씩 암중호위를 들더니 휙 내던졌다.

    몸집이 커다란 장정 둘이 그리 간단하게 담 너머로 내던져진 것이다.

    숨찬 기색조차 없는 주인장은 손을 탁탁 털더니 담을 돌아 제집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곧 문이 닫혔다.

    * * *

    오늘 루안은 날이 어둑해져서야 퇴근했다.

    그가 탄 마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대문 근처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야우가 루안을 향해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공자님! 공자님!”

    먼저 마차에서 훌쩍 내린 한등이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전에 언제 이렇게 반겼다고, 소리는 왜 질러요?”

    그러나 그와 대거리할 겨를도 없는 듯 야우가 루안을 잡아끌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조방궁에서 지온 소저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루안의 목소리가 바로 무거워졌다.

    “사라졌다니, 무슨 뜻이지?”

    찾아온 연락책이 루안을 향해 손을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오늘 저희 아가씨와 경 소저께서 약속이 있어 나가셨습니다. 본래 해거름이면 돌아오셨을 텐데 지금까지 행적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대부인의 오라버니께서 마침 화정교 근처에서 점포를 운영하시는데, 그곳에서 아가씨를 호위하는 암중호위 두 사람이 혼절한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루안은 즉시 마차로 돌아섰다.

    “잠깐.”

    안에서 북양태비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나와 함께 가자.”

    “어머니!”

    그러나 말도 없이 마차에 오른 북양태비는, 도리어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멀뚱히 뭐하고 섰어?”

    그리고 연락책을 향해 말했다.

    “너도 타거라. 무슨 상황인지 자세히 말해봐.”

    “네.”

    어쩔 수 없이 루안도 마차에 올랐다.

    연락책이 빠르게 상황을 읊었다.

    “저희 마마께선 이미 화정교로 움직이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마부에게 말했다.

    “우리도 화정교로 가자, 빨리!”

    실종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했다. 이는 형부에서 사건을 다뤄보았던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아니던가.

    북양태비의 얼굴이 무거웠다.

    “암중호위를 조용히 처리했다. 준비하고 온 게야.”

    북양태비의 시선이 루안을 향했다.

    “도성에 원수 맺은 이들이 많으냐?”

    “많은 것은 맞지만 이렇게 움직일 만큼의 동기와 실력이 되는 이들은 결국 그들 몇입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북양태비가 다시 말했다.

    “네가 말한 그들은 여양과도 원수진 이들이 맞지?”

    루안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장공주의 암중호위는 궁에서 나온 이들입니다. 상대는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았을 겁니다. 그러니 이리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요. 도성에 그 정도 되는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단 세 곳뿐입니다.”

    “어디냐?”

    “강왕부, 평왕부 그리고 황궁입니다.”

    북양태비가 피식, 냉소를 지었다.

    “강왕부?”

    루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지금 자신을 무척 신임하고 있다. 더구나 황궁에 그가 심어둔 이들이 있었으니 기미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깜깜무소식일 리 없다. 평왕부와는 아직 이렇다 할 충돌을 빚은 적이 없었다. 동기가 부족했다.

    남은 것은 강왕부 뿐이었다.

    ‘강왕세자는 이미 살심이 동한 모양이로군.’

    * * *

    두 사람이 화정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정씨가 운영하는 필묵점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한등이 문을 두드리자 일꾼이 활짝 웃으며 나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점포 어르신께 일이 있어 오늘은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한등이 마주 입을 열려던 찰나, 루안이 다가왔다.

    “대장공주께선 어디 계신가?”

    순식간에 미소를 지운 일꾼이 가늠하듯 루안의 뒤에 선 북양태비에게 시선을 보내더니 점포 안으로 머리를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포 문이 열렸다.

    대장공주는 주인장과 대화중이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대장공주는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마침 잘 왔구먼. 온이가 납치를 당했다고 거의 확신하던 참이야.”

    북양태비가 물었다.

    “단서가 나온 건 있고?”

    대장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조금 전 불러들인 마부를 가리켰다.

    “용변을 보러 가던 길에 누군가에게 맞아 혼절했다 하더구먼. 내 아직 온이의 마차를 누가,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알아보지 못했어.”

    주인장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달리 입을 열진 않았다.

    “그럼 지금까지 찾은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루안의 물음에 대장공주가 침통한 얼굴로 탄식했다.

    “그렇다 할 수 있네.”

    도성은 넓고 인구도 많았다. 그런 도성에서 실종된 지 반 시진이 지난 지온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그러나 초조해진 북양태비는 안달이 났다.

    “넌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네가 거둔 수양딸 하나 지켜내질 못하니 길바닥 짱돌 같은 것들도 다 네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똥을 싸지르는 게 아니야!”

    루안이 헉하고 숨을 뱉었다.

    “어머니!”

    ‘언어에 교양을 갖추세요, 제발!’

    그러나 그 성질 못지않은 대장공주가 쯧, 혀 차는 소리를 내곤 입을 열었다.

    “질펀하게 싸지르라지! 그러나 그 후에 본궁이 어떻게 주리를 트는지도 지켜봐야 할 게야!”

    “…….”

    잠시 말을 잃었던 루안이 다시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먼저 사람부터 찾아야 합니다.”

    대장공주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래. 밤이 지나면 찾기가 더 어려워질 게야.”

    그러며 그녀가 루안을 흘끔 쳐다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루안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리되면 내가 그것을 마음에 둘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 걱정도 팔자시로군.’

    북양태비는 애가 달았다.

    “인력도 부족하겠어. 나는 데려온 인력이 없고 저택에도 저 녀석이 처음 도성에 올 때 함께 온 시위들뿐이다. 그들도 대부분 다른 일을 맡고 있어서 저택에 남은 손이 몇 없어. 네 공주부도 없어졌으니 거두고 있는 수하도 몇 없겠지.”

    확실히 큰 문제였다.

    이 큰 도성에서 인력마저 부족한 채 사람을 찾는 일은 어려웠던 것이다.

    “정국공부가 있었지!”

    대장공주가 돌연 입을 열었다.

    “내 바로 찾아가 손을 빌려 달라 하겠다!”

    그러다 문득 말을 멈춘 그녀가 고민이 된다는 듯이 루안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소란이 너무 커지면 다른 이들이 의아해할 터인데…….”

    그러나 루안의 얼굴은, 여상했다.

    “부족합니다.”

    “부족하다니?”

    “그 정도 소란으로는 부족합니다.”

    루안이 대답했다.

    “공주마마. 신, 마마께서 순검사(巡檢司)와 부아(府衙)의 인력도 함께 요청하시길 청하옵니다. 그리고 연이 있으신 가문 전체에 연락하시어 인력을 요청하십시오.”

    대장공주는 몹시 놀랐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것이야? 지금 온이가 실종된 일을 도성 전체에 알리겠다는 게야! 그래서 바로 찾으면 다행이겠지만, 혹여 밤이라도 지나면 온이의 평판은 어찌하고!”

    그녀는, 이따위 의견이라니 루안이 정녕 지온과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북양태비는 대장공주의 말에 울컥했다.

    “좀 기다려봐! 다 생각이 있으니 넷째가 저리 말하는 것이지, 우선 듣기부터 해.”

    “오냐!”

    대장공주가 루안을 향해 턱짓했다.

    “말해 보거라!”

    “저희는 이 일을 크게 소문내야 할 뿐 아니라 더욱 크게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이 일 자체를 황당무계한 일로 만들어야지요. 그리되면 그녀의 명성도 지킬 수 있고 그녀도 더 빠르게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대장공주가 멈칫했다.

    “어찌하면 그리되는 게야?”

    * * *

    대장공주가 나갔다.

    북양태비는 그녀와 따로 움직이기로 하고, 안면이 있는 집안이면 전부 한 번씩 방문하기로 했다.

    역시 떠나기 전, 루안은 주인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는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루안의 호칭에 연신, ‘제가 어찌, 감히!’ 를 외치던 그가 말했다.

    “제 다리가 성치 않습니다, 루 대인.”

    그러나 그는 루안이 피식 웃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제가 어떻게 빠르게 단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장이 흠칫 몸을 굳혔으나 루안은 여상했다.

    “달포쯤, 제가 영매(令妹)께 사람을 붙여 지켜봤단 것을 어르신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분 남매께선 참으로 대담한 곳에 숨으셨더군요.”

    주인장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자네였군…….”

    주인장은 원수 집안에서 붙인 사람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안이 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 일은 추후에 다시 계속 논하기로 합시다. 지금 저희는 목적이 같겠지요. 댁께서도 지온 소저에게 일이 생기길 원치 않을 테니 말입니다. 아닙니까?”

    잠시 침묵하던 주인장이 지팡이를 쥐어 들었다.

    “가지.”

    두 사람은 함께 문을 나섰다.

    마차가 오자 루안은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주인장이 손을 저었다.

    “내 비록 다리는 절어도 말 정돈 탈 수 있네.”

    루안이 빙긋 웃곤 한등에게 말을 끌고 오라 했다.

    주인장이 준마에 올랐다. 그는 시원한 밤바람이 달려들자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벅적한 시정에 몸을 숨긴지, 여러 해가 흘렀다.

    드디어 무공을 쓸 곳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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