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20)화 (220/385)
  • 220화. 꼬치구이

    화정교 근처 필묵점(*筆墨店: 붓과 먹을 파는 가게).

    한쪽 다리를 저는 주인장이 점포 안에 대고 소리쳤다.

    “얘야, 나와 보거라!”

    점포 안에서 누군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온 것은 키가 작고 여리여리한 체구의 부인이었다. 지온이 그녀를 보았다면 분명 기함했을 터였다.

    점포 안에서 나온 부인은 지씨 가문의 대부인, 정씨였던 것이다.

    대부인, 정씨가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주인장은 다리 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소녀 두 사람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좀 보거라. 네 딸이 아니냐? 내가 조방궁에 갔을 때 슬쩍 본 적이 있어.”

    정씨가 주인장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모습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 맞네요!”

    그러자 주인장이 황급히 제 점포에서 일하는 일꾼을 불러, 그들이 무슨 일로 왔는지 알아보라며 보냈다.

    이윽고 돌아온 일꾼이 말했다.

    “아가씨께선 친척 동생과 꼬치구이를 먹으려고 오셨답니다.”

    그제야 안도한 주인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구먼.”

    주인장이 종이를 재단하며 정씨에게 말했다.

    “참 걱정할 일이 없는 딸이다. 조방궁에 가랬더니 군소리 없이 가고, 그곳에서 혼자서도 그리 잘 지내지 않느냐.”

    제 오라비를 돕던 정씨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요. 막 집에 돌아왔을 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는지…… 어르신 같은 분 아래서 어떻게 그런 딸이 나왔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게 전부 거짓이었잖아요.”

    “그리 비범한 재능의 은인(恩人)께서 낳은 딸이 부족할 리가 있겠느냐? 겨우 반년밖에 안 됐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했느냔 말이야!”

    그러나 정씨의 입에선 한숨이 터졌다. 종이를 정리하던 그녀가 돌연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전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어요.”

    “불안할 게 뭐가 있어?”

    주인장은 희희낙락 웃었다.

    “대장공주와 연을 맺었으니 앞으로 남은 것은 비단길일 텐데, 뭐가?”

    그러나 정씨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여전했다.

    “제가 지온이를 조방궁에 보냈던 건 온갖 시비에서 떨어뜨리려고 한 일이었잖아요. 조방궁이 그리 위험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말이죠. 그런데 지온이는 제힘으로 조방궁을 정리했어요. 덕분에 명성도 올리며 사람도 구했지만, 매번 지온이 부딪히는 사람들마다 선하지 않은 손윗사람들이었잖아요. 아마 그러는 동안 저도 모르게 원수진 곳이 많겠죠. 저는 지온이가 이 은원(恩怨)의 굴레로 끌려온 게 아닌가 싶어요.”

    “괜한 걱정이야. 지온이는 은인의 딸이다. 제 아비를 위해 복수하려는 것이 당연하지. 지온이 나약한 규방의 규수인 줄 알고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온갖 시비에서 멀리 떨어뜨려 은인의 후사를 남기려 했던 것이었고. 그런데 벌써 여러 가지 일을 통해 나약한 규수가 아니었단 것이 증명되지 않았느냐? 지온이 벌인 일들이 모두 그 아이가 계획한 일이 아니라고 네가 어찌 장담하겠느냐?”

    그 말에 멈칫한 정씨가 물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말은 지온이가 소씨 가문과 강왕부를 일부러 건드려 뒤집어 놨단 거예요? 설마, 그 아이가…….”

    주인장이 풀썩 웃었다.

    “너도 지온이가 아주 똑똑하다며 감탄하지 않았었느냐? 은인의 역량을 넘을지언정 부족하진 않다고 말이다. 어쩌면 이미 예전에 뭔가를 눈치챘을 수도 있어. 조방궁에 간 후로 집엔 거의 오지 않는 것도 어쩌면 너희를 연루되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일지도 모르지.”

    그때 점포 문 앞에서 손님이 얼쩡거렸다. 금세 입을 다문 주인장이 사장다운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붓이나 먹이 필요하십니까, 손님? 점포에 새로 들어온 필묵이 아주 좋은데 한 번 보여드릴까요?”

    * * *

    꼬치 가게에 들어온 경소소는 소매를 야무지게 동여맸다.

    꼬치를 돌돌 구우니, 이 어찌 아니 기쁠쏘냐!

    시녀가 굽겠다는 것도 마다한 경소소는 직접 제 손으로 꼬치를 굽기 시작했다.

    “언니, 이 집 재밌지 않아? 우리가 평소 꼬치를 먹으러 가면 다들 다 구워서 내오잖아. 여기는 직접 구울 수 있게 해놔서 훨씬 재밌어!”

    경소소가 구운 꼬치를 먹은 지온이 조용히 웃었다.

    “응 그러게. 소소는 솜씨가 좋구나, 꼬치가 아주 적당하게 잘 구워졌어.”

    “하하하!”

    경소소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내 솜씨야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러나 경소소는 저는 열심히 굽기만 하고 꼬치는 지온 혼자 다 먹고 있단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 언니 그 소식 들었어? 소염이 물에 빠졌었잖아. 그때 머리를 또 다치더니, 회복한 후로 애가 맹해졌다네?”

    “오?”

    그 소식을 지온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소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니 들어주기로 했다.

    ‘그 김에 꼬치도 먹고 말이야.’

    경소소는 신이 났다.

    “그래서 소 부인이 급하게 혼약을 맺으려 한다더라고! 그런데 사고도 연이어 치고, 애도 멍청해졌잖아. 누가 하고 싶겠어?”

    “응응.”

    지온은 누구보다 빠르게 꼬치구이 하나를 더 주워들었다.

    꼬치구이 접시가 빈 것을 본 경소소는 다시 꼬치를 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 소 부인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역신(疫神)을 본 듯 피한다니까…….”

    * * *

    지온과 경소소는 해거름까지 꼬치구이를 먹었다.

    두 사람은 짧게 근처를 구경하며 시녀들이 다 들지도 못할 만큼 많은 물건을 사고서야 각자 헤어졌다.

    지씨 가문의 마차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마부가 거친 갈대를 엮어 만든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자 서아가 그를 흔들었다.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억, 하는 소리를 내며 마부가 삿갓을 제대로 고쳐 썼다. 서아와 지온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 서아는 산 물건을 살피다가 지온에게 물었다.

    “아가씨, 이것들은 어디에 쓰시려고 사신 거예요?”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모르시면서 사신 거예요!?”

    서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가씨가 조금 전 눈 하나 깜짝 않고 사시기에 크게 쓸모가 있는 줄 알았더니!

    지온이 그런 서아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살 때 기분이 좋지 않던?”

    “…….”

    서아가 말이 없자 지온이 다독이듯이 다시 말했다.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니야. 이 그릇은 등기름을 담아 사방전에 둘 수 있을 거야. 투명하게 반짝이니까 얼마나 보기 좋겠어. 그리고 이 술은 너희들이 가져가 장식으로 쓸 수도 있고.”

    서아가 거절했다.

    “하로와 의운의 손재주가 얼마나 좋은데, 이것보다 못한 게 있으려고요? 저흰 필요 없어요!”

    “그럼 청옥과 함옥에게 주자. 가져다 사방전에 온 향객에게 주면 좋겠지.”

    서아가 다른 포장을 열었다.

    “이 조롱박은요? 이건 또 어디에 쓰나요?”

    “볕에 잘 말려서 그림을 그려 넣으면 돼. 창가에 두고 관상하는 용도로 말이야.”

    “이 장생쇄(*長生鎖: 자물쇠 모양의 장수 기원 장신구)는요?”

    달리 핑계가 떠오르지 않은 지온은 이것을 다시 청옥에게 떠넘겼다.

    “향객에게 선물하라고 사방전에 둬.”

    서아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핑계 댈 것이 없으면 어차피 향객에게 주라고 할 테니, 뭐든 다 필요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 지온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오래 가는 거지?”

    그제야 덩달아 의아해진 서아가 마차 가림막을 열어 마부에게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희끗, 눈앞으로 그림자가 스치는 듯하더니 누군가 마차 안으로 훅 들어오는 게 아닌가!

    “꺄……읍!”

    서아가 소리를 지르자 마차 안으로 들어온 이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번득이는 비수를 들어 서아의 목에 가져다 댔다.

    “움직이지 마.”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지온과 서아, 두 사람은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었다.

    차갑고 날이 선 칼이 제 목에 닿자 까무러칠 듯 놀란 서아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감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을 가린 장한(*壯漢: 몸집이 건장하고 힘이 센 남자)을 본 지온이 흘긋, 밖을 살폈다.

    마차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마부를 바꿔치기한 것인가?

    ‘아니야.’

    양어머니께서 붙여주신 암중호위가 둘이나 있지 않던가.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지온은 쿵쿵거리며 뛰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고분고분 입을 열었다.

    “대협, 뭐든 말로 하시고 제 시녀를 상처 입히지 마시지요.”

    지온의 의연한 태도는 사내를 다소 놀라게 했다.

    사내가 물었다.

    “무섭지 않나?”

    지온은 그가 손에 든 비수로 시선을 돌렸다.

    “무섭습니다. 당연히 무서우니 고분고분 잘 따를 것입니다.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사내는 그녀가 손수건을 말아 쥔 모습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

    ‘무섭긴 무섭나보군.’

    다만 범인(凡人)에 비해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뿐이다.

    ‘말이 통한다니, 이번 일은 쉽게 되겠어.’

    “너희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서아를 마차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비수는 여전히 목에 겨눈 채였다.

    “머리 굴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아가씨. 아니면 이 비수가 네 시녀 아니면 아가씨 몸에 꽂힐 테니까.”

    “네, 그럴게요.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지온이 바로 대답했다.

    지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순히 나오자 짐을 던 듯한 사내가 자리에 앉았다.

    ‘역시 나약한 여자일 뿐이다. 상부에서 꽤 능력 있다더니, 그래봤자 날붙이 앞에 저가 뭐라고? 별수 있어?’

    마차는 다그닥다그닥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서아의 얼굴은 놀라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온은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는 비수를 봐가며 조용히 입을 뗐다.

    “비수를 치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차가 계속 흔들리는데, 자칫 긋기라도 하면 어쩌겠는지요? 비수를 치워주시면, 저희는 정말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사내는 그저 지온을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치워주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바짝 선 칼날에 상처 입은 목에서 피가 비치는 것을 본 사내는, 서아가 날에 쓸려 다치지 않도록 날 방향을 틀어주었다.

    사내의 행동을 본 지온은 가슴을 무겁게 누르던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목숨까지 해칠 생각은 없어보여. 그럼 납치인가? 양어머니께서 붙여주신 호위들마저 넘길 정도야. 대체 어디에서 보낸 자지?’

    움직이는 마차에서 한동안 생각을 거듭하던 지온이 목소리를 냈다.

    “대협, 저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사내가 또다시 저를 흘끗 보기만 뿐, 대답하지 않자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금전이라면,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곧 날이 어두워질 텐데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규방의 소저가 외부에서 밤을 보낸다면 평판에 흠이 갈 것이에요. 그럼 누가 돈을 내려고 하겠습니까?”

    이리 말하는 지온의 얼굴이 그렇게 무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수심 그득한 그녀 모습을 본 사내의 마음에 절로 동정심이 돋았다.

    생부와 생모를 다 잃었다던데, 정말 평판에 흠이라도 잡히면 지씨 가문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루 대인이란 사람과도 그랬다. 아직 혼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누가 평판에 흠이 있는 소저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상부의 명을 어길 수 없는 사내는 어쩔 수 없이 냉정히 대답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이다.”

    그의 대답에 지온은 어림짐작했다.

    ‘금전을 바라고 온 게 아니야. 그럼 복수를 위해서……? 소씨 가문인가? 아니, 아니야. 이렇게까지 할 리 없어.’

    저에게 복수해봤자 그저 순간적인 감정을 해소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 후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감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온은 실로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도록 그녀가 돌아가지 않으면 하로와 의운은 분명 대장공주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암중호위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대장공주는 저에게도 문제가 생겼단 것을 알게 될 터였다.

    ‘그럼 분명 누군가 구하러 올 거야.’

    평판에 흠이 생기는 것?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도 어차피 자신은 혼인할 수 있을 것인데.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드디어 멈춰 서자 눈에 들어온 것은 저택이었다. 문을 열라고 소리친 마부가 그대로 마차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온과 서아를 마차에서 끌어낸 사내는 두 사람을 저택 안 건물 한 채에 밀어 놓았다.

    그들이 타고 온 마차는 헛간 앞에 대충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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