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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19)화 (219/385)
  • 219화. 추측

    과거사를 떠올린 슬픔으로 격양된 감정으로 시작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다.

    북양태비는 연기조차 하지 않았다. 멀쩡히 살아있는 자식을 보지도 못하고 지내며 걱정했던 심정이 그녀의 목소리에 절절하게 녹아있었다. 비통에 찬 노모의 모습은 바라만 보아도 눈물을 줄기줄기 뽑아낼 정도였다.

    그때까지 무정한 얼굴로 서 있던 루안도 그녀의 이야기에 표정이 일그러지듯 흔들렸다. 이윽고 매무새를 정리한 그가 북양태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자가 불효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다시 힘들게 관모를 쓴 풍 어사는, 신료의 마음을 얻으려고 모자가 연기를 한다며 질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내려던 찰나, 동료가 그의 옷을 슬쩍 잡아당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했던 그가 눈빛으로 동료에게 물었다.

    ‘왜 말리는가? 이번에야말로 저 자식을 무조건 잡아넣자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입을 삐뚜름히 올린 동료가 한쪽을 향해 눈짓했다.

    동료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린 풍 어사의 눈으로 두 모자를 바라보는 황제의 모습이 들어왔다.

    황제는 이미 마음이 흔들린 기색이었다.

    그 모습에 기세를 몰아보려던 풍 어사가 흠칫 몸을 굳혔다.

    ‘설마…… 폐하께선 저 모자(母子)에게 자신을 투영하신 겐가.’

    최근 그는 강왕세자와 은근한 불화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왕비는 형제의 관계를 두고 마음을 쓰는 ‘노모’가 아니었다.

    풍 어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하고 있을 때 여강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논의해야 할 조정의 대사(大事)가 아직 많이 남았사옵니다. 북양 루씨 가문의 일은 급하지 않사오니 다음에 다시 논의하심이 어떻겠는지요.”

    풍 어사는 여강의 말을 듣자마자 당장 입을 열어 저지하고 싶었다.

    언뜻 들으면 두루뭉술하여 제 입장을 확실하게 표현하지 않은 듯 들리는 여강의 말은, 이번 일을 그대로 ‘가문의 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저 가문의 일일 뿐인 문제라면 추후에 논의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러나 당장 반박하며 나서고 싶었던 풍 어사의 생각은 그저 머릿속에서 그쳤다.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여 경의 말이 옳네. 북양태비, 자네 가문의 일을 조정 대사를 논하는 자리까지 가져와 자리한 다른 경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 그만 퇴궐하고, 나중에 다시 처리하도록 하지.”

    그러나 아직 연기를 미처 끝내지 못한 북양태비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하오나 폐하! 아직 신부에게 확답을 주시지 않으셨사옵니다!”

    루안이 몸을 돌려 황제를 보았다.

    “폐하. 신, 어머니를 모셔다드리려고 하오니 조퇴를 청하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꿇었던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난 루안이 북양태비를 부축하듯 잡았다.

    “어머니.”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북양태비는 선뜻 몸을 돌리지 못했다.

    “폐하…….”

    루안은 반쯤 끌고 가듯 그녀를 데리고 전(殿) 밖으로 나섰지만, 밖으로 끌려가면서도 북양태비는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신부를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폐하! 저는 그저 아들을 보러 온 것입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폐하! 믿어주셔야 하옵니다!”

    이마에 새파란 핏줄이 불뚝 솟은 루안이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연기는 이쯤 하십시오, 더 하면 과합니다.”

    “그래.”

    루안의 말에 순한 양이 된 북양태비는 그새 비뚤어진 봉황 장식이 된 관(冠)을 고쳐 썼다.

    “그럼 우린 이만 가자꾸나. 이 어미가 입은 예복도 빌린 것이라 돌려줘야 하니라.”

    * * *

    예복을 돌려주기 위해 루안은 북양태비와 함께 나섰다.

    대장공주를 대신하여 두 사람을 맞이한 지온의 목소리가 얌전히 울렸다.

    “어머니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루안과 지온,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모습은 북양태비에게 기쁨과 함께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평생 독수공방할 줄 알았더니, 저놈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예비 며느리가 우린 차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북양태비는 먼 길을 달려온 것이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대장공주는 목탁을 두드리며 진지하게 경을 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북양태비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출가한 선고 흉내를 꽤 그럴듯하게 내는구나! 며칠 전에 같이 술을 들이붓지 않았으면, 나도 그만 믿었을 것이야!”

    대장공주는 그런 북양태비를 완전히 무시한 채 계속 경을 읊었다. 이윽고 그녀는 목탁을 내려놓고 앉아있던 부들방석 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조방궁은 육식을 금하지 않는 것을 모르는 게야? 술을 마시는 것은 규율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

    북양태비가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내가 규율을 몰라서 하는 소리 같으냐? 술을 마시는 일은 규율에 어긋나지 않아도, 술 취하는 일은 걸리겠지?”

    그러자 대장공주가 험상궂게 대답했다.

    “그리 관심이 많으냐? 그럼 차라리 여기, 우리 주지라도 하지 그러느냐?”

    북양태비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찔리나 보구먼! 넌 늘 찔리면 꼭 이런 식으로 나왔다.”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대장공주는 이내 대거리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닫았다.

    그러는 사이 지온이 우린 차를 두 사람에게 올렸다.

    차향이 그윽하게 흐르자 어르신 두 사람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떻게 됐어? 잘 넘긴 게야?”

    대장공주가 묻자 북양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넘긴 것 같구나.”

    그러다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가 돌연 시선을 돌리더니 물었다.

    “풍 어사, 고 녀석은 어느 쪽 사람이야? 강왕세자 쪽이 맞는 게지?”

    시선을 받은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어사대(御史臺)에 속한 이들은 본래 트집을 잘 잡으니 아직 확신할 순 없습니다.”

    “하긴.”

    * * *

    며칠 후 황제로부터 전교(*轉敎: 임금이 명령을 내림, 또는 그 명령)가 내려왔다.

    북양태비가 사사로이 도성에 든 일을 질책하며 봉록을 삭감하나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 당분간 도성에 머무는 것을 허한다는 전교였다.

    ‘잘 넘어갔구먼!’

    북양태비는 받은 성지(聖旨)를 흔들며 히죽 웃었다.

    “끝났구먼. 이제 네 혼사에 관한 일을 봐야겠구나.”

    그러나 손에 든 쪽지를 읽은 루안이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북양태비의 얼굴이 답답해졌다.

    “왜 어렵다는 게야? 벌써 시월이다. 지금 정해야 새해에 혼례를 올리지 않겠느냐?”

    루안은 말없이 제 손의 쪽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쪽지를 읽은 북양태비가 아악 고함을 지르며 패대기를 쳤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 못된 것이 지금 어쩌려는 것이야? 그래서 날 도로 잡아가기라도 하겠다는 게야? 불효자식 같으니!”

    루안이 몸을 낮춰 다시 주워든 쪽지의 내용은 짧았다.

    ‘폐하의 생신에 본인이 직접 하례(賀禮)하러 갈 것.’

    낙관은 ‘혁’, 단 한 글자였다.

    루혁(樓奕).

    북양태비의 장자인 그는 작금의 북양왕이자 루안의 형님이었다.

    루안은 화로를 뒤적여 쪽지를 넣고 태웠다.

    “쪽지에 적힌 날짜를 보니 보름 뒤엔 도착하시겠습니다. 형님께 하실 변명을 부지런히 생각해놓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북양태비가 씩씩거리며 거친 콧바람을 내뿜었다.

    “나는 그 녀석의 어미다! 변명은 무슨 놈의 변명이야, 하려면 그 녀석이 내게 해야지!”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구시렁대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녀석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어찌 제 발로 찾아 올 생각을 해!”

    “그러게 어머니께서 여길 왜 오십니까?”

    루안이 대꾸했다.

    “형님도 불안하신 것이지요.”

    “네가 있는데, 혁이가 불안할 것이 뭐가 있어?”

    루안을 향해 눈을 흘기던 북양태비의 머릿속에 순간 번개가 쳤다.

    “아니지! 안이 네 녀석도 아니고 겨우 이런 일로 혁이가 날 책망할 리가 없지! 내, 인제 알겠구먼! 그 녀석은 불구경하러 오는 것이야!”

    * * *

    이번 일은 정말로 강왕세자가 벌인 일이 아니었다.

    물을 몇 번 먹은 강왕세자는 신중해지는 법을 배우기라도 한 듯, 바보처럼 날뛰고 싶어 몸이 단 소달마저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시를 위해 그가 파견한 세작들까지 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조방궁? 모자(母子), 두 사람이 또 조방궁을 찾아갔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심복이 보고를 올렸다

    “북양태비는 이번 입성 길에 시중들 하인은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금일 입은 예복도 대장공주에게 빌린 것 같았습니다.”

    강왕세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내 고모님과 북양태비는 혼례 전에 사이가 나빴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어찌 이리 사이좋게 군단 말이냐?”

    잠시 머뭇거리던 심복이 입을 열었다.

    “소인의 추측으론…….”

    “말해 보거라.”

    “북양태비가 입성하기 전엔 루안이 자주 조방궁을 들락거렸사옵니다. 그리고 지온 소저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주 도와주었사옵니다. 도성에 온 북양태비는 다른 곳엔 발길을 하지 않았으나, 조방궁엔 벌써 여러 차례 걸음 하였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강왕세자도 뭔가 느낌이 오는 듯했다.

    “자네 말은…….”

    “대장공주는 조방궁에 발이 묶인 몸이지 않사옵니까. 수양딸의 혼사(婚事)는 나서기에 좋은 핑곗거리일 것이옵니다. 북양태비에게도 루안, 그자의 혼사는 앓던 이와 같았을 것이옵니다. 문턱 높은 가문과 혼사를 맺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한미한 가문은 눈에 차지 않았을 테니, 대장공주와 북양태비의 마음이 맞았겠지요.”

    가만히 옛날 일을 떠올리던 강왕세자는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그랬군!”

    루안과 지온 소저는 서로 부딪히며 얼굴을 볼 기회가 정말 많았다. 지난번 소달이 함정에 빠졌을 때 역시 루안이 나서지 않았던가! 그도 모자라 루안은 여강까지 끌어들였다.

    ‘전부 그래서였군.’

    “세자, 대장공주만해도 위험한 인물이옵니다. 그녀와 북양 쪽이 서로 손을 잡기라도 하면 저희에게 좋을 리가 없사옵니다.”

    심복의 말에 강왕세자가 차갑게 웃었다.

    “루안을 치는 게 어렵지, 여인이 무에 어렵겠느냐?”

    * * *

    만수절이 가까울수록 도성도 함께 들썩였다.

    종친과 신하들이 보낸 선물이 매일같이 도성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특히 자리 이탈은 어려우나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직무의 종친과 신하들이 난리였다. 어떻게 해서든 도성에 올라와 즐길 구실을 만드는 이들이 아니던가.

    지온에게도 초대장이 전해졌다.

    “아가씨. 경 소저께서 화정교(華亭橋)쪽에 이민족이 하는 꼬치구이 집이 새로 열었다고 같이 맛보러 가자고 서신을 보내셨어요.”

    지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소소는 매번 날 불러낼 때마다 이것저것 먹자고만 하네. 정국공부 음식이 그리 맛이 없나?”

    지온과 함께 웃음을 터트린 서아가 말했다.

    “가시겠어요, 아가씨?”

    잠시 고민하던 지온이 대답했다.

    “갈게. 출궁한 지도 오래되었잖아.”

    “네.”

    서아가 곧장 답신을 보내기 위해 나섰다.

    * * *

    다음 날 오후, 지온은 마차를 타고 화정교로 향했다.

    “지온 언니!”

    이미 화정교에 도착해있던 경소소가 제 마차에서 머리를 쑥 내밀더니 팔이 떨어질 듯이 흔들어댔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자 경소소가 물었다.

    “요즘 뭐하고 지내는 거야? 그렇게 불러도 계속 나오지도 않고…….”

    “일을 많이 벌였잖아. 밖에 나왔다가 얻어맞을까 봐.”

    “어?”

    경소소는 그녀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지온이 말을 돌렸다.

    “네가 말한 꼬치구이집은 어디 있어? 정말 그리 맛이 좋아?”

    “응,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들었어.”

    경소소가 불만을 쏟아냈다.

    “오라버니가 군영으로 돌아가고 나니까 아무도 날 데리고 다니질 않잖아. 언니라도 있어야 내가 외출을 한다니까!”

    “내 생각했다는 건 다 핑계였구나?”

    지온이 경소소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

    두 사람은 깔깔, 수다를 떨며 화정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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